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7장 성전 시대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58화 - 약자 생존 -

개성공단 2021. 5. 12.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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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거수 제브렐리스를 계기로 한 전쟁터는
대략 세 갈래로 나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제브릴리스에 맞서는 영웅들
마녀 바로누스에게 손가락을 뻗치는 희대의 마법사

그리고 용사와 마인 질루이의 정신세계에서의 공방

검은 검이 울렸다
용사는 천둥소리처럼 소리를 내며
숨조차 쉴 새 없이 마인의 목을 베었다




"아무 소용... 어?"




지저귀던 질루이의 턱이 튀었고
다음 말을 내뱉으려 하기 전에 그녀의 머리가 양단되었다

사지가 튀고 목이 날아가며 
두 눈은 더 이상 셀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졌다

그런 비참하기 짝이 없는 참격의 폭풍을 맞아도
질루이는 죽지 않았다
이곳은 그녀의 이상적인 정신세계
여기서라면 그녀는 원하는 대로 전능했다

그래, 전능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질루이는 리처드의 일격을 막지 못했고
아픔을 떨쳐버릴 수조차 없었다

조금 전부터 죽음을 기억할 만큼
격렬한 아픔과 뜨거움이 질루이를 뒤덮고 있었다

질루이는 굉장하면서도 느끼는 동시에
눈동자를 부릅뜨자, 바로 그 눈이 다시 잘려나갔다



질루이의 전능은 그녀의 인식이 늦으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무엇이든 하려면, 일단 인식을 해야 했다

하지만 리차드의 일격은
질루이의 인식은 고사하고 상상조차 초월하고 있었다

정신세계에 사로잡힌 그의 영혼은
그 뜻에 따르도록 최적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보다 빠르게, 보다 강하게
인류 최강의 경지에 있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말이다




"나도 기분이 좋지는 않군, 빨리 끝내주면 고맙겠어"





말을 함부로 하는 사이에도 연격은 멎지 않았다
질루이는 토막토막 끊어질 듯한 육체로 영혼뿐인 그를 보았다

거기에 늙은 육체는 없었다
체구는 젊고, 눈동자는 사나운 짐승 이상으로 빛나고
발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죽여버릴 만한 기백만이 있었다

용사 리처드 퍼밀리스의 절정기가 거기에 있었다

영혼은 의지의 노예이고 의지는 육체와 함께 걷는 것이다
육체가 늙으면 영혼 또한 늙어 빠진다

하지만, 이것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이상세계

리처드라는 남자의 영혼은 이제서야 
자신의 본래 형태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빛나는 강자의 모습을 말이다

질루이는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너무너무 얄미워
마인이 된 자신조차도 손가락 하나 닿지 않는 군
본래는 영혼의 모습을 비틀어 엎어주려고 했는데, 보복당하는 꼴이라니

그녀는 내뱉듯이 말했다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항상 부동한 존재니까요
살해된 정도로 흔들리는 것은 신앙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 맘대로 지껄이는 신이 그렇게도 좋으냐?
난 대성교의 가르침 자체는 좋아하지 않아
인간은 언제나 자유 하에 있어야 하니까"


"그건 강자의 헛소리에요, 리처드"





피를 흘리고 온몸을 치명상에 젖게 하면서도
질루이는 눈동자를 치켜들었다

미칠 듯한 통증이 목소리를 약간 떨구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자유? 얽매이는 것도 지배되는 것도 필요 없다고?
하하하! 하하하! 헛소리에요, 헛소리!"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듯 질루이는 비웃었다
죽지 않는 이 마인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찍이 마성의 왕들이었던 마인보다는 물론
수호자 중에서도 최약체
평범하게 싸워 버리면, 늙은 용자조차 당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이 정신세계라면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자신 앞의 용사는 더더욱 자신을 뛰어넘고 있었다

마인이 되기 전부터 질루이라는 여자는 그랬다

싸울 힘은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의지도 없다
정성이 있다면 신앙쯤이야

두 손을 포개어 신에게 빌고
제발 구원을 비는 것 밖에 그녀는 할 수 없었다

비록 수없이 유린당하고
현실에 구박당하고
기도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지 알면서도 말이다

질루이의 영혼 형태는
그저 연약한 마을 처녀의 모습으로 말했다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선택할 자유?
약자에게 그런 자유란 없습니다!
학대받고 폭력으로 빼앗길만한 인간은
언제나 억압받고 계속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기만 할 삶이에요!

그렇다면 지배당하는 자를 광포한 억압자가 아닌
신을 선택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까!
당신이 말하는 자유는 강자를 위한 자유일 뿐입니다!"




