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20화 - 끊임없는 야심 -
너는 누구와 얘기하는 거냐, 우리를 보고 말해라
은빛 눈에서 쏟아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켜잡았다
사소한 아픔이, 배 밑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올라오고 있었다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가
그런 단순한 물음에 나는 전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술이 마치 반응하지 못하고 일그러져 갔다
몇 번인가 머리에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하나하나가 가볍고 얄팍한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카리아는 물론
피에르트와 엘디스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세 쌍의 두 눈은
허용심 같은 것은 마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진지했고, 그리고 어디까지나 용서가 없었다
내가 설령 눈을 돌릴 일이 있으면
그 시점에서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은
그런 사나움을 잉태한 눈이 나를 응시해갔다
그렇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예전 세계에서 겪은 먼 미래의 일을 그들에게 말할 것인가
술안주거리도 안되는 얘기를 지금 이들에게 할 수 있을까?
머리가 열까지 나면서 말을 고르는 동안
엘디스는 묘하게 윤기 어린 미소로 말했다
"우리가 눈치 못 챈 줄 알았어?
넌 이따금 우리를 통해 누군가를 보는 것 같았지"
엘디스가 나에게 몸을 기대게 함과 동시에 팔을 잡는 힘이 강해졌다
동시에 내 폐에서 차가운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심지어 등줄기엔 땀이 흘러내리기 까지 했다
엘디스는 부드럽게 입술을 치며 말을 이었다
"루기스, 네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우리에게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지 알고 있었어?"
머리에 말뚝이라도 박힌 기분이었다
엘디스의 푸른 눈을 진지하게 볼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녀의 눈은 마치 내 양심의 가책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엘디스가 한 말은 당연한 것
오히려 여태껏 들이대지 않았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리 지난 시절을 알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 무렵과 지금의 그들을 시간이 지나도
분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여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은 얼마나 모욕일까
과거와 지금 그들은 별개의 존재이고
그렇게 그들이 살아 숨쉬는 것은 분명 지금이다
그들은 언제나 작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인형도 배우도 아니였다
나는 목구멍에서 숨을 내쉬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뺨 근처에 차가운 무언가가 지나감을 느끼며,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 입술을 열었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번득임이 없었다
평소에는 가볍게 움직여 주는 혀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내가 잘못했어, 이거 어떻게 속죄하지?"
나는 시선을 숙이고 말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그것조차 모르겠다
결국, 지금의 그녀들과 마주하지 않았던
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싫증밖에 나지 않았다
정신이라는 것이 그대로 조여져 있는 기분이였다
계속 눈을 돌렸던 과거가, 지금 여기에 현실로 가로막고 있을 뿐
인생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다
도망친 자는 머지않아 자신의 어깨를 잡아오는 법
그렇다면 지금 마주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순간 실내에서 말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내 피에르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좋아, 루기스
너를 탓할 생각은 없어
사정도 들어봐야 하고 말이야
그렇지만 나쁜 것을 깨달았다면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겠지?"
피에르트의 속삭임은 귀를 휘감는 듯한 음색이었다
맹세, 서약, 약속
보통 사람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마법사가 꺼내는 맹세라는 말은 수많은 의미를 지녔다
그야말로 때로는 영혼을 꽁꽁 묶어놓기도 하는 것이였다
피에르트가 뭘 하고,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것을 억지로 냅다 튕겨버리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이야기가 너무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카리아나 피에르트, 그리고 엘디스
평상시라면 말을 칼로 덧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들이 오늘은 서로의 말에 한마디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납득했다는 투였다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피에르트, 아니 카리아와 엘디스도
그들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착지점으로 이끌기 위해
모두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옛날의 그녀들들이라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들이라면
당연한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새 등줄기에는 한기가 닥쳐, 뺨을 벌벌 떨게 하고 있었다
◇◆◇◆
왕도의 병사들 막사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남다른 분노로 가득 차 있으며, 그리고 매우 초조해 보였다
"저 방화범 찬탈자들을 당장 왕도에서 처형해야 합니다, 리처드 대대장!"
