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23화 - 위대한 자 -
리처드는 막사 지휘관실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양피지 명령서를 훑어보았다
평상시 같으면 명령 하나에
양피지 같은 사치품을 쓰려 하지 않겠지만
이 일은 말로 때울 순 없었다
잠시 후 팔로 글을 쓰는 리처드의 시야에 문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가 자신과 양피지를 당당하게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처드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잉크를 계속 몰자
화가 치민 듯 그 그림자가 소리를 지렀다
"대대장님! 할 말은 다 하시고 오신 거겠죠?
당연히 그들에게 양보를 받아내신 거겠죠?"
부관 네이마르
그녀의 목소리를 힘찼고, 위아래를 가리지도 않는 투였다
상관을 상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부관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리처드는 네이마르 외에는 몰랐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순조롭게 잘 됬어... 내 마음도 정했고 말이야"
가벼운 말투로 리처드가 말했다
네이마르는 그 말만 듣고 볼을 이완시키며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허리에 찬 칼을 움직였다
입에서 나온 말은 리처드를 찬양하는 것과도 같으며
리처드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말이였다
아무래도 네이마르는 대대장이 왕도 영유권을 놓고 문장교와 다투고
그렇게 승리해 왔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리처드는 자신의 속마음을 한 조각이라도 네이마르에게...
아니, 자기 편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리처드는 양피지에 명령문을 써놓은 뒤 네이마르를 불렀다
그녀의 땋은 머리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네이마르, 나는 결심했다
문장교와 손잡고 저 공주를 옹립하도록 하겠다"
루기스에게 말한 내용을 요점을 간추려 전달한 뒤
부대장과 병사들을 모아오도록 리처드는 지시했다
이를 위한 명령서를 네이마르의 손에 건네주면서 말이다
순간 실내는 정적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든 소리가 폭설에 빨려들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분노의 분화를 동반해 네이마르가 입을 열었다
말은 거셌고 눈꼬리는 화염마저도 번뜩일 기세였다
"장난치십니까 대대장님!?
농담에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시는 겁니까?"
네이마르는 젊어서인지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기 안에서 미쳐 날뛰는 분노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말로 다 해버리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것인가
리처드의 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게 가장 적합한가
엄청난 일에, 네이마르의 사고가 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마음을 따르기로 했다
왼손이 허리춤의 검에 놓였다
리처드는 팔뚝을 집무 책상 위에 내팽개친 채 그대로였다
평상시에는 당할 수 없더라도 지금 이 때 뿐이라면
검솜씨는 내가 나을거야, 내가 이길 수 있을거야
네이마르는 마음먹었다
리처드가 만약 알 수 없는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상처를 입혀서라도 그를 막겠어
그 입에서 나온 변명이 갈라이스트 왕국을 반하는 것이라면 말이야...!
네이마르의 생가, 글로리아가는 보잘것 없는 지방귀족이지만
그래도 왕국에 충성을 맹세해 영토가 보앙된 자랑스러운 한 귀족
귀족끼리의 말다툼이라면 몰라도
국왕에게 반기를 드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있다는 사실을 네이마르는 깨달았다
부디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는 그녀였다
리처드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듯 입을 열었다
"너, 이 갈라이스트 왕국이 어떻게 건국됬는지 아냐?"
"…..예...예?"
그것은 네이마르가 생각하고 있던
몇 가지 대답 중 어느 것에도 들어맞지 않는 것이였다
입안에 머금고 있던 날숨이 자기도 모르게 이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가 겹쳐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네이마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연하죠, 아르티아 통일제국의 왕도
그것이 바로 이 갈라이스트 왕국의 성립의 시작이며
우리가 가장 위대한 제국의 후손이라는 증거입니다"
일찍이 시조 아르티아 치세의 인간이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던 시대
남쪽의 일리저드, 동쪽의 볼버트 왕조, 서쪽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통일제국의 판도였을 무렵부터 이 왕도는 세계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갈라이스트 왕국의 사람은
그 최대 판도를 지금도 꿈꾸곤 한다
스스로 위대한 제국의 후예라고 믿으며 말이다
그렇지, 라고 쉰 목소리로 리처드는 네이마르에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여느 때의 그의 것이 아니었다
독한 목소리가 아니라 고단한 인간의 목소리가 네이마르에게는 들렸다
하지만 다음에는, 언제나 더해진 중후한 색을 포함해 리처드는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 후예의 왕은
마인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꽁무니를 두고 도망쳤을까?"
