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4장 마인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88화 - 사납게 날뛰는 은색 -

개성공단 2021. 4. 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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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이스트 왕국 왕도
혹은 마성 군림 도시 아르셰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그 곳에서
마인과 대면한 카리아 버드닉이 목숨을 건진 것은 순전히 행운이였다.

마인의 요격이 순간적인 반응에 불과했던 것
그리고 그녀의 몸에 끓어오르는 거인의 피가 그녀의 목숨을 부지하게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지에서 
죽을 정도의 피를 흘리며 더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녀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나무에 팔다리를 꿰뚫리는 순간 
곧바로 의식은 사라지고 몸은 그대로 절명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생존은 틀림없이 행운과 육체의 완강함이 뒷받침되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기뻐해야 할 일일 것이다.
평상시라면 말이다, 살아남아서 기뻐하지 않는 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차라리 영원한 잠이라도 자버리고 싶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수도 안에서 더욱 큰 소리가 땅에서 울려 퍼졌다.
카리아는 그 소리를 들으며, 전에 없이 초췌하고 은발을 늘어뜨린 모습으로
어딘가 힘없이 사지를 내던지고 있었다.
아니,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건 당연한 일이였다
한번 갈기갈기 찢어진 팔이나 다리는 
거인의 피를 가지고도 급속히 회복되지 않는 법이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감각이 카리아의 강하고도 여린 정신을 산산조각으로 때려눕혔다.






나는 패배했어
한 역할 하나 하지 못한 채
남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거야...





그럴 때마다 카리아의 가슴에는 위액에 가까운 씁쓸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자기혐오란 아무리 항거해도 자기 안에서 이곳저곳에 침투해 오는 것이니 말이다

아아, 정말로 비참하군.
이대로 죽어보리고 싶어
그러면 온갖 고뇌도 타버릴 것 같은 굴욕도 없어질 텐데
아무튼 카리아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입 다물고 뭐야? 가위라도 눌린건가?"



 
루기스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몸을 맡긴 등이 목소리에 맞춰 떨리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카리아는 
그저 루기스의 등에 안겨 하수도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부터 이러했으니까, 
아마도 하수도로 데려다 준 것도 그였을 것이다.
정리하면, 나는 혼자서 위기에서 조차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
비참함이 더욱 심해지는 카리아였다



사지가 흔들흔들 흔들리면서 허공을 걷어치고 있었다.
루기스의 몸이 그리 무사할 수 없으련만 
자신만 이렇게 편히 등에 올라타 있다니...
카리아는 눈물을 머금으며, 자신의 등에 볼을 부비댔다

죽어버리고 싶다...
굴욕과 자신의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한스러움에 몇 번이고 가슴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눈앞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집착이 남았다.
카리아는 은색의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하다... 나는 실패했어... 욕해도 상관없어...."






루기스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책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확실한 것은 아직 기력이 남아있었다는 것



여기서 한숨과 함께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지?
그런 낙담과 경멸 같은 말을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카리아는 반사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그에게 매달릴 수조차 없다.
그저 땅에 엎드려 비참하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기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카리아의 가느다란 어깨가 후들거리고 얼굴이 핏기를 잃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말 하지마, 카리아
넌 언제나 완벽해, 마인이건 대마든
그것을 앞에 두고, 흔들린 적이 없잖아?"






카리아의 볼이 떨렸다.
루기스의 말에 카리아는 눈앞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가슴속에 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의 은발이 그녀의 가슴 속을 표현하듯 출렁이고 있었다.

카리아는 이와 같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지만, 
기뻐하는 것과 유사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신기하게도 꿀술의 맛이 혀에 맴돌았다.





"실수한 것은 오히려 나야
그 자식에게 감쪽같이 넘어갔어
마인이 괴물이란 존재는 알았지만
좀 더 자세히 알고 가는건데 말이야"





그렇게 말을 늘어놓는 루기스를 보며
카리아는 은색의 눈을 가볍게 풀어나갔다.
다만, 그의 말에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엔 루기스와 카리아 이외엔 아무도 없다.
중간에 다른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어오는 일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최근 들어 상당히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요즘 그의 주위에는 늘 누군가가 있다.
피에르트나, 엘디스 그리고 마티아... 아니면 다른 자라던가

도주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차분하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흔치가 않았다.
카리아는 말에 사랑스러움마저 담아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괴물하고 어떻게 싸우지?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죽일 수는 있는 것일까?"



 

뻔한 답을 묻듯 카리아는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게서 절로 미소가 뺨에 떠올랐다.
카리아의 머릿속에는 아직 둘이서 여행을 하고 있을 무렵...
지금 생각하면 매우 매우 행복했던 시절이, 생각나고 있었다.

루기스가 어깨를 한 번 기울이더니 말했다.





"글쎄... 그래도 죽일 수 없는 존재란 없어
영웅도 마인도 대만도 신도 죽을 때는 죽는 법이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어"




패배를 당했는데도, 온몸이 너덜너덜할 텐데도 
생생한 목소리로 루기스는 말했다.
어딘지 실감조차 나지 않는 그 목소리에 
카리아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비록 근거 없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가 말한다면 카리아에게 그것은 믿을 만했다.
남은 집착을 그의 등에 문지르며 은색 눈을 뜨는 동시에 카리아는 소리를 냈다.





"그래, 네 말대로 죽여버리자꾸나, 반드시 죽이는 거야"





은색의 시선이 루기스의 어깨 너머로 하수도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루기스 또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칼리아의 사지는 아직도 저려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녀석이 말하는 거야, 죽일 수 있다고...

그렇다면 그것은 진실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뜨거운 한숨을 내쉬고, 온몸에 거인의 피를 두르게 하며
은색의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끝을 움직이려는 순간... 시선 끝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이겠다느니 마느니
요즘 인간들은 그렇게 거친말을 쓰는 군
그런 건 야만이라는 거야, 몰랐니?
아니면 사실 알고 쓰는 것인가?
그렇다면 드래그만 그 녀석이랑 다를게 없네"






아, 형편없는 놈의 이름을 꺼내버렸내, 라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흰 머리카락에, 처음과는 다른 색채의 옅은 눈
거기에 있던 것은 이름을 레우라고 밝힌 그 소녀
그녀는 그 오른팔에서 무시무시한 피를 흘리며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고 숨결은 가빠보였다.
누가봐도 피로가 누적되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발랄한 채, 신체의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발밑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기에






"너희는....... 인간... 인간이네
그렇다면 인간을 고치는 법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럼 이것을 어서 고치는 거야
나는 그 망할 통제자 놈을 쓸어버리려야 한단 말야"





통제자 드래그만과 같은 마인
보석 아가토스는 마치 물건을 고치라고 명령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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