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88화 - 용의 도피행각 -
"샤드, 일어나세요
벌써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에요
요즘 계속 이러고 있으시내요"
구릿빛 용 샤드랩트에 청한 것은
아이에서 간신히 벗어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몸을 강하게 흔드는 손가락 끝은
용을 마치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샤드랩트는 침구를 감싸며 호소했고
언짢은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이 멍청아! 내 맘대로 잠도 못 자!?
그리고 내가 이런 탓은 네 탓도 있잖아!"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샤드랩트는 침구에 더 파고들었다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는 보석 마인 레우도
왕도로 돌아간 지 며칠 만에 완전히
그녀의 태도에 익숙해졌는지 어이없다는 기색조차 없었다
게다가 샤드랩트가 하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였다
레우가 정령신 제브렐리스와 충돌시켜
성대하게 파쇄한 천성도시
그 도시는 정령신의 신앙을 길동무로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해 버렸다
하늘에 사는 용의 상징인 천성도시는
그 하나가 종족의 신앙을 관장하는 신전에 가깝다
존재 자체가 용의 힘의 근간인 것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본래라면
하나 잃어버려도 영향은 적을 것이지만
마가 희미해져 용의 대부분이 끊어진 이 시대에선
샤드랩트처럼 막강한 용은 신전 상실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마력의 연비가 심하게 나빠진 감촉이 그녀의 몸 안에 있었다
이 잠은 단순한 타락 때문이 아니라
불필요한 마력을 사용하지 않기 위한 휴식행위에 가까웠다
"별로 원망하는 건 아니야
제브릴리스를 죽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칭찬하고 싶을 정도지
하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한 거란 말이야!"
"…이번만큼은 강하게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유사시에는 단호히 대처해 주도록 하세요"
레우의 말에 샤드랩트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물러설 마음이 가슴속에 깔려 있었던 것이였다
아가토스를 계승하고
완전한 마인이 되었다는 데도 한참이나 달콤한 소녀
인간의 자취는 어떻게 발버둥쳐도 지워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사시란 언제의 일인가
이제 샤드랩트에겐 인류에게 맞서 싸울 이유가 없었다
제브렐리스와의 전역을 거치면서 원하는 것은 그녀의 품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체력 회복을 위해 안전한 왕도에서 잠만 자고 있지만
컨디션이 좋아지면 더 이상 이 애매한 관계는 끝일 것이다
괴물인 아르티아와
그를 죽일 수 있는 루기스의 충돌은 이제 피할 수 없다
샤드랩트는 이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운명이다
두 몸은 본래 사는 시대조차 다른데도
강한 인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어느 한 쪽이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시대의 고비라고 샤드랩트는 생각했다
아르티아의 지배의 시대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를 맞을 것인가
그러나 샤드랩트에는 둘 다 좋은 얘기
그들이 서로 싸운다면 샤드랩트에 위험은 미치지 않는다
아르티아가 왕도에 도착하기 전에는 벗어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침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느닷없이 샤드랩트는 일어났다
침구에서 빠져나온 붉은 머리칼이 살짝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녀는 초조해 할 때의 버릇처럼 이를 갈았다
"...샤드?"
레우의 의아스러운 목소리에 샤드랩트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무거운 소리를 내뱉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 가득하군
어떻게 천년 동안이나 영혼이 살아 있는거지?"
천년 전에 맡아본 냄새와 느껴본 공기
그것은 마를 죽일 의지로 가득 찬 놈의 호흡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 샤드랩트는 알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인간을 초월한 자는 단 한 명
한순간에 판단 끝에
샤드랩트는 레우를 겨드랑이에 껴안았다
인간의 몸으로는 장신인 그녀가
레우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운반하는 모습이 묘하게 이상해보였다
"저... 무슨 말이신가요?"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어서 도망쳐야 해"
"도망치다니, 어디로요!?"
샤드랩트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어딘가 얼빠진 듯한 기색도
약한 자세로 떨리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투쟁 수단의 하나로 도망가기로 선택한 용의 얼굴이었다
아르티아가 지배와 제압에 능한 괴물이라면
샤드랩트는 계속 생존하는 괴물이다
수단과 의미를 가리지 않고 그녀는 반드시 생존해 왔다
그런 그녀를 경멸하는 자도, 원망하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쪽도 이미 죽어버렸다
생물의 가장 큰 목적이
생존이라는 한 가지 점에 국한된다면
샤드랩트만큼 이를 달성한 생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구릿빛 여왕용이라는 막강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그녀는 오로지 살아남기를 바랬다
그것이 가장 지혜롭고, 그것이 가장 강한 것
눈깜짝할 사이에 죽어가는 약자를
수천의 시대를 사는 강자가 상대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살아서 도망치는 것조차 선택할 수 없는 약자에게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강자는 답파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렇게 믿는 샤드랩트이기에
두려울 정도로 위기에 민감했고, 확신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나도... 마인이 된 레우도
적으로 간주해 죽이러 올 것이다
그렇다면 강자의 품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전력은 집중 운용해야 해야 할테니까
"물론 안전한 놈 근처로 말이야
그 녀석이 아르티아와 만나기 전까지는
가장 안전한 곳 아니겠어?"
