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72화 - 선택되지 않은 자 -
정령신 제브렐리스는 감은 눈으로 검은 액체 위에 앉았다
걸터 앉은 곳은 이끼 낀 옥좌
그녀만이 앉을 수 있도록 허락된 의자였다
일찍이 세계의 중심은 제브렐리스의 옥좌였다
신앙은 그녀에게만 쏟아지고 시야의 구석구석이
아니, 이 대륙 전체가 제브렐리스를 위한 정원이였다
마의 근원은 그녀이며, 마의 종착도 그녀
가까이 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절대의 옥좌
그런 그녀에게 지금 수많은 벌레가 몰려들고 있었다
제브렐리스는 눈을 감은 채 그 존재를 자각했다
껍질 속으로 파고든 마인과 요정왕
공중을 우러러보면 용과 보석
대지에 시선을 내리면 거인의 활보
도무지 지금이 인간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마성 투성이
결국 마성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마성이라고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신에 맞서는 부도덕과 절대 도망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들은 있었다
그리운 광경이였다
어느 시대건 아무리 무모해도
신에 적대하는 자는 반드시 나타나는 법
예전 브릴리간트 처럼...
"아, 그러고보니
당신 나와 프리슬란트 보다 브릴리간트에 인연이 있었내"
소녀가 휘황한 쓴웃음을 흘리는 기색으로 과거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옥좌 주위의 삼림이 그녀의 목소리를 빨아들였다
이곳은 하나의 숲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좌는 제전처럼 높이 모셔져 있고
그곳을 잇는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끼와 수목이 주변 유적을 침식해 고풍스러운 취향의 앤티크 같았다
이곳은 제브렐리스의 신전
제브렐리스는 자신의 신전을 중심으로 한때
스스로를 신앙했던 도시 하나를 삼키며 자신의 외곽으로 삼고 있었다
대마가 신전과 신앙과 원전을 근거하는 가운데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이곳에서 얻게 되었다
이 장소가 있는 이상, 그녀에게 승리할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였다
하지만 신에 적대하는 자의 필두는
그것을 알면서도 당당한 걸음으로 신전에 발을 디뎠다
"그래서 어땠어, 루기스?
용도 요정도, 기계도 다 좋은 친구들이였지?
나는 그들을 통해 너를 보고 있었어
조금이지만 너의 본질을 알 수 있었던 걸?"
거짓말이 아니었다
제브렐리스에게 있어 검은 액체...
자신의 피로부터 만들어낸 마성은 사지와 같았다
그러니 눈동자도, 그 신경조차도 공유할 수 있었다
마성이란 곧 그녀
게다가 루기스는 이들을 통해
여러 차례 제브렐리스의 마력을 받았다
마력은 그 인간의 정보를 응축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비록 평범의 마법사라도 마력이 맞물리면 서로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제브렐리스라면 마력을 퍼부은 존재가
어떤 영혼의 윤곽을 갖고 있는지조차도 손아귀
"이런 곳을 고향으로 삼은 적도 없지만
덤벼드는 마성을 좋은 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난 마음이 넓지도 않아서 말이야"
루기스는 보라색의 마검을 어깨에 얹으며 제브렐리스에게 다가갔다
그 옆에는 엘디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죽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이 헤어진 곳까지 제브렐리스는 감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도에 별 흥미는 없었다
루기스 등이 무슨 일을 꾸미든 그녀에겐 놀이나 마찬가지
자기 자식이 하찮은 일을 계획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우니까
"......시간 벌이를 하고 싶은 거구나, 루기스"
"응? 설마 이제 안 거야?"
의도가 간파돼도 루기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계산에 달콤한 타산을 포함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는 성격이랄까
애당초 제브렐리스의 시선을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루기스는 동요도 없이 산뜻한 모습을 했다
"뭐, 상관없어
그럼 같이 이야기 좀 나눠볼까, 후후후"
오싹, 등골이 오싹 얼어붙는 미소였다
그녀는 턱을 당겨 소녀다움을 남긴 목덜미를 기울였다
행동 자체에는 이 소녀를 신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뒤죽박죽이어서 묘한 감촉마저 갖게 했다
하지만 그 모습과 목소리만은
그녀가 인간으로부터 격리된 존재라고 크게 주장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겠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정신의 색채나 영혼의 윤곽조차 말이야"
신성하고 굴복을 강요하는 음색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있었다
"남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는거야?
신이라는 건 정말로 악취미를 가지고 있내, 실망이야"
"후후, 그런가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래도 흥미로워
대체 왜 인간 편에 서려 하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당신, 그렇게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잖아?"