목소리에서 연상되는 것은 어두컴컴한 빛깔
그리고 땅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강한 감정이였다
네이마르는 자신이 분개했던 것도 잊고 목덜미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결코 내색을 하지 않는
자신의 상관이 지금 분명히 감정을 드러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말투도 여느 때보다 어딘가 무서워 보였다
"…그것은 폐하의 안전과 국가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네이마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공기 자체가 팽팽해지면서 무게를 동반한 듯
네이마르의 어깨와 등을 짓눌러갔다
"국가를 위해서...?
잠꼬대는 잘 때만 하는 거다... 아니, 일단 그런건 제쳐두고"
리처드는 목을 가식적으로 울리며 말했다
그것은 누군가를 욕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학적인 의미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왕도가 함락된 국가에 미래가 있을 리 없겠지만
그것도 성벽에 결사항전 한 것도 아닌
그저 왕과 국군이란 것들은 북쪽으로 튀어버렸다
자, 생각해 네이마르... 왕도의 백성들은
다시는 아멜라이츠 왕에 대한 환호성을 지르지 않고 있다"
그래도 아직 아멜라이츠 왕이 직접 대병단을 지휘해
왕도를 마인으로부터 탈환했다면
만회는 얼마든지 가능할 터였다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피신하는 것보다도
그 쪽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원망의 소리는 뿌리 깊게 남아 있겠지만
그래도 승리와 영광의 빛 앞에 모든 것은 희박해지는 법이니까
승리란 영광이다
모든 부정과 불합리, 배신이 긍정되는 것이다
어느 것의 정의와 진실도 패배 앞에 무너지긴 마련인 것이다
한 번은 국토의 대부분을 잃어 치욕에 젖으면서도
시간이 지나 실지 회복을 이루어 후세에 이름을 남긴 왕도 있다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랐다
그런 만회가 가능하겠느냐고 리처드는 가슴을 저몄다
왕도를 침범한 마인은 영웅에게 베어 죽였고
백성들은 그의 손에 의해 해방되었다
그 배경이 어떻든 북쪽으로 도망친 노왕과
마인을 토벌한 젊은 영웅
왕도 백성들은 과연 어느 편을 들까
더 물을 것도 없다
리처드는 의자에 깊숙이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이 거기서 새어나오는 느낌이 있었다
자신이 내린 판단을 눈앞에 둔 부관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리처드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제자는 또 다른 녀석과는 달리 지독하게 솔직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설마 왕가에 반기를 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런 시기는 있었다고 리처드는 생각했다
국가를, 왕가를 위대한 존재로 신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정체가 흙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까지의 일이였다
리처드는 양피지 한 장을 더 꺼내 네이마르에게 건넸다
네이마르는 순간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제 검을 휘두르려던 기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져 있었다
이건, 하고 네이마르의 입이 움직였다
"이 나라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네가 그 시체를 보고도
여전히 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이걸로 해결하라"
발레리를 향해, 전말을 쓴 서면이였다
그것을 주면면 네이마르를 잘 써 줄 것이다
이미 자신은 키를 돌렸다
그 앞에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면 땅 밑바닥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리처드는 그런 무모한 여정에 네이마르를 끼워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나 혼자가 된다 해도
내기를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해야 한다
저것들 주위엔 편이 너무나도 적으니깐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잘못이었다고 한다면
동포 발레리 브리트니스...
그 주인, 로이메츠 폴이 언젠가 자신을 짓밟아 줄 것이다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은 많을수록 좋다
리처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뚝을 집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앞에서 네이마르는 양피지를 집어 들고 시선을 기울였다
양피지와 자기 상관의 얼굴을 몇 번 다시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대장님... 대체 목적이 뭔가요?
대체 무슨 일로 국왕께 반기를 드시겠다는 건가요?"
리처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
흰 머리카락이, 조금 그림자를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나의 주인이 될 인간은 적어도 나보단 위대해야 해
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