강자는 얼마든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자기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수도 있기에, 그래서 자유를 외친다

그럼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잘것없다고 얕잡아보고
폭력에 빼앗겨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루이에게 주위의 모든 것은 강자이고 적이였다

고아이면서 아름답게 태어나 버린
질루이는 폭력과 착취의 대상이었다

주위의 보통 아이들은 질루이를 동료로 간주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강약에 눈치가 빠른 것도 없었으니까



도도함, 찬란함 같은 것은 자신에게 없었다
인간은 폭력과 진흙의 상징으로 질루이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은 없고 빼앗기만 행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자유로워지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뿐이었다
자신이라는 껍질만이, 유일한 구원이였다




"약한 사람은 언제나 부자유인 채입니다.
돌아볼 것도 없고, 존경받을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단 말이죠"





순간 리처드는 당황했고
그의 시야에 투사된 모습에, 표정을 찡그렸다
젊고 씩씩한 얼굴이 눈앞에 있는 동네 처녀의 참상을 목격했기 때문이였다

글로는 다할 수 없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 배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했다
구역질이 난다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을 정도였다

그래도 리처드의 칼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공간을 가르고 그 마을 처녀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감상에 빠질 수 없다
그녀가 어떤 배경을 걸었든 지금은 인류의 적인 마인일 뿐이다

동정도 후회도 공감도, 모든게 끝난 후에 깨물면 될 것이다






"아, 역시…"




리처드의 빛을 동반한 일격
그것이 자신의 몸에 닿기 전 질루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약한 인간이라 버린 것이였군요"





질루이는 그저 동네 처녀의 모습으로 리처드를 보았다

그야말로 리처드가 고향으로 삼았던
촌락에서조차 그녀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이상한 모습.
아니, 정말로 그녀는 실재한 것은 아닐까

리처드는 자기도 모르게 입김을 내뿜었다
정말로 눈깜짝할 새의 순간이였다

그래도 리처드는 칼끝을 찌그러뜨리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눈앞의 마성을 죽일 만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내부까지 모두 갖춘 것은 아니었다
용자란 인류의 사랑을 받고 인류를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였다

마인은 흔들릴 정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웃었다






"아, 이제야 처음으로 진심으로 동요해 주었내요
리처드 퍼밀리스, 원전해제, 영혼의 맹주"





 ◇◆◇◆






세계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켜든 리처드의 검은 검은
현실의 질루이 하노의 체구를 꿰뚫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질루이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은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였다
다만 리처드와 질루이의 영혼이 세계를 떠났을 뿐

이대로 칼날이 내리쳐진다면
현실 세계의 질루이는 베어져 버릴 것이다



왼쪽 어깨로부터 곧바로 심장까지도 양단되어
인간이라면 확실히 절명하는 일격
곁의 발레리조차 죽음을 확신하는 처참함
본래 보통 인간에게는 상처받지 않을 마인의 체구는
간단하게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러나 쉽게 끝나지 않기 때문에 마인인 셈이다

리처드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두 동강 난 시체가 두 팔을 뻗고 있었고
리처드에게 피할 길은 없었으니까

이제 그것은 인간의 모습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 앞의 노골적인 마성이 속삭였다




"이제 당신의 영혼은 저의 것이자, 신의 것입니다!"





꿈틀거리는 육신이 리처드의 목 쪽으로 손을 돌렸다
발레리가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고깃덩어리의 팔을
화살 한 대가 관통했다

화살의 기세에 고깃덩어리는 튕겨져 나갔다
더 이상 그녀에게 일어날 기운도, 의미도 없었다

질루이 하노라는 육체는 그렇게 틀림없이 끝나고 말았다

리처드는 눈을 부릅뜨고 그 화살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리처드 주위에서 이렇게 고지식하게 화살을 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그 바보 제자"




검은 검을 베어 피를 주위에 흩부렸다
주위에 기색을 살피면, 질루이르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는지
그녀의 호위는 간단하게 물러나버린 것 같았다

마치 제 목적을 다했다는 듯이 말이다

리처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이상한 놈이였지만, 시원시원하게 끝났군"




발레리의 의아스러운 말에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발레리, 한 가지 부탁이 있어"


"군에 관한 일이라면 쉽사리 듣지 못하겠군
아무리 당신이 하는 말일지라도 말이야"


"그런 거 아니야."





리처드는 숨을 한번 내쉬고, 말했다







"추태를 부린 것 같군, 당한 것 같아
나를 죽여 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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