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51화 - 영웅론 -
메드라우트 보루에서 오류평야까지의 거리는 꼬박 이틀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을 움직였을 경우이고
말을 전력으로 달리게 하면 반나절 정도의 거리였다
그 사이에 약간의 지형은 있어도, 큰 산맥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보루 근교의 언덕에서 이미 보이고 있었다
요새 거수 제브렐리스가 활보하는 모습
흔들흔들 살짝 꿈틀거려 보이는 그것
성채보다 훨씬 거대한 건축물이 지금
확실히 살아있다는 사실에 제정신을 의심하게 될 것 같았다
남보다는 특이한 경험을 쌓아온 자부심 있는
리처드조차 그 광경에는 쓴웃음이 나왔다
내 제자가 하필이면 그걸 죽이러 갔다고 하니 더욱 우스웠다
도저히, 사람이 생각할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면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라는 것도 사실
제브릴리스를 죽이지 못하는 이상 새 왕국은 와해될 것이다
생각건대 루기스라는
인간은 언제나 파멸과 이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한 발짝 잘못하면 한 발짝도 모자라면
한 발짝도 더디면 분명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뛰어넘는 재치가 있어
영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리처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재치로 일을 그럭저럭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였다
제자의 성질을 리처드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루기스는 결코 칼을 휘두르는 재주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가르쳤는지... 원
완성되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그저 기본을 가르쳤다고나 해야 하나?
일류는 물론이고, 이류에게조차 손가락이 닿을지 모르는 인간
그것이 리처드에게 본 루기스의의 모습이였다
"그것이 지금은 네 목숨을 쥐고 있다니
운명이란 참으로 재밌군,이봐"
리처드는 말을 쉬게 하고
홀로 언덕에 걸터앉은 채 돌아보았다
왼팔에 남은 와인병이 휘청 흔들렸다
"장난하는 거지?
너 같은 악당이 운명 운운하다니"
뒤돌아본 끝에 그녀는 있었다
그녀는 말고삐를 당겨 리처드에게 맞추듯 발걸이에서 뛰어내렸다
뜻하지 않은 밀회이면서도
발레리 브리트니스는 별로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발레리는 마법 갑옷을 빛내며 담담하게 말을 흘렸다
"도레는 나의 심복이야
반신이라고 해도 될 지경이지
그녀가 없었다면, 난 장군직을 수행하고 있지 않았을 거야
그녀가 말해서, 왔어, 사실은 올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가"
당돌한 발레리의 독백에 시원시원하게 리처드는 대답했다
그녀를 이곳에 불러낸 사람이 누구이고
이 밀회를 마련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였다
아무튼 그녀의 발레리에 대한 충성은 흠 하나 없는 진짜였다
발레리의 명예가 흔들리는 짓을 그녀는 결코 할 수 없었다
비록 발레리의 뜻을 어긴다 해도 도레는
발레리의 명예를 위해 움직였다
"당신 때문에 화가 좀 나는 군
당신이 나를 배반한 것, 내가 너의 반쪽을 감쪽같이 속인 것
설마 세 번째까지 버티라는 것은 아니겠지?"
감정은 엷었지만 예민한 목소리였다
칼끝으로 상대의 살갗을 가르는 인상마저 있었다
"바보같이 굴지 마, 속인 건 내가 아냐
그녀의 약점이였던 거야, 자신이 믿는 것을 배반할 수 없는...
조만간 그 녀석은 너에게 같은 말을 했을 거야
난 그녀석을 그저 잘 유도해 냈을 뿐이지"
"여전히 발뺌을 잘하는군, 당신은..."
그렇게 말하며 발레리는 리처드 옆에 걸터앉았다
건네받을 와인병을 받아들면서
할 얘기가 있었구나 하고 말을 꺼냈다
말이 없을 리 없다
전역에 있어서의 수세와 공세의 장군끼리
교섭도 타산도 꾀도 얼마든지 있을 법하니까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이
항복에 관한 것이 아님은 발레리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장소에는 호출하지 않는 법일텐데...
"제브릴리스 놈 말이야, 발레리 너..."
"싫다, 거절한다"
그래서 발레리는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일시적 휴전이든, 화목이든 뭐든
항복 이외의 말을 들을 생각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게다가 도레 이상으로 발레리는 리처드를 알고 있었다
좋을대로 말하게 해서 좋은 상대는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너에게 진심으로 실망하고 있다
협상을 하자는 것은 결국 그 대악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일 테니까"
맞는 말이다
만약 발레리 편을 들려면 서둘러
메드라우트 성채를 인도한 뒤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아직 성채를 굳게 닫은 채 밀회 등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리처드는 발레리에 붙을 생각이 없었다
발레리에게는 참기 힘들었다
어째서 전우가 자신을 배신하는가 하는 생각만이 있을 뿐
"왜 그렇게도 그 남자를 편들어 주는 거지?
