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6장 동방 원정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11화 - 비록 과거가 있더라도 -

개성공단 2021. 5. 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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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발이 허공을 가르는 발톱이 되어 넘실거렸다
검붉은색 대검은 은의 뜻에 따라 선을 그렸다
그 호들갑스러운 몸짓에는 파괴가 담겨 있었다

정령은 주는 자요, 용이 빼앗는 자라면, 거인은 파괴하는 자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진가를 발휘할 때
이 세상에 파괴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마각과 검이 맞물릴 때마다
라브르가 한 발짝을 떼지 않으면
그대로 마각이 부러져 버릴 것이였다
서서히나마 라브르는 후퇴하기 시작했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은은 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카리아 버드닉은 이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톱니바퀴 라브르를 파괴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루기스를 마인화시켜 동포인 피에르트 라 볼고그라드를 끌고 가게한 장본인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마인이였다
즉 인류종의 적이며, 단지 그것만으로 죽이는 이유가 되었다

칼날을 서로 튕겨 사이가 벌어진 순간
카리아는 왼손을 칼자루 끝에 놓고 오른손을 가볍게 댔다
그러고는 칼날을 수평으로 하면서 칼끝을 
라브르를 향해 얼굴 바로 옆에서 겨누었다

적을 단숨에 찔러 죽이기 위한 세련된 자세였지만
너무 큰 검 때문에 뭔가 이상한 모습을 느끼게 했다



라브르도 응해 마각을 드높이 치켜들었다
카리아의 머리끝에서 발끝에 이르기까지를 양단할 수 있는 자세였다

서로 거리가 매우 가까웠고
앞으로 한 발만 더 들어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카리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낌새로 미루어 볼 때 루기스와 아가토스는
브릴리간트와 대면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만은 안된다
라브르는 시간을 버는데 특화된 마인이였지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시간을 벌어서는 안되었다
하루빨리 카리아를 쓰러뜨리고 나머지 놈들을 붙들어야 하니까
라브르는 팔을 복구하며 칼날을 번쩍였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단숨의 호흡조차도, 생명이 없어질 수 있다고, 서로가 자각하고 있을 정도

공기가 긴장과 압력에 짓눌리려 하는 가운데 움직인 것은 카리아였다



그녀는 은발을 펄럭이며 오른 다리를 잡고 힘차게 대지를 밟았다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아깝기는 카리아도 마찬가지 였다

수평으로 치켜올린 검이 황소의 뿔처럼 튀어나왔다
날카로워진 그 검은 라브르에게서는
단 한 점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처럼 보였다

거인의 파괴 본능에 연마된 인류의 무기
본래 맞지 않는 두 가지를 카리아는 내포하고 있었다
분명 마성에게는 엄청난 위협일 것이다

라브르는 그래서 그녀를 여기서 살해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바람을 관통하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색 빛 일격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틀림없이 라브르의 머리를 관통하고
그녀의 육신은 절명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였다
크게 치켜든 마각으로는 찌르는 속도에 맞출 수도 없었다

하지만 라브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운명을 알고 있었고
늘 운명은 라부르의 편이였으니까





"원전해제, 기계장치의 운명"





우지끈하고 묵직하게 톱니바퀴가 울렸다
운명은 뒤틀리며 바로 잡힐 것이다
모든 것은 눈꺼풀을 감은 순간 끝날 것이고
그리고 다시 뜨는 순간 세상이 달라져 있겠지

쾅, 하고 공기가 내동댕이치는 소리가 라브르에게는 느껴졌다.
머리로 꽂힐 뻔했던 검의 칼끝이
겨우 그녀의 귀를 찢을 만한 결말로 끝난 것이였다

카리아의 있을 수 없다는 경악이 라브르에게는 감지됐다
그러나 그 경악을 삼킬 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죄에는 벌을, 벌은 즉각적인 배제, 지금 시행하겠습니다"




단두대의 기요틴처럼 틈에 끼어든 카리아를 향해 라부르의 마각이 내려졌다

쇠가 허공을 후려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카리아를 똑바로 양단하기 위한 일격이였다

