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84화 - 대륙의 두 세력 -
왕도 아르셰
대륙 문화의 중심지
부귀영화 끝에 있던 이 도시가 갖는 의미는
단지 대국 갈라이스트의 수도라는 것만은 아니였다
이곳은 갈라이스트 이전보다
틀림없이 대륙의 중심이었다
대영웅 아르티아가 통일제국을 이룩했던 시절
그녀는 여기에 옥좌를 두었던 것이였다
그렇기에 아르티아 신앙을 근본으로 하는
대성교와 갈라이스트 왕국은 항상 밀월 관계였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갈라이스트의 인간들은
대륙의 모든 것은 본래 우리가 얻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들이 위대한 제국의 직계라고 거리낌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없이 침략전투와 방위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왕도에
일찍이 멸망시켰을 문장교의 기가 걸려 있었다
이를 아이러니컬하다고 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런, 당신치고는 꽤 이른 도착이시내요
영웅은 늘 바쁘신 것 같으니까요"
현란한 장식이 억제된 왕도의 이궁
그 한 모퉁이에 있는 회의장에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성녀 마티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은 피로를 숨기지는 않았지
때 묻지 않은 반짝임을 지니고 있었다
"빈정거리지는 말아주겠어?
그리고 네가 이 시간에 시작한다고 알려줬잖아?"
"안이 한 짓인가요?
당신의 고삐는 그 애가 더 잘잡긴 하더군요"
당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안이 일부러 나에게 군 회의 시간을
전하러 오는 시점에서 뒤가 있다고 읽었어야 했다
상당히 빠른 시간을 지정한 것 같았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아
씹는 담배를 이빨에 물렸다
아무래도 필로스와 다른 이들이 모이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았다
본래 공주 필로스가 정식으로 대관한 이상
굳이 이궁에서 회의를 행할 필요는 없었다
당당하게 궁궐의 한 방에서 행하면 될 것이였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별궁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것은 즉... 너무 표면화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대략적인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제브렐리스가 죽으면서 대재앙은 끝났다
하지만 구왕국군은 이쪽의 목 언저리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서 기분이 어때요 루기스?"
맥락도 없이 바로 옆에 있는 양피지를 훑어보며 마티아가 말했다
그녀의 일이니까, 언제나처럼 일을 항상 안고 있는 것일 것이다
어쩌면 나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몇 가지 안건을 처리해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눈꼬리를 찌푸리자
마티아는 아차 하는 투로 말을 덧붙였다
"영락없는 영웅이 된 기분은 어떠냐고 묻는 겁니다"
"……내가 영락없는 영웅이라면 할아범은 죽지 않았을 거야."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을 말해 버렸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영웅, 무엇보다 그리워해야 할 단어가 지금은 독을 품고 있었다
영웅이라면 모든 것을 구하고 말았어야 하는데
할아범을 대가로 지불한 영광이란 어디에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건 아니에요, 루기스"
하지만 마티아는 반지를 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서로 마주쳐 사람들을 끌어왔을 것 같은
두 눈동자가 내 정신을 움켜잡는 것 같았다
성녀라는 역할 때문일까
그녀는 때로 시선 하나로 사람의 정신을 긴장시킨다
"그가 당신을 돕기 위해
목숨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영웅이어야 합니다"
씹는 담배를 나도 모르게 입술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말할 수 없는 저림 같은 것이 시야에 있었다
"리처드 장군은 단지 평범함 때문에 죽은 겁니까? 아니겠지요
당신이 그의 명예를 원한다면, 당신이야말로 가장 명예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의 목숨에 가격표를 붙이는 건 당신이란 말입니다"
"...그...그럴리가..."
순간 말을 삼켰다
무언가를 말대꾸하려고 입술의 모양을 바꿔도
도저히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지 않았다
몇 초의 침묵
마티아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나서, 씹는 담배를 입에서 떼어 냈다
"그래, 할아범은 평범한 자를 위해 죽지 않았어
할아범은 그런 것 때문에 죽을리가 없는 사람이니깐"
이런 식으로 마티아에 유도됐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슴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녀의 꼬드김에 넘어가 감정이 떨어질 만한 곳에
오히려 차분한 기색마저 있는 것이였다
과연 사람을 믿게 하고
감쪽같이 속이는 성녀님이란 것일까
어쩌면 이 때문에 안에게 한바탕
연극을 시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고마워, 마티아
내가 뭘 하면 좋을지, 꽤 알기 쉬워졌어"
인사를 하자
마티아는 가지런한 입술을 올리며, 말했다
"예는 필요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왕관이자, 당신은 나의 칼
당신은 날마다 움직일 때마다, 감사를 표하나요?"
"그 표현 뭔가 두려운데... 기분 탓인가?"
"네, 기분 탓일 거에요
하지만 비유적 표현은 아닙니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비유가 아닌 것이 더 두려운 거 아닐까?
그러나 그 것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시간에 맞춰 온
군 회의 참석자들이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였다
어쨌든 나는 그 앞을 묻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뭐라고 할까, 한 발만 더 내디디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필이면 예전에 혼인이 거론됐던 일이 눈에 선했다
이왕이면 술과 함께 잊어버릴 수 있다면 상당히 평화로웠을 텐데
군 회의실에 얼굴을 비친 것은
안 같은 문장교 인간과 비오몬도르 등 갈라이스트 귀족
이어서 카리아, 피에르트, 엘디스 등도 있는 걸 보면
일단 정치 군사 할 것 없이 주요 인간을 긁어모았을 것이다
카리아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이상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은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늘 있는 일이였으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모여
마지막으로 군 회의실에 도착한 것은 여왕인 필로스였다
굳이 시간을 조정했을지도 모른다
왕족다운 우아한 발걸음을 의식한 듯
그는 군 회의실 깊숙한 곳에 걸터앉았다
"자, 다들 여기에 모인 뜻은 아시겠죠?
