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5장 배덕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43화 - 달리는 병사들 -

개성공단 2021. 4. 14.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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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은빛 일색으로 물들인 가도에
드문드문 발자국을 내면서 문장교병들이 전진해 움직였다
눈이 내리는 상황은 처음 시기에 비하면 한결 나아졌지만
그래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걸음만 디디면 눈의 감촉이 신발을 통해 발바닥으로 퍼져나갔다
문장교 소년병 헤이스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힘들어도 이 행군은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앞을 보고 가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한숨이 하얗게 물들어 허공으로 올라갔다
시선 끝에 성벽 도시 갈루아말리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언제일까
조금만 더 지나면 보일려나


아무튼 자신들은 동방의 패자
볼버트 왕조의 정예들과 창을 겨루게 될 것이다
서로 이를 악물고 생명을 앗아가겠지

그런 상상을 하며 헤이스는 힘겹게 등줄기를 경련시켰다
그것은 추위에서 오는 떨림과는 또 달랐다




"왜 그래 소년병? 무서워 죽겠어?"




아무래도 그 모습은
헤이스의 옆을 걷는 병사에게 보인 것 같았다


나이가 지긋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는
창뿐 아니라 활과 검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그가 복수의 무기를 취급할 수 있을 만큼
숙련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적지 않은 전장을 딛고
그것들을 가질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저축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헤이스에게는 낯익은 고참병 중 한 명인 지즈라는 사람이였다




"아니요, 전 두렵지 않습니다, 저도 병사니까요"




그건 누가 봐도 허세였다
헤이스 자신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인이란 성가신 것으로
무섭다는 등의 말을 쉽게 사용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는 법이였다

그리고 용감하지 않다는 것은 병사들에게는 심한 모욕이었다

헤이스의 속마음을 살피며 지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참병이라는 인종에게는 희귀한 미소였다




"아냐, 사실 나도 무서워
놈들 숫자만 해도 삼만에서 그 이상이라 하잖아
우리는 아무리 말해도, 고작 2천 일거야"




엉겁결에 헤이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이 지즈 나름의 농담인 줄은 알았지만
그만한 숙련자가 무섭다고 그렇게 소리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헤이스에게도 더욱 실감이 났다
두려움은 발꿈치에서 시작되어, 이젠 턱까지 차올랐다
가능하면 여기서 뱉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지스의 말대로 볼버트군은 막강하다
수를 갖추기도 했지만 모두 정예였다
반면 이쪽은 지원병과 용병의 병합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더구나 문장교병 중에는
바로 얼마 전 살레이니오를 따라
루기스에게 창을 겨눈 자도 있었다고 들었다

헤이스는 왜 그런 무리가 함께 행군을 하는지 잘 몰랐다
집권자인 라르그도 안이 그렇게 말한다면 트집을 잡을 리 없겠지만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아무래도 들었다





"도시국가 놈들이 잘 제휴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너는 알고 있어? 사실 걔들은 사이가 별로 안 좋거든"


"알아요, 저도 도시국가 출신이니까요
좋은 놈들이라면, 고작 문화와 철공 뿐일까요?"




도시국가군
갈라이스트 왕국과 볼버트 왕조 사이에 존재하는
그 지역은 때로 양국의 완충지대로 침공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오랜 역사 속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문장교가 가진 성벽도시 갈루아말리아, 용병도시 벨페인
그 밖에도 문화도시 딘하임, 철공도시 포르타스, 신전도시 세톤 등
10개가 넘는 주요도시가 도시국가를 이루고
다른 소규모 도시나 촌락을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주요 도시 국가들은 연합을 이루면서도
항상 그 영향력을 서로 경쟁하며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적대감마저 든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연합으로 대국 열강과 대항해 왔으니
서로 전쟁을 걸 수는 없었다
때문에 겉으로는 사이좋게 지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한 번 맺힌 응어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계속 그을리기만 했다

시간을 두고 응어리는 불만이 되고
불만은 한이 되고, 원한은 적의가 되었다

도시국가군은 결코 독보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문장교에 의해 주요 도시국가가 와해되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볼버트 왕조의 침공에
얼마나 많은 도시국가가 손을 잡을까
독립심 강한 도시 국가 등은 이제 연합은 붕괴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도시 방어만 신경쓰며,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고 해도
강제로 연합을 하게 할 존재가 그들에겐 없었다



서민 출신인 헤이스도 도시국가 출신이였다
그래서 더욱 두려움과 불안이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볼버트 왕조에 휩쓸리는 데 그치는 게 아닐까




"뭐, 죽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근데 소년병, 넌 왜 지원한 거야?"





