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7장 성전 시대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67화 - 하늘의 비겁자 -

개성공단 2021. 5. 15. 02:51
반응형





썩은 담쟁이 덩굴이 얽히고
이끼 낀 거대한 건축물의 줄지어 있었다
그 구조는 인간의 집보다 엘프의 것에 더 가까울 정도
이제 그 개체 하나가 하나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요새 거수 제브렐리스.
최북단 스지프 보루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영웅용사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온 괴물, 대재앙의 막을 연 것

너무나 멀고 막강했던 존재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




"……굉장해"



생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요새 거수를 가까이 두고 엘디스가 중얼거렸다

의식하지 않아도 누구나 같은 반응을 할 것이다
올려다볼 만큼의 거대함은 어떤 식이든 감탄이 나올 지경이였다

하지만 이것을 지금부터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나오는 것은 괴로운 한숨 밖에 없었다




"엘디스, 미안하지만 여기가 한계야
말이 더 이상 가까지 가지 못할거야
뒤는 너에게 달려 있어, 정말 할 수 있겠지?"




베르나그라드 등 호위를 앞세워
간신히 마수떼를 빠져나와 나와 엘디스는 대마 제브렐리스에 접촉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정말로 거상과 개미의 싸움
개미가 겉피부를 씹는 것만으로는
거상은 아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물어뜯는다면 심장을 물어야 겠지

결국 나와 엘디스가 가야 할 곳은 이보다 더 오지였다




"물론이지, 기사의 정성은 주인을 믿는 것이 아니야?"

"……알겠어, 믿겠습니다, 여왕 폐하!"


"좋아, 자네로부터의 부탁이니까, 성대하게 해주지"




엘디스의 미소까지 머금은 목소리에 거짓은 없었다
그렇다기보다, 그녀가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그녀의 작은 입술이 영창을 외웠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인데도 번개 같은 충격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축복과 저주가 땅 위를 준동했다

순간 온몸을 치던 진동이 사라졌다
내가 타고 있던 말이 땅바닥을 치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말은,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날개가 난 것은 아니였다
그저 엘디스가 정령술을 이용해서 말째로 우리를 올렸을 뿐이였다
순간적으로 말은 울고 시야는 명멸했다
모래 먼지와 사설이 눈을 가렸다

하긴 나도 하늘을 난다는 것에 동경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좀 더 잔잔한 비행이 좋았다
아니 이건 나는게 아니라 뛰고 있을 뿐인데

엘디스도 필사적인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단지 튕기는 것 뿐이라면 몰라도
제브렐리스를 구성하는 건조물의 하나에
무사히 착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였다

이 지경에 이르러 최후가 착지에 실패해
압사한다면, 우스갯소리도 못 될 것이다




"루기스... 혀를 깨물지 마"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이를 물었다
엘디스의 가냘픈 몸매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다음으로 느낀 것은 급격한 낙하
주위를 맴돌던 공기가 순식간에 중력을 되찾았다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으면서도 숨을 삼켜,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기대에서 빗나가 상당히 느긋한 걸음으로
말은 무사히 건조물의 한 구석에 착지했다.

솔직히 말 다리는 망가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태연한 듯 발굽으로 땅을 치고 있었다
엘디스의 정령술 및 저주는 단순한 마법 같은 거라 생각했는데
이러한 섬세한 작업도 가능하게 하는 것 같았다




"군대 정도의 규모를 보낼 수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무리네, 너랑 말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는 줄 알았어
드래그만 흉내를 내고 싶었는데, 잘은 안 됬네"


"나중에는 미리 말해줘
혹시 위험하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할 테니까"


"싫어"



그녀는 말에서 내리자
아름다운 푸른 눈을 빛내며 입술을 짓궂게 일그러뜨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때의 그녀가
대개 변변치 않은 말을 하는 것을 적당히 나도 눈치채고 있었다




"너는 너대로 얼마든지 무리를 하면서
누가 무리를 하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말리려 하잖아
아직도 자기 혼자 무리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제브렐리스 안
썩어빠진 유적 일부에 발을 걸으며 엘디스가 말했다
나를 내치는 것 같으면서도 붙잡으려는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말에서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 혼자 뛰어다녀서 뭐든 이루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있잖아?"





