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8장 영웅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92화 - 수천의 시간을 넘어서 -

개성공단 2021. 5. 26.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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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작아져 가는 건물에, 계속 퍼지는 시야
하늘은 이토록 광대하고 땅은 이토록 거창했던건가

시야 자체에 빨려드는 듯한 기분에 빠지면서
비로소 몸이 하늘을 나는 것을 느꼈다
살을 때리는 바람은 통증을 동반할 정도로 차가웠다
나는 안구에서 수분을 뺏길까 봐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당연히 나 자신이 하늘을 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등뒤에서 잡아들듯이 구릿빛 용 샤드랩트가 날고 있을 뿐이였다

순간 하늘을 나는 감촉에 취할 뻔했다
역시 인간은 하늘을 활공하게 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샤드
너는 변덕을 부릴 성격은 아니잖아"


"당연하지, 그걸 안다면 물어볼 필요는 없잖아?
네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좀 더 감사하는 것이 좋겠구나!"




샤드랩트는 여전했다
이렇게까지 감사를 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 몸은 마디마디 오열을 냈고 일부는 부서졌고 배는 피를 토해냈다

영락없는 만신창이
무사하지 못한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

그대로 메디크와의 싸움을 계속했더라면 솔직히 어땠을지 모른다
적어도 유유히 승리할 수 있었다는 광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놓치지 않았으면 죽었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그래, 너 하고 싶은 말 맘껏 해라"



조금 더 말을 공손하게 것 정도는 기억해 주었으면 했다
날개 말고는 인간의 모습이어서일까
샤드랩트의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꽂혔다

하지만 본래의 나의 의문은
내가 그때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였다




"그래서 왜 날 살렸어?
그것은 너도 위험한 행동이였잖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어깨를 가볍게 움츠렸디

샤드랩트의 행동원리는 생존을 제일로 삼고
위험을 피하는 데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아는 사실이였다

이번 상대는 그 괴물... 인간왕 메디크
요정이나 거인과 같이
용을 죽이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효를 올려
인간왕의 의식을 흩어 불길을 내뿜으면서까지 나를 도왔다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신세를 진 적은 없고
그녀는 은혜를 걱정할 성격은 아닐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버린다면
난 그녀가 도망칠거라고 생각했고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위협에 맞서야 할 의무는 없다
힘을 가지고 여전히 맞서지 못하는 녀석도 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질의 문제

그것을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옳고
외면하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말을 해 버리면
맞서지 못하는 자는 살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세계는 너무나 잔인할 것이다




"당연한거 아니야?"




내 말에 시원시원하게 대꾸하듯 샤드랩트는 날개를 폈다
구름이 더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고도는
이제 시선 감각마저 모호해지게 만들었다
높이가 얼마나 되냐 생각하는 것조차 어처구니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네가 죽으면 곤란하다고
네가 승리하지 않으면, 도망갈 곳이 없게 되잖아!"


"음... 난 너의 은신처가 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샤드랩트답다고 하면 그럴 듯한 대답이었는데
이왕이면 더 좋은 말을 해줬으면 했다

죽는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라고 하는 것보단 낫지만 말다

샤드랩트는 빨간 머리를 뾰족하게 내밀며
더욱 고도와 속도를 높였다.

이쯤 되면 말조차 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입을 열면 몸 안에 돌풍이 불어와 머리가 돌았다
분명히 내가 중상자라고 하는 이해가
이 녀석에게는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비행은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을 지니고 있었다
표식도 없는 하늘 속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마력의 보조를 받으며 하늘을 달렸다
그리고 다른 곳보다 약간 낮은 하늘을 덮는 구름 속을 뚫었다
이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깊은 구름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샤드랩트는 양 날개를 활짝 펼쳤다

반사적으로 눈꺼풀이 열렸다.



"이봐 이봐, 이건..."



시야가 열리고, 구름 속으로 그 광경이 펼쳐졌다

장엄한 하늘의 성
공중에 떠있는 하늘을 관통하는 성채
대지에 뿌리내리는 인간 건물이 왜소해 보이는 하늘의 성이
그대로 구름에 덮여 날고 있었다

제브렐리스에 충돌시킨 것보다 작고
도시라기보다는 성채가 날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거대하다
일찌기 하늘을 지배하고 있던
용의 건조물의 일각이 이것일 것이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하늘을 우러러볼 만한 성채도
한낱 잔재에 불과할지 모른다

샤드랩트는 날개를 펼친 채 하강해 성채 꼭대기에 착륙했다
용의 몸으로도 문제없이 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한 구획은 왕도의 광장보다 훨씬 넓었다




"내 은신처 중에 하나야, 드물게 쓰고 있었지"




은신처는 정말 필요할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은신처라고 샤드랩트는 덧붙였다
확실히 성채는 외관은 훌륭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의 정비는 되어 있지 않고
사람... 아니, 용의 손길이 들어간 모습도 없었다
정말 그녀만이 아는 곳일 것이다




"아니, 기다려봐
나는 마티아와 카리아를 만나야 한다고
너는 여기에 있어도 상관 없지만
나만이라도 가까운 곳에 내려주겠어?"