마인을 죽이고, 대마를 죽였다고 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이 붙을 정도의 남자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아
한 번 만난 적이 있지만,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
발레리는 노골적인 감정을 내뱉었다
대악 루기스는 증오해야 할 적이나 다름없다
조국의 적이었고 리처드에게도 상처를 줬다
왜 그런 남자를 편드는지 진정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기 손을 뿌리치고 말이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져 가는 발레리였다
"솔직히 말해, 이 발레리보다 그 남자가 편들기에 적합하단 건가!?
나도 그걸 들어야만 이야기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뿌리칠 듯하면서도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
벌떡 일어서며 외치는 발레리에 저도 모르게 리처드는 당황했다
발레리의 예리한 눈동자가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처드도, 그녀의 말에 생각하는 바가 없는가 하면 거짓말이였다
왕도 함락 당초
만약 발레리 혹은 주인 로이메츠 폴이 선왕을 베어버리고
스스로 왕이라고 자칭했다면 리처드는 그 편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기스와 대적할 미래도 얼마든지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발레리"
미간을 찌푸리면서 리처드는 일어서서 시선을 맞췄다
적어도 이 문답을 매듭짓지 않는 한
발레리는 뒤로 물러설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성질의 인간이였다, 그래서 리처드도 말했다
"너 영웅이란거 믿었냐?"
"무슨 소리냐, 말 돌리지 마라"
"들어봐, 난 믿었어.
아이였을 때 부터 계속 말야"
뜻밖의 리처드의 말에 이번에 당황한 것은 발레리였다.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강한 감정이 갈 곳을 잃고
그녀의 표정을 흐리게 했다
"내 고향은 갈라이스트 중에서도 가난한 마을이야
그래도 나름 잘 살았지, 고기를 먹는 것은 1년에 몇 번 뿐이였지만
소위 말하는 사소한 행복 정도는 있었어
아버지는 존경할 만한 어부였고, 어머니도 일 잘하는 사람이였어
단지 마수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어서
형도 있어 가업을 이을 필요도 없고 말이야
나는 아버지를 도와드리려고 모험자가 된 거였어"
가난한 마을에 마수토벌을 위한 모험자를 고용할 돈은 없다.
험자가 되면 생활비를 줄일 수 있고, 잘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모험자 동료가 생기면, 싼값에 일을 받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리처드는 재치가 있었다.
검술이 타고났었고, 몸놀림 하나에도 비길 만한 사람은 없었다
마수나 마족, 동업자와 기사조차도 그의 칼에 미치지 못했다
대형 마수를 잡으면 너도나도 음유시인들이
그의 노래를 지어 그 몸을 찬양했다
"걸작이였지, 난 말야, 내가 영웅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만한 힘도 재주고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
"됐겠지, 너는..."
용사로서 발레리는 그 말을 무심코 삼켰다
리처드의 눈동자가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였다
무엇 하나 바라보지 않으려는 까만색
"전혀 발레리, 지금부터 가르쳐주지
영웅 따위를 목표로 동분서주한 바보 녀석의 고향은
그가 고향을 떠난지, 1년만에 멸망해 버렸어
내가 내 재능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에 말이야
내가 고향으로부터 편지를 오지 않은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반년이나 지나서였어
마을은 이미 마수들의 거처가 되어 있었지
아버지도, 엄마도, 형도, 여동생도 남은 게 없었어"
한 걸음 리처드가 앞으로 나섯다
발레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압박된 것은 아니였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말을 걸면 좋은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발레리에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리처드가 이런 얘기를 새삼스럽게 한 뜻도 못 알아듣겠다
과거에는 모험자로서 미궁에 빠져 있을 때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곤혹스러워하는 발레리를 뒤로 한 채 리처드는 말을 이었다
"발레리, 너와 루기스와 재치를 겨룬다면
확실히 네가 위일지도 모르지
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 루기스에겐 그런게 없어
저 녀석은 아마 어디쯤 끝에서, 바짝 엎드려야 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리처드는 왼팔을 칼집에 갖다대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이류든 삼류든 뭘 이룩한 놈만이 영웅이야!
아무것도 못 이룬 내가 영웅이 아닌 것과 같지!"
리처드에게는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불평도 불만도 불우도 불행도 다 있는 것이 당연하다
왕과 귀족들조차 자신의 삶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주도 신분도 없는 사람이
불우한 바람을 맞는 것은 당연하다
굴욕을 당하는 일도 모멸당하는 일도
전혀 불행하지 않은 일상일 뿐
대다수에게 삶이란 그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타협하고 받아들이면서 살 수 없게 된다면
설령 무모하든 한 발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체념을 답파하고 스스로의 보답을 받지 못하는 인생에
복수를 이뤄내야 하겠지
터무니없고, 무모하고
결코 도저히 답파할 수 없는 그 길
그러나 만일 그것을 해낸 자가 있다면
"나는 그 녀석을 영웅이라고 부르며, 모든 걸 걸었다
나는 그런 인간을 오직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지
그 녀석을 모욕하는 건, 너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어"
그것만을 말하고 나서
리처드는 검은 검을 칼집에서 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