네이마르 글로리아의 칼끝처럼 날카로운 말을 듣고
리처드는 어이없다는 듯 하얀 수염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오른팔을 잃은 탓에 평형을 잡기가 힘들었는지
리처드의 어깨는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좀 기다리라니깐, 선뜻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지금 그 아가씨를 죽였다간, 왕도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될거야
그럭저럭 왕도를 부흥시킨다는 면에선 좋잖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게 된 이 대화
하지만, 그것을 몇 번이나 꺼내는
네이마르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있는 것 같다고
리처드는 술을 입에 머금으며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이룬 공적을 마치
그 공주 전하의 공훈처럼 소문내는 것은 좀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네이마르의 속마음을 끓이고 있는 것은
스스로가 문장교에 이용당했다는 실감일 것이다
네이마르는 당당한 행동으로 성문을 내려 마수들을 물리쳤다.
그 광경은 왕도의 시민의 눈에도 깊이 새겨져
갈라이스트병의 강인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갈라이스트병을 이끌었다고 되어 있는
공주에게도 신망이 쏠리게 되는 것이였다
본래대로라면 네이마르는 그 풍문을 정면으로 부정해야 하는 것이겠지만만약에 그 찬탈자가 진정으로 공주가 된다면
갈라이스트병이 그 밑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게 되는 것이였다
그리고 네이마르가 제일 짜증나는 일은
필로스 트레이트라는 인간이 왕족을 자칭하는 것에 대해
군병은 이의를 제기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였다
왕의 혈족이란 곧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
그렇다면 그것을 선정하는 것은
왕이나 그에 가장 가까운 고위 귀족들
지금은, 중앙에서 권한을 가지지 못하면서
옛부터 왕국을 지탱해 온 귀족들이 그녀야말로 공주라고 지지하고 있었다일개 대장 리처드나 지방 귀족에 지나지 않는
네이마르의 말은 발언권이 없었다
하지만 네이마르로서는 납득이 갈 리 없었다
이 왕도를 탈환한 것은 틀림없이 자기들 구호병
문장교도도 귀족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문장교가 후원하는 자가
어떻게 갈라이스트 왕국의 정식 공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본래 네이마르의 말을 대변해야 할 고위 귀족
그런 왕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들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너도나도 왕도에서 도망쳐 북쪽의 대성당에 몸을 맡겨 버렸다
그래서 더더욱 그 찬탈공주가 지지를 얻고 마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최악의 일이라고 네이마르는 이를 악물고 분노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리처드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리처드에게 필로스 트레이트의 과거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였다
그 경위도 대충은 이해하고 그 뒤에 도달한 궤적도 이해했다
게다가 서니오 전투 때 한 번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있었으니
그 필로스라는 공주는 그토록 강인한 여자였었나?
아니, 오히려 고집이 세고, 금방 부러질 것 같은 여자였다
지금처럼 과거조차 삼키고 미소 짓지 않았으며
진실을 알았더라면 불타오르는 증오를 가질 법한 인간이라는 것이
리처드 안에 있었던 필로스에 대한 평가였지만
상당히 많이 변했다
좋든 나쁘든 말이다
전쟁터가 그녀를 변모시키는 약이 됐을까
다른 게 있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리처드는 혼자, 짚이는 것을 눈꺼풀에 띄우고 있었다
그 관계의 정도는 두더라도, 그 녀석이 관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네이마르가 생각하는
자기들에게 권한이 없기 때문에
손을 댈 수 없다는 판단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리처드라는 악역이 그런 정당성에 연연할 이유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과 함께
피바다에 가라앉혀 버리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왕은 그 첩의 공주를 목을 떨어뜨리고 싶어했으니까
그쪽이 훨씬 왕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그것을 리차드가 취하지 않는 것은, 하나 뿐
다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가슴 밑바닥에 얼핏 싹튼 정도의 생각 말이다...
네이마르의 말이 진정되자
리처드는 한 손으로 무릎을 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칼이 허리춤에서 흔들렸고
그는 근처의 병사들에게 한 마디를 외쳤다
"어이, 술 좀 가지고 와라
나는 잠깐 악당 놈과 얘기를 하고 올테니 말이야"
팔이 찢겨져 나갔음에도,
아직 눈동자 속에 끊임없는 야심을 품고 리처드는 볼을 일그러뜨렸다
깊은 미소가, 뺨의 주름을 짙게 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