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8장 영웅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93화 - 끝나지 않는 마성 전역 -

개성공단 2021. 5. 29.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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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이스트 왕도 아르셰와 메드라우트 보루의 중간 지점
대마 제브렐리스의 접근을 앞두고 파기된 촌락이
신왕국과 구왕국의 회담 장소였다

마을 안에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밭이나 가옥은 마성이 무너뜨렸을 것이다
불에 타 있는 부분도 있고, 파괴된 부분도 눈에 띄었다

한번 버려진 촌락은 쉽게 원상복구되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의 손이 가지 않으면 녹슬어 버리기 마련

당연히 이 마을 밖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제브렐리스뿐 아니라 통솔자를 잃고
광포해진 마성으로부터도 백성은 도망쳐야 했다
주변국의 국토에더 수많은 상흔이 남겨졌다
부흥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회담 장소에는 이런 폐기된 촌락을 여러 차례 이용하였다
남의 눈에 띄기 어렵고, 반면 마차를 돌리기 위한
길만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였다




"루기스가 늦군요?
사람의 발로 마차를 따라잡기엔
어쩔 수 없겠지만요"




마차에서 내리면서 성녀 마티아가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굳이 그 말을 한 까닭은 주변에 가슴속의 불안을
전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옆에선 쇳냄새를 풍기며 카리아가 은발을 흩날렸다



"놈은 나중에 따라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따라올 것이다
이제와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한 녀석은 아니다"




그녀에겐 드물게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말 같았다
마티아는 카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엿다

안심시킬 만한 말을 한 카리아였지만 표정은 정반대였다
하얀 피부는 더욱 창백해지고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처녀의 것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가슴속에 담아둘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간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지금 한 말은
마티아에게 했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타이르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네, 그가 죽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또 멋대로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아요
행동이 관리되지 않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건 그래, 차라리 맹견이 좀 더 얌전하겠군"




땅에 발자국을 만들며
마티아는 좋지 않다는 듯이 카리아의 은색 눈동자를 들여보았다

루기스처럼 카리아, 피에르트, 엘디스와도
마티아의 친분은 더 이상 짧지 않다
어디론가 떠날 때 같은 마차를 탄 적도 허다하고
이들에게 도움을 받은 일도 부지기수

그리고 거기서 마티아는 하나 깨달았다
루기스와 가장 가까운 이들 3명 중 가장 불안정한 사람은 카리아다
나머지 두 사람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마법이거나 엘프라는 종족이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성녀 마티아, 구 왕국 측이 벌써 도착해 있는 것 같습니다"




마티아의 생각이 깊숙히 파고들던 때
동행하는 라르그도 안이 촌락 안쪽을 가리켰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엷게 끼어 있는 것을 보니
침대가 있는 마차에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취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야
마티아는 의식을 루기스에서 전쟁터로 돌렸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전쟁터니까...

마티아는 남다른 무용이 없었다
문장교의 성녀인 그녀가
최전선에서 창을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자칫하면 잡병에게마저 살해될 수 있을테니까

그녀의 전쟁터는 그 밖
병사들이 잡아온 승리를 무기로 하여
어떻게 최대의 성과를 얻어내느냐 하는
협상이야말로 그녀와 안의 주특기였다

아직 어린 레우는 기마대와 함께
마차에 남겨두고 안과 호위 카리아
나머지 몇몇 문관을 데리고
마티아는 촌락의 중심으로 발길을 뻗쳤다
쌀쌀함을 느끼기도 전에 적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장교의 성녀님
소문과 다름없는 미모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마을 한복판에 간소하게 지어진
테이블과 여러 개의 의자
탁 트인 장소에 만들어진 그것들에도
함정은 없는 것 같았다

미리 기마대를 척후로 보냈지만
굳어진 병사의 모습도 확인하지 못했다

마티아에게 말을 걸었던 덩치 큰 남자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서 신왕국 인간을 맞았다
발하는 분위기만으로도 그가 구왕국 측의 교섭자
그 중심 인물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로이메츠 폴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호국관 제이스 브래켄베리의 대리로서 참관했습니다"



국왕의 외척이자 상급귀족인 폴가 당주
귀족으로서의 품계라면 틀림없이 위에서부터 세는 것이 빠를 것이다

왕도에서 쫓겨난 비장함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동정을 얼굴에서는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행동거지는 호방함과 쾌활함을 알 수 있지만
소작의 세부에 기품이 감도는 것은
혈맥이 바른 귀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티아도 자칭으로 답례를 했고
순간 안에게 눈짓을 했다




"저도 우리 여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여기에 왔습니다
부디 성과가 많은 협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이메츠가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티아가 찾아왔고, 이유는 협상을 끝내기 위해서