휘익 소리를 지르며
샤드랩트는 왕궁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휘둘리는 레우만이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허공에 울리고 있었다
◇◆◇◆
왕도의 큰 거리를 여러 대의 마차가 달렸다
마차는 그대로 왕도 밖으로 나가기 위한 대문을 향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전역중
왕도에 드나드는 마차가 극단적으로 적은 가운데
이들은 묘한 주목마저 받고 있었다
호위 기마대도 달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본래 비밀리에 구왕국군의 사자와 만나는 것이니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오히려 어느 정도 이목을 집중시켜 놓고
밀정을 가장하고 있는 것일까
이쪽의 판단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여왕 필로스나
비오몬도르 같은 귀족 무리일 테니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오히려
마차 밖보다도 안에 있었다
왕도 밖으로 나와 얼마쯤 지나자
그 녀석에게 눈을 돌렸다
"네가 도망가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을 건데 말야"
나는 겨울용 장갑을 강하게 손가락에 끼면서
당당하게 마차 안에서 뒹구는 샤드랩트를 보았다
보통의 4인용 마차보다 약간 넓은 구조였기 때문에
그녀가 누워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처음 레우와 함께 마차 위에 뛰어내렸을 때는
무슨 일인가 했는데 도망쳐 왔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샤드랩트는 뒹굴면서도 눈매를 강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제브릴리스와의 전투에서의 공로자야!
공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넌 인간이 아닐 텐데?"
대답한 사람은 내 옆에서 양팔을 끼고 있던 카리아였다
은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샤드랩트를 관통하고 있었다
기분이 나빴던 모습으로부터
최근 간신히 회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난입에 또 기분이 상한 것 같다
요 며칠 동안의 나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거기서 깨달았다
역시 되는 일이 없다니깐
"하지만 도망간다고 해도 왜 이곳에?
지금은 왕궁이 훨씬 안전한 것 같은데..."
느닷없는 마차의 흔들림에
머리카락을 들썩이며 마티아가 말했다
본래 성녀인 그녀가 일부러 외부 교섭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상대도 비슷한 격의 인물이 나오기 때문에
사전에 사자를 통한 교환으로 대략적인 일이 결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신왕국과 구왕국과의 교섭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그녀 같은 인간이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나도 함께 가라고 할 줄은 몰랐는데
아마 실제로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은 마티아이고
나는 그냥 옆에 앉아 있을 뿐일 것이다
"아냐, 섣불리 왕궁에 있는 건 위험해
그 인간왕이 일어나 버렸단 말이야
그렇다면 인간 영웅 곁에 있는 게 안전하지 않겠어?"
인간왕, 그 단어에 카리아와 마티아
게다가 레우와 나도 포함해 한순간 침묵했다
그 단어에 놀랐다기보다는
샤드랩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라서였다
왜 신화와 역사의 등장인물인 인간왕 메디크가 나오는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갑자기 왠 서방의 영웅이 느닷없이 되살아나
네놈의 목숨을 노리러 온다는 것이냐?"
카리아는 날카로워 보이는 말투로
샤드랩트의 말투로 응했다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샤드랩트는 뻔한 묻는다는 듯 뒹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냐, 인간왕 메디크의 영혼 뿐만 아니라
대영웅의 것도, 용사의 것도, 아르티아가 모으고 있었잖아
강인한 영혼만 있다면, 부활시킬 수 있단 말야"
그것이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하고 샤드랩트가 덧붙였다
영혼이 있다면 부활시킬 수 있다
그 말이 놀라울 정도로 안이하게 내 뱃속에 떨어졌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는게
아르티아 놈은 하필이면 그 영웅의 영혼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같은 일을 할 수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더 신기할 정도였다
샤드랩트의 솔직한 태도에 카리아가 눈을 찡그렸다
마티아 역시 굳은 표정을 보면
사령술의 유형을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왕, 대영웅... 게다가 용사의 혼
나란히 앉아 있는 영걸들의 혼이
저 적진에 수중에 있다니...
등줄기를 한기가 아니라 더 날카로운 것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말이 무거워졌다
드디어 대재앙이 끝났는데 자꾸 귀찮은 일이 생기니 말이다
"……그 인간왕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약간의 침묵이 힘들었는지 레우가 말을 꺼냈다
아니, 혹은 실제로 그녀는 그 성장기 때문에
인간왕 메디크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마티아가 잠시 말을 더듬는 사이
한마디로 샤드랍트가 말했다
"미친 놈이였어"
서방 로어 인간이 들으면
즉석에서 살해당할 것 같은 평가를 샤드랍트는 내렸다
숭배의 대상조차 되어 있는 인간왕 메디크를
이렇게 평한 사람은 이 용 뿐일지도 모른다
대개는 위대한 사람이니
인간국가의 시작이니 하는 평이 들릴 텐데
그러나 생각하면 우리가 아는 인간왕 메디크는
어디까지나 역사나 신화 속의 인간이다
전문이나 기록 속의 존재일 뿐
천 년 전에 살았던 샤드랩트가 말한다면
어쩌면 그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성으로만 따진다면 말이다
"인간이 본다면
최초의 왕국을 만든 위대한 왕일텐데요?"
"그러니까 미쳤다는 거야"
마티아의 말조차 가로채며 샤드랩트는 계속했다
더없이 정성이 담긴 말 정도로 느껴졌다
기묘한 일이었다
샤드랩트는 무엇인가 시선을 돌리듯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천년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천성룡 브릴리간트, 정령신 브릴리간스, 거인왕 프리슬란트
그들이 아직 패권을 자랑하던 시절이라고
지금처럼 대기의 마력이 희박한 시대가 아니였어
마성의 국가가 구축되어 가는 마의 전성의 시대에
그 놈은 인간의 국가를 쌓아 올려버렸어... 그게 미친놈이 아니고 뭐야?"
샤드랩트는 순간 생각에 잠긴 듯 하며, 표정을 굳혔다
오랜 시간을 거쳤음을 증명하는 듯한 고뇌가 거기에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군...:
샤드랩트가 당연하듯이 말했다
그것은 왠지 신호 같았다
바깥에서 공기를 부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