금방 따라잡는다고 말해놓고
이런 장소에서 쉬고 있으면 카리아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

그리고 메디크도 그 후 어떻게 움직일지 불분명하다
왕도로 갈 수도 있고, 마티아나 카리아의 뒤를 따를 수도 있었기에
멈춰 서 있을 틈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 네 몸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상처를 낫게 해야지, 게다가 메디크는 널 적으로 판단했다고
그렇다면 왕도에 진입하거나, 다른 사람을 습격하는 일은 없을거야
그는 그런 희생을 제일로 싫어하는 자이니까"




희생을 싫어하는 남자
그런 말을 들으면 묘하게 납득이 갔다
칼날을 잠시 말을 주고받은 정도지만
그래도 희희낙락하며 인간을 학살하는 인간으로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마차에도 이미 은발의 거인과 보석 마인이 있어
그들도 전력의 일각이지 않아?
그렇다면 걱정해야 할 것은, 주위가 아니라 너 자체
그 때문에 난 여기에 온 것이야"




샤드랩트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당황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이렇게 제정신으로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기보다 도망치는 것이나
자신이 안전하기를 바라는 것 이외의 것을
그녀가 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고
입술을 찡그리며 당당한 태도로 말햤더




"너와 메디크의 칼싸움을 보고 알았는데
너는 인간의 영웅이지, 마성의 영웅이 아니야
인간 영웅으로서의 한 면으로만 본다면
메디크의 순도가 더 높을 거야"




순도가 높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곧 생각이 미쳤다

인간왕 메디크의 마력을 거의 갖지 못한 체구
인간 그대로 인간을 초월한 초연성
그것은 그 헤르트 스탠리도, 아르티아조차 없는 고유의 성질

그 끝에 얻은 것이야말로
그의 심오한 인류의 극기
눈에도 띄지 않는 무술의 정점

확실히, 나보다도 훨씬 그가 영웅적일 것이다




"뭐야, 넌 나를 이런 곳까지 데려다 놓고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메디크가 선열한 존재임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마성의 힘을 가지고 겨우 이 곳에 당도한 나로서는
저 극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태양 같은 헤르트도 뇌광 같은 용자도 아닌
인류의 왕으로 빛나는 자
그 인간에게 승리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넌 이길 수 없어, 그건 진실이야"




나는 샤드랩트의 말을 듣고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녀의 성격은 나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자기에게 이익이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존재

아무리 멀리 돌아가도 반드시
그녀의 말은 그녀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웃었다




"샤드, 날 불쏘시개로 만들고 싶거든, 다른 방법을 쓰도록 해
일일히 횡설수설하지 않아도 돼, 나는 나를 위해 이기니깐
그가 아르티아에 붙어 있는 이상, 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네가 뭐라고 하든 말든, 여기서까지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어"


"그래, 솔직한 말을 좋아하는 구나
그렇다면 나도 똑바로 말할게"



샤드랩트는 빨간 머리를 흩날렸다
마치 그녀의 심경을 나타내듯이 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도
한눈 파는 모습도 없었다.
그녀에게서는 차마 털어내지 못한
철과 피 냄새가 시선에서 풍겼다



'너는 위대해
브릴리간트의 목을 친 것도, 제브릴리스를 소멸시킨 것도
결코 내가 할 수 없었던 기적이야
인간의 영웅임에는 의심의 여지는 없어

  하지만 네가 인간의 영웅인 한, 인간 왕을 이길 수 없어
아니, 인간왕, 대영웅, 용사, 그리고 아르티아
인간 극치에 있는 그들에게 인간인 너는 승리할 수 없을 거야"


샤드랩트는 그것 때문에 날 데려왔다는 듯 했다



"그렇다면 넌 인간으로서만 아니라
마로써 승리하는 싸움 방식을 알아야 할 거야
너는 사람의 손에 의해, 마가 쏟아진 인조 영웅이니까

  메디크와의 일전은 경악할 정도였어
어떻게 용을 마력을 가졌음에도, 흉내만 낼 수 있단 말인가
거인의 근력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발휘하지 않았는가
영혼의 가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하나 베풀지 못하는가

      네가 하는 일은 칼로 술식을 쓰고
지팡이로 물건을 베려고 하는 것과도 같아
그저 인간 영웅의 연장에 불과한거지"


"솔직히 그렇게 쉽게 된다면, 고생은 안하겠다만
인간은 어디를가나 인간 말고는 모르는 생물이라서 말야"




샤드랩트가 하고 싶은 말은 알겠다
보석 아가토스한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마인의 싸움 방식이란 더 현란하고 파멸적인 것이라고
인간의 테두리에 머문 것이 아니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용이나 거인이나 정령이나, 어떤 힘이 체내에서 소용돌이치든
그것을 발휘하는 방법은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과거에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인간 중에도 마성을 초월하는 방대한 마력을 가진 자가 때로는 생겨난다
그러나 그래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성보다 극히 좁은 범위의 일뿐이다



그것은 왜인가?

인간의 신체가 허약하고
본질적으로 인간은 인간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영혼이 태어난 그때부터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규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너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하나뿐이야
요컨대, 네가 져서는 곤란한 거야
그리고 모른다면,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샤드랩트는 일어선 채 발꿈치를 쳤다
그것은 위협도 초조도 아닌, 하나의 신호 같았다

찰나 그녀의 모습이 변모해 갔다
붉은 머리는 사라지고 장신의 몸은 늘어져갔다
왜소한 사람의 몸이 용의 몸으로 변해 가고 있었고
피부는 비늘로 변해버렸고 억눌려있던
마력이 나의 눈동자를 태워버렸다

일찍이 세계를 비예하고 대지를 불태웠을
구릿빛의 여왕 용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뭘 알고, 모르는 거냐?
태양학? 별들의 읽는 법? 마력을 빼앗는다는지
그것들은 모두 마성으로서 알고 있어야 할 것이야
마성의 역사도, 지식도, 모든 것은 힘에 연걸되어
반짝임 같은 빛을 가지는 것이지"




그 말 속에 여느 때와 같은 당혹감도 거짓도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목소리였다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왔다고
직감하게 만드는 용의 가냘픈 목소리가
열이 되어 나를 덮치고 있었다



"내가 너를 마성의 영웅으로 만들어 줄게
기뻐하는 게 좋을 거야
나 자신 이상으로 지식과 경험을 쌓은 마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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