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4장 마인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89화 - 불행을 정하는 자 -

개성공단 2021. 4. 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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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눈앞에서 계속 피를 흘리는 인간
통제자 드래그만이 이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리고 그 이름을 딱 하나 알고 있었다

대마 제브렐리스를 섬기는 마인
보석 아가토스

그녀가 주위에 두른 보석은 그녀의 몸을 지키는 방패
그 보석에서 내뿜는 열선은 비룡의 불길이 우습게 보일 정도
그런 신화의 시대의 물건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다섯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고
그렇게 대도시 하나분의 생명을 온통 보석으로 바꾼 여자
인류의 악몽 그 자체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란 말인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레우라고 이름을 칭한 소녀가 분명한 이상을 보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피를 미친 듯이 토해내면서도 
창백한 얼굴과 낭랑한 어조는 미친듯한 부자연스러움을 자아냈다

마성의 종류라고 하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옛날 보았던 보석과 
지금의 이 소녀는 모습이 전혀 달랐다

내가 알기로 아가토스라는 마인은 
핏빛처럼 짙은 붉은색의 머리카락에
지금처럼 하얀 눈을 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욱 여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레우 같은 아이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런거지?

한 가지 직감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에 쏟아부으면서 눈꺼풀을 살짝 감았다.
그러고는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레우
숙소에서 기다리라고 했을텐데 말야"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히려 당황한 듯 말했다.
답변을 유발해,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을 생각이였다

지금은 하나라도 정보가 필요하다.
상대가 진정 누구이고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을 저질렀는가?
나의 직감은 맞는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어쩌면 마인 아가토스는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건 가상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아아, 나와 아는 사이였어... 기억은 잘 안나지만, 이제 이 몸은 내꺼야
걱정하지마... 이 얘는 머지않아 없어질거야... 그럴 운명이야... 이해하고, 포기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고며, 절로 이가 떨리는 것이 들렸다.





이 몸은 내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나도 무지하지 않다.
내 자신의 직감이 이끌어낸 짐작이 그대로 정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감정을 드러내야 할까
놈의 말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최악이다. 최악의 최악인 것이다...

놈은 레우라는 소녀의 몸을 빼앗았다고 그렇게 말해버린 것이였다.

그 녀석은 말을 마친 뒤 발밑을 비틀거리며 하수도에 주저앉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시건방졌지만, 그래도 몸은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파랗게 하얗게 된 얼굴이, 숨을 거칠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무거운 듯 휘청거렸다



그것을 본 카리아가 루기스, 하고 속삭였다
겨우 기력이 돌아온건지,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은빛 눈으로 마인을 영악하게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의 덧없는 분위기도 싫지는 않았지만.
역시 내가 아는 그녀, 카리아라는 영웅은 이 모습이 최고였다

카리아에게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저앉은 벽에 기대어 선 마인으로 발길을 돌렸다.
카리아가 말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고 말이다

요컨대 지금이라면 쉽게 놈을 죽일 수 있다...



자칫하면 요새조차 단기로 함락시키는 괴물
인간의 천적, 그것이 지금 이렇게 허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완전한 모습이 아닌 상태에서...

바로 엄청난가 여기에 있었다.
마인의 일체를 여기서 죽일 수 있다면, 
이 패주를 보충하고도 남을 성과일 것이다.
허리춤에서 보검이 마치 의지를 갖추듯 소리를 내고 있었다.

칼자루에 손을 대면서 한 걸음 다가섰다.
마인이 우울한 듯이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았다.






"……나 자고 있을테니까 고쳐놔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난 아름다운 걸 좋아해, 보석처럼 반짝이고 싶어
그렇기 위해선 자유로워야 해... 그러니 고쳐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마인은 초점이 없는 이상한 눈동자를 보이며 엉뚱하게 말했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자니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무거운 듯한 눈을 감았다.
피를 펑펑 쏟아내며 창백한 얼굴로 잠든 그녀의 모습은
이제는 죽은 사람조차 방불케 했다

보석, 아름다운 것
분명 그것이 이 마인의 마원과 관련된 것이겠지.
마원이란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그들 또한 그 마원에서 탄생한 것이다
마원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않는 것이 마인이였다

그러나 육체적인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루기스는 창백한 잠든 얼굴을 응시하면서 보검을 뽑아들었다.
어둑어둑한 하수도 속에서 미려한 보라색이 그 모습을 보였다
광택을 띄우는 그 모습은 이 자리에서 반짝일 자격을 갖춘 듯했다.




눈앞의 마인이 눈꺼풀을 드는 것 같은 모습은 전혀 없었다.
아마 경계라는 행위를 모르는 건가도 싶었다

아마 지금, 보검을 내리치는 것만으로 일이 끝날 것이다.






"루기스, 네 놈은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무엇 하나 잘못 된 것이 없는 것이다"



 


카리아는 가느다란 호흡으로 그렇게 속삭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지금의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흰머리 소녀 레우
그녀는 분명 불행한 자다.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그 몸이 마인에게 붙잡힌 시점에서 
최고의 불행을 삼킨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분명 그녀는 앞으로도 불행해질 것이다
설령 살아남는다고 해도 마인에 갇힌 몸으로는 제대로로 살 수 없겠지
그리하여 더 많은 불행을 낳게 될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그 밑천을 잘라주는 것이 좋아

그런 생각이 들었던 순간...



예전의 시절이 잠깐 눈에 떠올랐다.
최악이었던 그 시절 존엄도없고 의지도없고...
그냥 살 수조차 없었던 나날들...
그때의 일이 묘하게 생생하게 눈에 남았다.

루기스는 볼에 일그러진 미소를 띄었다.

남의 불행을 멋대로 단정짓고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고
그것의 운명을 멋대로 결정짓다니...

너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쓸테니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라도, 모든 것을 포기해달라...

결국 나는 이러쿵저러쿵 핑계를 대면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혐오로 자기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그런 말을 하는 녀석들은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남에게 불행을 떠맡기고, 자신은 깨끗하게 살아남으려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전체에 도움이 된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는 것이 놈들의 장기였다

스스로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 싶지 않은 놈들이 
다른 사람에게 위험한 다리를 건너게 하기 위한 상투적인 문구
아아, 나는 그것이 정말 싫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혐오심으로 이를 갈며, 그대로 무릎을 한 번 찧었다.
그리고 마인... 아니, 레우를 한손으로 안아 올렸다.
눈꼬리가 가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안해, 카리아
나는 아무래도 옳다는 것이 피부에 와닿지 않나 봐
섬세한 사람이서 말이야"







내가 레우를 안아올린 것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않는 카리아를 향해 등 너머로 말했다. 
분명, 따끔한 말을 들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카리아는 내 등을 붙잡은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와 네놈의 여행길에서 모두 옳은 선택을 한 적이 있었느냐?
오히려 옳다고 한 선택이 잘못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이 옳은 적도 있었다"





그럼 나중의 일은 모르는 거라고, 카리아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은빛 머리칼이 기분 좋게 출렁이고 있었다
오늘은 묘하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언제나 이렇기만 한다면 나도 만만세일 텐데.

카리아는 내 등에 기대며 말했다.






"맞든 안맞든, 나는 너를 믿는다, 그거면 되지 않겠나?"


"책임이 막중하네, 조금은 의심해줬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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