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5장 배덕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31화 - 죽어서도 -

개성공단 2021. 4. 13.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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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서도




목소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나르기 마련이다



"살레이니오 님이 비열한 마수와 강도의 습격을 당해 전사하셨다!"




그 절망적인 부고는 갈색 머리를 한 전령병에 의해
곧바로 살레이니오파 진지에 울려 퍼졌다
전령병의 높은 말은 수없이 진내에 울려퍼졌고
그 사실을 군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스며들게 했다

얼마간의 소동 뒤에야 문장교 진지는 그 사건을 집어삼켰다

사실상 총대장의 죽음

군인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충격과 탄식이고
그 다음은 낭패와 혼란이였다
누구나 다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자문했다
정말로, 지금 이렇게 창을 들고 있어도 좋은 것인지 모르게 되었다


군이란 매우 세련된 조직체계의 하나인 것이다
상위자가 하는 말은 무조건 따라야 하며
머릿속과 팔다리는 명확하게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였다
그래야 군은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럼 그 최상위 두뇌가 없어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이들 반란병들은 살레이니오에 의해 인도된 자들
그 이외의 푯말은 갖고 있지 않았다

병사들에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 하나 알 수가 없었다

살레이니오 님이 전사하셨다




반복되는 그 말을 천막 안에서 들으며
라르그도 안은 혼자 눈을 굴렸다
순간적으로 늦게 심장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눈 깜빡임이 빨라졌다

지금 귀가 파악한 것이 사실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부고를 전하는 것은 브루더의 목소리
성을 나서기 전에 미리 정해 놓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원로를 죽였을 때는 전사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결정했었으니 말이다

살레이니오의 죽음을 실감하는 순간 
갗을 관통하며 신경 자체가 싸늘해진 감촉이 안에게는 느껴졌다
굴린 주사위가 기대했던 대로의 싹을 틔워준 고양보다
그것을 어딘가 믿을 수 없는 의혹이 매우 짙었다

물론 이 결과를 바랐고 바라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안의 가슴에 그대로 맴돌았다
바보 같은 후회나 비탄이 아닌
너무 쉬웠다는 허무함도 아니였다
그런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기에서 승리의 싹을 틔운 것 같군요
사실 별로 좋아하는 결말은 아니지만..."




일리저드의 사신인
투사, 테르살랏 르와나는 의자에 앉은 채 긴 다리를 뻗었다
장신의 그녀가 하니 정말 보기 좋았다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느긋하게 한 말은
거짓말이나 비아냥거리는 투가 아니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눈치인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안은 문득 제정신을 차렸다
머릿속에 있던 혼란을 생각의 구석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럼, 어떤 것을 좋아하셨는지요, 테르살랏 님?
가장 최단으로 일을 끝내는 게, 최선 아닌가요?"




무심코 안은 그렇게 물었다
자신의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순전히 테르살랏이라는 사람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특히 일리저드의 투사라는 것이
어떤 사고 계통을 가지고 있는가는
향후 협상하는 데 있어서도 알아 두면 손해가 없을 것이다

테르살랏은 팔꿈치를 괴며 말했다
그녀가 미소짓는 듯한 모습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최단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닙니다. 라르그도 안
자신의 생명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자신의 진가를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설령 피를 흘린다 해도 전체가 강해진다면 그걸로 좋다
평상시에는 용사나 평범한 자나 다를 바 없지만
궁지에 몰리면 영웅 용자가 나오기 마련
그렇다면 궁지야말로 호감이 가는 방법인 것이라고

그래서 죽은 자는 힘도 운도 부족했을 뿐
태연하게 테르살랏은 그렇게 말했다

역시... 안은 테르살랏의 대답에 머쓱해하며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적어도 일리저드 사람들의 생각이
갈라이스트인들과는 전혀 상반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백성이 이렇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투사가 될 사람은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귀찮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로군...