"응? 한 번도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만"
루기스의 비꼬는 듯한 말을 되받아치자
제브렐리스는 옥좌 위로 팔꿈치를 괴었다
눈꺼풀은 여전히 감은 채, 그런데도
그 안쪽에 있는 눈동자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루기스는 실감했다
"신으로서 한 마디 하지"
제브렐리스는 옥좌에 앉은 채 미소를 지었다
예술가가 본다면 이 한순간에 영원히 남을 그림을 그릴 신의 미소
"너는 말야, 슬플 정도로 재능이 없어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먼저 우리가 되야 했어
그리고 인간 종은 반드시 너를 두려워하기 시작하겠지
비록 한때는 영웅이라 칭송해도 말이야
언젠가 너의 말은 왜곡되고, 무덤은 파헤쳐지고, 신화는 조각날거야
결코 사람으로서의 보답은 주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이것은 절대로 뒤집혀지지 않는 운명"
말 그대로 신탁 같은 장엄함을 말하며
제브렐리스는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그녀의 감은 눈동자가 모든 것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인간을 그만둔 인간이 인간 행세를 하겠다고?
그것이 비록 인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정작 인간들은 그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거야
시의와 이물질의 배제가 생물의 본능
"당신은 이쪽에 있어야 해, 루기스
본래 당신은 인간의 신에게 선택된 용사도
운명에 선택된 영웅도 아니야
그저 인간,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아이"
놀랍게도 제브렐리스의 말은 인자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사랑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루기스는 눈동자를 치켜 올렸고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무서운 일이었다
그가 찾는 동화란 결코 파괴도, 약탈도, 지배도 아닌
그저 순수한 사랑이였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처럼
그녀는 모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한다
뼈를 깎고 마성으로 낳는 것이 그녀에게는 무상한 사랑
"…재능이 없다, 너는 선택받지 않았다, 분수를 알아라
모두 어릴 적부터 들어서 익숙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언제나 있는 일이지
요컨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건가? 그럼 좋지
어떻게 발버둥쳐도 넌 내 적이란 건 달라지지 않을 거니 말이야"
대검을 어깨에 메고 루기스는 한 발을 내디뎠다
시간 끌기라고 했는데도 스스로 걸음마를 떼는 모습이 기이했다
아니, 이제 준비는 끝났다는 말인가?
하지만 제브렐리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성의 세계라면 당신이 받아들여지고 찬양받을 수 있다고 해도?"
루기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옥좌에 눌러앉은 제브렐리스를 보았다
그리고 그 답지 않은 아이러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나한테 먼저 손 내밀어 준 녀석은 사람이야
마성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네 말을 받아들였겠지
그리고 설령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정도는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
루기스는 마검을 어깨에 끌어당기며 자세를 취했다
제브렐리스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
조금도 기분 나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답을 알고 있던 내색마저 보였다
"아르티아가 당신을 싫어할거야"
나는 피식하며, 웃음을 흘렸다
루기스는 묻고 싶은 말은 다 들었다는 듯 흡족한 눈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 끌기는 효과가 있었어?"
순간의 정적
제브렐리스와 루기스가 서로 호흡을 맞췄다
공간이 삐걱거리고 긴장이 신전을 감싸고 있었고
주위에 누군가가 있다면 숨이 멎을 듯한 압박이 있었다
"진정으로 나에게 맞서겠다면
당신에게 안식의 죽음 따윈 주지 않겠어
산 채로 계속 고통받도록 해"
신이 신탁을 내리듯 제브렐리스가 말했다
그것이 네가 선택한 운명이라고 고하는 잔혹한 신의 울림
서로가 움직임을 보이려 했던 그 찰나의 순간이였다
신전에 무거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얼마 안 가 제브렐리스의 옥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제브렐리스가 두 눈썹을 치켜들며 표정을 바꿨다
순식간에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였다
경악은 없었다, 하지만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그게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퍼펑, 세찬 소리가 전해졌고
제브렐리스 신전에 몇 차례 연속 진동이 울려 퍼졌다
용의 거대한 화구가 제브렐리리스 외곽을
태워 죽이는 광경이 제브렐리리스의 눈에 전해졌다
"샤드에게서 들었지
검은 액체는 곧 너의 피
그렇다면 이 유적 전체가 너의 몸통이겠지?"
샤드랩트가 루기스에게 준 지혜
그녀가 다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이것인 것이였다
브릴리간트가 심장을 잃었듯이
제브렐리스 또한 자신의 체구의 대부분을 잃었다.
아니, 신으로서의 신앙이야말로
그녀에게 있어서 신체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것이 없어진 지금, 그녀는 이 유적에서
몸을 뒤채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신전 안에서는 그녀에게 승리할 수 없고
이 거구가 있는 한 그녀는 무적
그렇다면 다 부숴버리면 될 것이다
루기스의 패에는 일찍이 정령신을
몰락시켰던 용과 거인, 그리고 요정왕이 있었다
밖은 간신히 움직여 주었군, 이제 안에서 부숴버리기만 하면 될 거야
이미 패는 다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충격적인 것을 응시했음에도
여전히 정령신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사랑스러워"
그리고 그녀는 단지 그 말만을 내뱉었을 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