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99화 - 생명의 가치 -
흑빛이 원을 그리며 하늘을 갈랐다
대검의 무게를 이용해 휘둘러지는 일격이
리처드의 손을 축으로 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휘두르기만 해도
숨이 가쁠 흑검을 노인은 익숙한 모습으로 허공에 날렸다
그것은 그가 쌓아온 것의 결실이요, 밟아 밟아온 과거의 발자취 그 자체다
그 만큼의 무예가 지금 리처드에게 있었다
검은 검이 선을 남기고 마인 드리그만의 손발을 휘감겼다.
쇳덩이는 오열을 터뜨리며 살을 도려냈지만
하나하나가 상처를 얇게 끝내 결말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처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재생을 계속했다
마인의 모습에도 전혀 초조라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약간 눈썹을 찡그리고 있을 뿐이였다
아마도 이 검으로는 괴물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리처드도 반쯤 그걸 이해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껍질 한장을 도려내는 정도로는
사슴 한 마리의 목숨도 손에 넣을 수 없다.
거인을 상대하는 것과도 같다, 상처를 내도 죽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리처드가 지금까지 적대했던 자들 중에 그런 건 당연했다
금속을 통하지 않는 피부를 가진 마족
광기를 전파시키는 마수조차 썩어빠지게 하는 마성
그 어느 것이나 다 죽여 왔다
리처드는 확신했다
거인도, 정령도, 괴물도, 그리고 마인도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자는 없다,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사실 눈앞의 이놈은 신화시대의 아르티우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녀석도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해
흑검의 칼끝이 다시 드리그만의 오른손으로 날아갔다
마인은 가볍게 손목을 돌려 그 쇳덩이를 가볍게 튕겼다
혼신의 한바탕 결과는 마인의 피부에 약간의 상처를 입혔을 뿐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좋다
동시에 리처드는 시선 끝으로 마인의 왼손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면, 바닥판이 부서지고 돌조각이 튀어 나왔다
양측의 공방은 이런 식이 계속되고 있었다
드리그만의 공간을 파괴하는 공격을
리처드가 가까스로 피해가며 결사 구격을 휘두른다
옆에서 보면 공격하고 있는 것은 리처드였지만
거기에 우위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그 자리에서 몸부림치며 죽을 것이다
살과 뼈가 으스러질 각오를 리처드는 가슴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하지만 양자간의 사이에는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육체의 완강함이나 무기의 차이가 아닌, 생물로서의 지구력
드래그만은 잠시도 숨을 헐떡이지 않았지만
계속 움직여야 하는 리처드에게는 곧 체력의 한계가 닥칠 것이다
그러니 드래그만도 지금의 기묘하게 대치한 이 상황에 손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의 한순간의 일이며, 금방 끝날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당장 무리해서 공격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 자신의 차례는 올 것이다
리처드는 냄새를 맡듯 코를 살짝 킁킁거렸다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 지 아직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짧은 시간에도 몇 번이나 죽음을 피해갔다
정말 성가신 놈이다
시간을 좀 더 벌 수는 있겠지만
아직 완치되지 않은 배 때문에
몇 번이나 통증을 느끼는 리처드였다
몇 번이나 쇠가 튕기는 소리가 나며 칼싸움은 계속됬다
그것도 한 쪽이 너무나도 불리한 위태로운 싸움이였다
그리고 당연한 순간이 오게 되었다
한순간, 엄청난 피가 튀어올라 옥좌 사이를 더럽혔다
그 혈액의 소유자는 마인이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유일한 인간
리처드 퍼밀리스의 것
검은 검이 비뚤어진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 뿐만이 아니였다
검은 검과 동시에 리처드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피와 살이 튀고 골수를 태우는 통증이 리처드의 머릿속을 찔렀다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만으로도 행운일 것이다
조그만 더 다친다면, 지옥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니...
물론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다
"그만 끝내자고, 떠들고 뒹구는게 능사는 아니잖느냐
깨끗하게 죽는 것도 일종의 미학이지, 안 그래?"