안은 비로소 침착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짓누르며 생각을 돌렸다
설령 귀찮은 일이 옆에 뒹굴었다고 해도
지금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레이니오가 죽은 지금
더 이상 성녀와 영웅에 정면으로 맞서자는 기개는
중진들에게 없을 것이다

원래 그들 가까이에 있어봐서 알았지만 사실 중진들은 훨씬 이성적이었다
그들은 비근한 타산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안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을 죽일 리 없다고 안은 확신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원해서 자기 일에 참여할 것이다
그는 가까운 병사들에게 중진들 아래로 달려가게 했다
정신이 흔들리던 병사는 이상하게도 순순히 안을 따랐다

너도나도 지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였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잡아야 할 지푸라기를 찾고 있는 것이였다


안이 앞으로 내놓을 제안은 이들에게 지푸라기일 것이다
하긴 격류에 휩쓸려버리면 지푸라기 하나 잡아봐야
익사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텐데

설령 충동적인 병사가 자기를 찔러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성녀 마티아나 영웅전이 위협받는 사태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말이다



조용히 안은 입술을 찡그렸다
그것은 불안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상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였다
그녀의 가슴팍을 유쾌한 감정이 간질였다

만약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영웅님은 무엇을 생각할 것일까?
분명 좋지 않은 것을 껴안고, 아주 보기 좋은 얼굴을 해줄 것이다

영웅의 행적에 반발해 태어난 반란병
그 자에 의해 자신이 죽는다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잊지 못하겠지

필시 자신은 영웅의 인생에 상처가 될 것이 틀림없다
아, 그걸 생각하면... 그런 길도 약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은 어깨를 움츠리고 한숨을 내쉬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낯익은 얼굴이 꽤 멀게 느껴졌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이런 뜻인 것일까

버나드는 몸을 웅크리고 그 얼굴을 응시하며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처만 입었을 뿐, 겉모습은 상하지 않았다

영락없는 문장교 원로 살레이니오 님이시다
하지만, 그 몸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생명의 등불이 다 꺼진 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일이 끝나자 달려든 용병들이 갑자기 돌아선 이유를
이제야 버나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놈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살레이니오가 유일했던 것

군사들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뜨고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살레이니오의 유해 앞에서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니, 이제 그들은 군사가 아니었다
갈 곳 잃고 푯말조차 잃어버린...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들 무리였다

덜덜덜... 그런 딱딱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내 이가 떨리는 소리라는 것을 잠시 후에야 깨닫고 말았다




소리가 멎지 않잖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이가 두려움을 일으킨 듯 계속 울렸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자신이 이상해져 있음을 버나드는 자각했다
지금 나는 결코 제정신이 아니였다

자신을 지탱하고 이끌어 준 존재의 죽음
절대적이라고 느꼈던 존재의 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였다

버나드가 돌아보니 병사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의기소침하고 전의 등 어딘가로 부서져 조각이 되고 있었다

이대로는 진지로 돌아가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이제 무슨 일을 이룰 기개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안 된다, 그것은 살레이니오 님이 결코 원한게 아닐거야




버나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작게 내쉬었다
그리고 살레이니오의 몸을 정중하게 다루며 말했다




"병사들이여 모두 듣거라
전쟁터에서 살레이니오 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을 성사시키라고!"




조용히,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담아 버나드는 말했다
목소리는 우렁찼고, 표정은 매우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버나드는 목소리를 높였다
군사에게 말을 걸어, 그리고 길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버나드는 확신했다
주인의 죽음은 라르그도 안의 책략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 여자가 자애의 말을 하면서 칼을 휘두르게 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여기서 의지와 전의를 감정에 묻어 버리면
모든 것은 그 녀석의 의도대로 되버리겠지

그건 분명 주인이 원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생각하지 말고 무릎을 꿇으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으셨다



생각해자... 생각하자... 버나드는 자신을 타일렀다




적의 급소는 어디인가
진지로 돌아가 안을 급습하는 수법은 있었지만
버나드는 이를 선택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진지로 돌아간다고 해도 잘못하면
또 안이 무슨 수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버나드는 안에게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말이나 이치를 빼놓고는
안을 당해낼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버나드는 실감하고 있었다
정면에 서버리면 자신은 설득 당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문장교 사람들도 살레이니오의 종자에 불과했던
남자의 말보다 성녀의 오른팔 말을 더 잘 들을 것이다
안과 대면하면 더 이상 병사는 전의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적의 최악은 무엇인가
생각하라, 생각해야 한다



버나드는 물결치는 칼날을 앞세우며 말했다
병사들은 그저 그 칼날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살레이니오 님의 마지막 염원이다!
모두 도시 필로스로 진격하라!
살레이니오 님의 군사라는 긍지가 있다면... 나를 따르라!"




버나드의 말을 앞에 두고 전의와 제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잠시 눈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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