카리아는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머리와 칼날 사이로 들이댔다
모든 것이 본능에 응한 순간이었고, 그것은 카리아를 구해내는데 성공했다

우지끈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카리아에게 들렸다
오른팔이 반 정도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진 것이였다
게다가 머리도 무사하지 못한 듯 했다
선명한 은색 머리카락에 피가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오른팔을 내밀기는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힘껏 궤도를 어긋나게 한 것 정도
치명상을 중상으로 변모시켰을 뿐.
통 사람이라면 벌써 죽어 있을 것이다

서로 밀착되어 얽힌 상황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몸을 맞대고 카리아는 중얼거렸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벌인지는 모르지만
자네는 처형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





처형자라는 것은 반드시 한 번으로 처형을 끝내야 한다
죄인은 언제나 그 목덜미를 노리고 있으니까

밀착된 상태에서 카리아는 이를 악물며, 검으로 라부르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육신이 아닌 질긴 감촉이 왔지만 알 바 아니였다
그녀는 입안에 번지는 씁쓸함에
오열을 흘리면서도 카리아는 그걸 먹었다

그 사생결단의 승리에 대한 집념은 
라브르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단지 자기에 대한 몰염치함의 분노 때문이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갈라이스트 왕도 아르셰에선 통제자 드래그만을 상대로 추태를 부렸다
루기스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식인데, 과연 내가 루기스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그런 자책감이 밤마다 카리아의 자존심을 갉아먹었다
루기스는 이제 충분히 강자다, 영웅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 걸맞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령 아무리 볼썽사납다 해도 말이다

적의 목덜미에 검을 물린 채, 카리아는 무사한 왼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오른팔을 내던지고, 허리를 회전시켰다
그녀는 팔을 마치 무기로 취급하듯이, 주먹을 쥐고 라브르에게 날렸다

주먹은 순간 궤도가 흔들렸지만, 라브르의 뺨에 도달하긴 했다

그러나 라브르 역시 가만히 맞고만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리아와 같이 팔을 들어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한순간의 충격, 골격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몸이 멀어졌고, 양자가 다시 무기를 잡는 형세가 되었다
카리아는 왼팔 하나로 검을 번쩍 치켜올렸고
라브르는 마각으로 찌르기를 위한 자세를 취했다

쏟아질 듯한 전의를 두 사람의 호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의 현상은 무엇이었을까, 카리아는 생각했다
결사의 일격이 웬일인지 적을 뚫기 직전에 사라져버렸다

분명 라브르의 이마를 꿰뚫었을 텐데
그것이 어긋나 버렸던 것이다

생각될 수 있는 곳은 아마 원전밖에 없을 것이
라브르가 무엇인가의 권능을 이용했다고 카리아는 판단했다

향해 오는 물체의 궤도를 어긋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광범위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저 녀석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럿이 있을거야

카리아는 왼손으로 강하게 검을 쥐면서
두 다리를 벌리게 하고 땅을 힘껏 짓밟았다

자세를 맞추는 가운데, 라브르가 대뜸 입을 열었다
회색의 체내를 노출시키면서 호박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즉각 이해를"



시간벌기일까?
그렇다고 시간이 아깝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카리아는 한숨을 돌리며 한 걸음을 다가섰다





"예를 들어 당신이 기억을 잃고 있고
그 사이에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렸다면 말입니다
즉각 이해와 응답을"





한순간의 동요를 노리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정말 카리아에게 그 말을 듣고 싶어 묻는 눈치였다

솔직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리아는 몰랐다
그래서 그녀에게 답이란 하나밖에 없었다

구뇨눈 혀로 얼굴에 달라붙은 피를 핥고 나서 입술을 열었다





"글쎄...? 모르겠어, 괴로워할지도 모르고 절망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멈출 수는 없을 거야, 그것만은 장담하지"




난 어리석은 여자니까, 그 마지막 한마디는 하지 않았다.

카리아는 왼팔만으로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고
팔을 구부리고 허리를 비틀게 했다
원래는 브릴리간트에 항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여기서 패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 시조의 이름으로, 원전해제 '거인신화'"






라브르의 눈앞에서 고대의 거인이
큰 소리를 내며 큰 망치를 치켜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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