지즈는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중얼거렸다
고참병이라는 자는 그런 면이 있는 것을 헤이스는 알고 있었다
여러 명의 죽음을 지켜온 이들에게 생사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소년병이 아니라... 헤이스에요
돈도 필요했지만, 게다가..."




그리고 뭐지?
헤이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앞을 보았다
시야에 초록색 군복이 보였다
그것이 누구인지 등 이 군에 있어서는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맞아, 그 영웅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왕 죽을 바에야 이야기 속에서 헤이스는 죽고 싶었다

그것은 소년다운 강인함과 영웅이야기에 대한 동경
그리고 소년답지 않게, 자신의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일 것이다


헤이스의 부모는 일찍 병으로 사망했다
영웅을 기다리다 죽었다
친구들도 대부분 굶어 죽거나 전쟁터에서 허망하게 죽어갔다
좋아했던 여자애는 유행병이였을까

헤이스는 분명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생각해 버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영웅 곁에서 죽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참에, 느닷없이 헤이스의 등이 강하게 얻어맞았다
그 기세에 저도 모르게 헤이스는 발을 비틀거리며 몇 걸음 땅을 밟았다
지즈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호방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남자가 왜 이렇게 소박해?
남자라면... 적들이여 너희 적장을 죽이러 왔다!
그리고 너무 죽는다느니 그런거에 신경쓰지마
너는 아직 한창이잖아, 그렇다면 어떻게든 사는거야!"




지즈 정도 나이라면, 군대에선 병으로는 있기 힘든 것이였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이 남자는 살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묻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헤이스는 아픈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헤이즈 씨는 왜 지원하셨죠?
그렇게 살고 싶으시면, 가만히 있으시지 그랬어요"




지즈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는 듯이 말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이지"




헤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즈가 다시 웃었다
시야 끝에는 비로소 성벽 도시 갈루아말리아가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





볼버트 왕조 서정군



그 위용은 다른 나라 군과는 규격이 달랐다
갈라이스트 왕국 같은 장비까지 통일된 군대다움이란 없었다

마법장갑병의 존재감과 마력량은 공기를 변질시키는 듯 했고
마법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일반 마법병의 모습은
군대가 어딘가 엇나가보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다양성이야말로 볼버트 군이 가진 큰 특징이였다

그러나 오늘날 볼버트군 자체는 여느 때와 양상이 달랐다

긴장과 혐오, 증오
그러한 억압된 감정이
장군, 부대 지휘관, 병사들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공유되고 있었다
남아도는 감정이 대지조차 진동시킬 것 같았다




오직 한 여자가 그 모든 감정을 독점하고 있었다
여자는 이 군을 이끄는 최고 지휘자 마도장군 마스티기오스 곁에 있었다




"마도장군, 속도가 부족합니다
더 빨리 군사를 달려가게 하세요, 즉시 신속하게!"




마스티기오스는 검은 눈에 혐오를 역력히 띄우며 말했다
그는 그 감정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듯했다
덩치 큰 체구에서 마력이 살짝 뿜어져 나왔다




"......무리입니다. 이미 병사 중에 낙오자도 나오고 있고
더 이상 했다간, 우리의 전력이 줄어들 것입니다"


"마도 장군"




여자는 무기질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수정처럼 미려한 호박색을 가졌지만 생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쪽인가 하면 인형이라고 하는 편이 그럴듯 할 것이다

여자는 비단결 같은 머리를 튀기며 말했다




"제가 언제 당신에게 의견을 구했었나요? 즉각 대답을"




으드득, 하고 이가 물리는 소리가 났다
마법의 뇌화가 뿜어져 나오고, 마스티기오스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주위의 부관들이 주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스티기오스은 어떻게 몸부림치도 신중한 사람이였다
지금 자기 한 사람이 감정에 휘둘릴 만한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지금 볼버트 왕조의 목에 송곳니를 박고 있는
대마 브릴리간트의 휘하라면 말이다



"행군속도를 높여라"




브릴리간트 휘하, 마인 라브르는 그 목소리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다른 감정도 없이 마스티기오스에게 말했다




"좋아요, 마도장군
우리들은 인간 따위 걱정하지 않아요
그 점 참고하시고, 진행하시길 바래요"




다시, 마력이 주위에 튕겨나갔다
그것은 남자가 남아돌 만큼의 마법재주를 가진 증거이며
동시에 불타버릴 만큼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마도장군, 마스티기오스 라 볼고그라드는
검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예, 그 말 꼭 기억하죠"




말은 맹수의 신음 소리 같았다
마인 라브르는 무엇 하나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그저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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