앞으로의 일을 얘기하는 겁니다"
앞으로의 일
그 말과 필로스의 시선을 받고, 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집이 작은 여자이지만 이상하게
사람들 앞에 서면 누구보다도 두드러져 보였다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적군인 구왕국군은 남하를 시작했습니다
목표는 틀림없이, 이 왕도 아르셰겠지요
그들의 목적은 왕위 탈환에 있으니까요
그들은 현재 메드라우드 보루의 불탄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있습니다
목적은 병력의 보충으로 추정됩니다"
"보충이라니.... 안 씨
적은 충분히 대군 아닙니까?"
목소리를 낸 것은 비오몽도르였다
그는 커다란 눈동자 밑으로 구마살이 떠올라 있었다
본래 정직한 무신 및 문신 의 인간이었겠지만
정치면으로 쫓겨난 뒤로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소문은 사실 같았다
그는 군 회의가 한창일 때 여왕 앞에서도 거침없이 말참견을 했었다
묻는 말에 안은 두 손가락을 세우고 한 손을 접었다
"하나는 대성당으로부터의 증원
그들도 나중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구왕국과 대성당의 합동일 것입니다
척후병들에 의하면, 이것만 해도 약 10만의 군병"
십만이란 말에 실내 공기가 씁쓸한 것으로 변모했다
술이 입안에서 수도 없이 맛을 바꾸듯
어젯밤 승리의 맛이 이제는 고뇌로 변해버린 듯했다
하지만 이것뿐이 아니라고 안은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또 하나는, 서방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서방연합 로어 말인가?
그들은 자기네들 말고는
다른 일에 관심이 없는 무리인줄 알았는데"
말참견을 한 것은 카리아였다
생각하면 그의 친정은 서쪽 변경 보루인
코리덴을 수호하는 데 맡겨져 있었다
좋든 싫든 서방과의 접촉은 있었을지 모른다
"카리아 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제도 밖의 일에는 흥미가 적습니다
게다가 마인재해를 받아 일어설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대성당... 아니, 성녀 알류에노의 비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디까지 진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성당 기사들에 의한 서방 마인들이 토벌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마인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상관없이
그들은 예외 없이 인류의 위협
그것을 죽이고 얻은 자가 대성교에 들어간다면
당연히 우리의 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이 누구인지 용이하게 상상이 갔다
지금 그 녀석이 어떤 존재라 해도
그 녀석 말고도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말을 받아 손바닥을 살짝 휘청거리며 엘디스가 입을 열었다
"적에게는 적의 영웅이 있는 법이지
하지만 나는 나의 기사가 있다
게다가 서방 제국이 구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고
도와준다면 미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겠지, 안?"
"네, 엘디스 님
언뜻 보기엔 이것은 구왕국과 신왕국
갈라이스트의 내전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차세대 패권 다툼에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녀는 군 회의실에 설치된
검은 판에 흰 선을 그리며 현황을 말했다
이른바 대륙 내부는 지금 크게 두 세력으로 분단된다
구 왕국군에는 서방 연합 로어와 대성당이 포함됐고
반대로 신왕국군은 동방 볼버트 왕조
남방 일리저드와 동맹에 가까운 관계에 있다
대륙의 북서부와 남동부에
선명하게 세력의 경계선이 완성되어 버린 형태라고 하는 것이였다
주변국들은 어떻게 보면 대륙 중앙부에 자리한
갈라이스트 왕국의 내전을 이용해
향후 정세를 점치는 일전을 치르려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적이 서쪽에서 증원을 받듯
우리도 볼버트 왕조와 일리저드로부터 병력 증원의 말은 받았지만
그것으로 얼마나 병력 차가 좁혀지느냐 하는 것이겠지만요"
"...아니, 하지만"
나는 안이 백선으로 그리는 판도와
병력차를 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별것도 아닌데 의문이 불현듯 드는 것이 있었다
"볼버트도 일리저드도 잘 도와주는 군
하지만 걔네들이 뭐가 좋아서 도와주는 거지?"
자기편으로 만들려면
더 강대한 것이 좋다는 건 당연한 얘기
하지만 아르티아의 존재를 모르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신왕국에 기여하는 것이 이익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관망한 채
어느 한 쪽이 승자가 된 뒤
약해진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이
훨씬 국가의 이익이 될 것 같았다
볼버트의 마도장군 마스티기오스든
일리저드의 상급투사 테르살랏이든
모두 개인의 감정으로 움직일 사람은 아니였다
국가에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필요한 선택을 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 직후
어쩐 일인지 군의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허를 찔렸다는 건 아니겠지만
누구나 할 말을 찾은 듯한 기색이 있었다
먼저 피에르트가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올리며 말했다
"뭐,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일리저드는 구왕국과는 상당한 인연이 있고
우리 가문... 아니, 볼버트도 부흥까지는 동맹을 지키고 싶을테고..."
동시에 안이 가로채듯이 말했다
"피에르트님의 말씀도 지당하지만
이야기는 더 단순한 것입니다, 영웅 님"
영웅 님,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의 그 이름으로 불린 것 같았다
예전부터 나를 그렇게 부른건 안 뿐이었나?
그녀는 오랜만에 짐짓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구나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영웅 님
아니, 두려워 한다고 해야 할까요?"
코리덴 요새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루기스가 회귀하고
리처드에게 받은 의뢰에서
카리아와 함께 편지 같은 것을 갖다주는 것
그 장소가 코리덴 요새였죠
피에르트의 아버지 마스티기오스와 인연이 생겼는데
카리아의 아버지 바벨리지 버드닉과도 인연이 생길까요?
살아는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