신왕국과 구왕국의 충돌 없이 유화 여부는 이에 달려 있다
아직도 마성이나, 아르티아라고 하는 존재의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여기서 잘만 되면 사람끼리 전역을 되풀이할 염려는 사라질 것이다

서로 파탄만은 피해야 할 회담이었다

협상 자리에 앉기 전 안이 마티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고했다
시선은 로이메츠의 양쪽에 서 있는 두 기사에게 쏠렸다




"둘 다 일각의 인간입니다
맹수 가르라스 가르간티아
그리고 파수꾼 발레리 브리트니스"




듣자마자 마티아는 눈을 크게 뜨고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루기스가 이곳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가르라스 가르간티아는
성당 기사의 계승단장이자
명예 기사와 존귀한 인물
풍모는 눈꼬리가 강하게 치켜올라
야성적인 모습마저 연상시킬 정도였다

과거 기사의 일인자로서 각국에 이름을 알리게 한
그는 이 회담에 대해 흥미가 없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문제는 나머지 한 사람




발레리 브라이트니스
신왕국이 보유한 메드라우트 보루를 함락시켜
왕도에 칼을 내민 당사자
그뇨가 이끄는 은테 군청의 군세는 왕국 중에서도 최정예

가르라스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 없을 것이다
인간왕 메디크가 신화시대의 영걸이라면 이들은 현대의 영걸이였다




"아직 우리에게 피를 흘리게 한 지
얼마되지 않았건만, 이 협상장에 나올 줄이야
신조라도 바꾼건가, 은테 군정?"


"전쟁터는 남녀, 양쪽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만한 사람이 모를리가 없겠지?
설마 그저 시골 계집애도 아닐테고 말이야"




발레리를 쳐다보며 카리아가 말했다
그리고 발레리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되받아쳤다

서로 물고늘어지는 기색도 있었지만
서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사리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생각하는 바도 들뜨는 감정도 있어 이를 갈며 억누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마티아는 루기스의 부재에 감사했다
만약 그가 여기 있었더라면 이런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구왕국 모두를 적으로
돌려서라도 칼을 빼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발레리는 그의 사부를 죽인 것이다
그는 기묘한 곳에서 이성적이며 놀랄 만큼 감정적이다
원수란 자리임에도 침착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미안하네, 버드닉
우리는 그냥 호위로 온 거야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
기사장전에서도 쓸데없는 투쟁은 하지 말라잖아"




가르라스는 정말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성격상 협상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발레리와 카리아가 서로 한발 물러난 뒤에야
비로소 협상에 관여하는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로이메츠와 마티아를 중심으로 문관들이 주위를 뒤덮었다



"하지만 성녀님께서 오시다니, 결국 여왕은..."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로이메츠였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미 보이는 결론을 베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마티아도 그 점에는 동의했다
뻔한 것을 에둘러 말하는 취미는 없었으니 말이다



"네, 우리 새 왕국은 국교를 문장교에서 변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은 여왕의 뜻이니까, 그 점은 협상의 도마 위에
오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원래 성향의 대성교도들도 신을 바꾸라는 말인가요?"


"아니요, 하지만 국가로서의 교의는 변하지 않을겁니다"




마티아는 여왕의 대리로 이곳에 있다
그런 그녀가 굽히지 않는다고 하는 이상
이미 국교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교섭에 의미는 없다
하물며 문장교의 성녀인 그녀가 대성교에 양보할 리가 없는 것이
로이메츠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의 일의 진행과
둘러싼 여러 귀족의 먹이가 될 만한 조건의 획득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끝내둘 이야기가 하나 더 있었다



"국교로서의... 교섭은 잘 알겠습니다
비록 호주머니가 비겠지만, 귀족들을 설복시켜 보이겠습니다
병사는 호국관이 집결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문장교의 성녀님... 그... 우리의 대성교의 성녀, 알류에노의 이야기입니다"



로이메츠의 거구가 박진감을 더하면서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자취를 감추었다
본래는 어느 정도 사전에 교섭한 내용을
확약하기 위한 장소였지만
그는 다른 화제를 끌어왔다

마티아와 안이 살짝 표정을 지었고
카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성녀 알류에노로부터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내가 아니라 호국관을 향해서인데....
요약하자면, 내용은 이렇습니다"




로이메츠는 고통을 참은 듯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진지한 눈망울을 보내며 말했다
반응한 것은 마티아가 아니라 안이었다
동요보다는 의심이 더 강하게 떠오르는 대목이였다



"음... 아직 이 나라에 마성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하는 건가요?"




거구를 뒤흔드는 듯 로이메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번개가 치고 나가는 듯한 충격이 주위에 있었다



"성녀 알류에노가 그렇게 말하긴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분 따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와 마성의 전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무겁고 씁쓸한 말을 힘겹게 내뱉듯 로이메츠가 말했다

마티아는 눈꺼풀 뒤에서 루기스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아르티아라는 마성이 대성당에 매달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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