엘디스가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심의 하나이긴 했다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에게 의지할 줄 알았다
한 모험자가 이런 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며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영웅이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전쟁터나 궁지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한다는 것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그것을 일을 저지르기 위한 값싼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석 아가토스의 소멸에 대해 가격을 결코 매길 수 없듯이 말이다

나는 마검 자루에 손가락을 휘감았다
모습이 완전히 변해버린 이 또한 하나의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한 결과
그 누군가를 잃게 된다면, 나는 영원히 의지하지 않게 될 거야
또 누굴 의지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래, 잘 알겠어, 루기스"



 
엘디스는 발꿈치를 치며 건물 안으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내게 무슨 일이 있다면, 결코 잊지 않겠다는 소리내?
응, 아주 좋아, 의지가 되고, 네가 잊을 수 없다면, 그것도 상관 없겠어"


"엘디스, 장난 치지 말라고..."





엘디스가 가볍게 입을 놀리며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이었다

그래, 정말로 순간이였다
짐승이 자기 영역을 밟은 사냥감을 한 입에 탐하듯...

유적 안쪽에서 기어나온 예리한 검은색이 엘디스 가슴을 관통했다





 ◇◆◇◆





"아..."





아득한 상공




엘디스 정령술 같은 가짜 비행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늘을 지배하고 비행하는 구릿빛 용이 중얼거렸다




"저건 안 될 것 같아"


"안 돼?"




구릿빛 용 샤드랩트의 보조를 받으며
보석을 다루는 마인 레우는 하늘을 달렸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이라고 레우는 생각했다
내려다보는 모든 것이 아담하게 느껴졌다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고 의미가 있는 물체들이
몹시 연약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과거의 용이 교만했던 이유란
하늘의 지배자였다는 것도 원인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샤드랩트는 레우의 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브릴리스를 죽이는 건 이젠 무리야"





냉정하게 하늘에서
모든 것을 관찰한 결과를 흘리듯 샤드랩트는 말했다
레우는 그녀의 말에 반발하기 전에 경악과 미심쩍음을 먼저 느꼈다

레우가 아는 샤드랩트라는 이름의 용은
나약하고 도주벽이 있어 툭하면 시시한 말을 하고
판을 어지럽히는 기묘한, 어찌 보면 유쾌하지도 않은
존경스럽지도 않지만 친근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의 샤드랩트에서는, 그런 분위기의 일체가 누락되어 있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두 날개를 펴 레우의 몸을 껴안았다




"제브릴리스, 정령신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던 것은
그저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야, 어떤 강자라도 잠자다가 죽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일어나버렸어, 이젠 틀린거야 그러면"




샤드랩트가 철저하게 냉정했던 데 비해 레우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킨 것은 눈앞의 구릿빛 용이
위기에 처해 있을 루기스 등을 도울 마음이
한 조각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가냘픈 몸매가 용의 어깨에 손가락을 품었다




"...샤드, 당신.... 지금까지 그런 말을 대체!"




제브렐리스가 잠들어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샤드랩트가 말한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그것이 잠을 자다 죽었다는 것도...

안 좋은 망상이, 레우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쳐 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레우에 대해 샤드랩트는 지극히 무감정하게 말했다




"왜 내가 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난 루기스가 승리하든 제브렐리스가 승리하든 상관없잖아"




어느 쪽이든 자신을 살해할 수 있는 위험이 하나 사라진다
그것이 샤드랩트의 환희

루기스가 요청한 것은 시간벌기 차원에서 협조할 뿐
그것도 아르티아에 승리하기 위한 포석이였다

만약 그가 여기서 죽는다면 절대로 아르티아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죽어야 할 것이다
샤드랩트로서는 본능 잃은 제브렐리스보다
브릴리간트를 죽여버린 루기스가 더 무서웠다

저 만상을 죽여버릴 수 있는 남자가 죽는다면
샤드랩트는 또 한 걸음 죽음에서 멀어질 것이다




"잘 알겠어요"





레우의 말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 붉은 것이 덮어갔다
보석이 그녀의 의지에 호응하여 허공을 누비며 마력을 가꾸었다
가혹한 분노가 소녀의 팔을 후들후들 떨며 용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거야?
나는 계약을 어기지도,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어
무서운 것에 대처하는 것은 생물로서 당연한 법이야"




샤드랩트의 말에 레우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두려워만 하는 것은
그저 누군가를 버리기만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버리기만 했기 때문에, 다음은 그저 당신 차례인 것 뿐이야!
당신은 겁쟁이가 아니라, 그저 비겁자일 뿐이야!"




가냘픈 몸에서 넘쳐흐르는 분노를 드러낸 보석이 허공을 갈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