드래그만은 손바닥을 펴 리처드에게 들이댔다
더 이상 속수무책일 게 뻔하지 않나
그것은 마음속에서도 생각하고 있던 말
한쪽 팔을 잃은 것은 단지 무기를 잃은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신체의 균형은 깨지고 익숙해질 때까지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진다
하물며 검을 당장 주워 휘두르는 등은
영웅이 있는 동화책 같은 것에서만 나오는 내용
한순간의 판단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전쟁터에서
팔을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드래그만도, 그리고 리처드도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검은 검을 다시 주워들이는 시늉은 하지 않고
그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너를 죽여야 할 것인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리처드는 조금도 움직이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인간의 태도
게다가 더 이상 저항할 수단도 없었다
그래서 드래그맨도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인간이 자신들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용감한 자의 말 정도는 들어주는 정도의 너그러움은 갖고 있었다
마인에게 있어서는 실로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드래그맨에게는 목구멍을 기어다니는 듯한 위화감이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 인간은 죽기 직전에 이렇게도 침착한 것인가
어떤 사람도 죽기 전에는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그것이 이 인간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아무래도 드래그맨에게는 마음에 걸렸다
"베어도 죽지 않는다... 마법도 듣지 않는다
그런 사기 같은 놈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름에 불을 붙여볼까? 올가미를 끼워 질식시킬까?
노회한 수염이 출렁거리며 주름이 미소를 띠듯 깊어졌다
그리고 그의 하얀 이가 볼 안에서 잘 드러났다
드리그만의 손가락이 저린 듯 떨렸다
"아니... 독을 넣을까...다"
리처드는 눈을 강하게 뜨며 말했다
피가 너무 많이 빠진 탓인지 시야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의식이 끊길 것이다
말은 했다만
실제 검에 바른 독이 어디까지 효과를 이루었는지
실제로는 리처드도 몰랐다
마인에게 효과가 있는 독은 지금까지 고안해 본 적도 없었다
여하튼 그런 존재는 신화의 세계의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레우의 말을 리차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드리그만이라는 마인은 인간의 몸을 앗아간 것이라고
그것이 어느 정도 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과 신체를 앗아가는 마성을
리처드는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러한 무리란 대개 곧바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들여 가고, 년 단위로 몸을 찬탈하는 것이였다
그 전까지는 마성이 되어도 본체의 인간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만약 이 통제자인
마인에게도 아직 인간의 부분이 남아있다면
독은 의미를 이룰 것이다
그럴까봐 리처드는 애검에 독을 바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집요하게 조금씩이나마 상처를 입힌 것이다
독이 혈관을 타고 나아갈 수 있게끔 말이다
게다가 타격은 하나 더, 그것은 기름과 불
리처드의 코 끝에는 그을음 냄새가 배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른 행동을 취하게 하고 있던 병사들이
그 역할을 겨우 완수해 낸 것 같았다
왕성이라는 곳은 항상 많은 양의 기름을 보유하고 있다
기름은 생활의 필수품이자 군수물자이기도 하다
만약 농성 사태가 벌어지면 물과 함께 반드시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곧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 기름을 모두 다 풀라고 병사에게 말했다
"마법의 불이 미치지 못한다면... 기름의 불은 어떤가
시도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시도해 볼 거라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난 떳떳한 녀석이 아니라 말이지...
드래그만은 리처드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했다, 그 얼굴엔 감정이 조금 들뜨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정말 강하고... 아니, 강해졌군
하지만 어떻게 발버둥쳐도, 넌 여기서 죽을 것이다"
드래그만은 손바닥을 벌렸다
살짝 손끝에 저린 느낌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순히 감탄할만 하다
인간은 그저 사나울 줄 알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집착할 수 있는 생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리처드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인간이란 언젠가 어딘가에서 죽는 법이야
그렇다면 그냥 죽을 바에, 어딘가에 가치 있게 써야 하지 않겠어?"
말이 끊기고 드래그만이 손바닥을 쥐려는 순간
정령의 발소리가 옥좌 사이에 파고들었다
동시에 보랏빛 일격이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