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5장 가자리아 내전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88화 - 가자리아 내전 -

개성공단 2020. 3. 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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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전쟁터였다

 

피가 대지로 흘러내리고, 살이 터져나갔다.

병사들의 포효가 파도를 치고 주위를 뒤덮었고,

어느 누구도 제정신을 취할 수 없었다.

창끝이 옆구리를 도려냈고, 쏘아진 화살이 머리를 쳐부섰다,

 

전쟁터다. 틀림없는 전쟁터였다.

 

엘프든 사람이든 그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눈에서는 색이 사라지고, 눈앞의 적을 사냥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이곳은 지옥이였다.

누구나 한 발짝씩 몸을 내디딜 때마다,

대지를 지옥으로 뭉개고 있었다.

 

엘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병사와 병사들이 몸싸움이 벌어지는 것보다

조금 멀리 있는 곳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지금 시야 끝에 있던 엘프가 몇 명 절명했다.

그들을 절명케 한 병사 역시,

다른 무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죽음이 죽음을 부르며, 생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해괴한 포효를 부르짖으며, 군대가 돌격을 거듭했다.

 

이것이, 내가 만든 것, 내가 짊어저야 할 것...

엘디스의 가슴은 공포와 당혹감으로 뒤섞이면서

고통으로 찢어질 듯 했다.

 

주위의 문관들이 엘디스를 떠받치는 것은 확실했다.

자신을 이끌어 보려는 자가 있음에도 확실했다.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엘디스라는 공주의 본성은 겁쟁이 였다.

앞으로 나아갈 꿋꿋한 정신도 가지고 있지 않고,

무뎌질 만한 꿋꿋한 체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엘디스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정신이 어지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몸을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시야의 끝에 있는 광경은 지옥 그 자체 였고,

그 지옥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그녀 자신이 였다.

 

하지만,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다.

병사들 중에는 자신을 위해 의지를 품고

죽어가는 자들이 있으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 그 다리를 내딛고

죽어가는 용사들이 있다.

 

그들을 두고 도망치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일 것이다.

엘디스는 그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시선을 돌리고 못본체 한다면 얼마나 편할까

자신은 유혹당했을 뿐이라고 단정해버리면 

얼마나 가슴 속이 가벼워질까

그녀의 마음이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을 잡는 다면

더이상 그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엘디스의 시선이 전쟁터를 응시하면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루기스의 모습을 찾았다.

초록색의 옷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 전쟁터의 책임 정도는 다하는 거야 알겠지?"

 

그 말만을 남기고, 

루기스는 혼자서 전쟁터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 저 등을 얼마나 쫒아다니고 싶었단 말인가...

 

그를 붙잡고, 이 말 위에서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야, 지옥을 다니고 있어도

행복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기스는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전쟁터로 뛰어 들었고,

나도 지금 나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책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도망가버린다면,

그 남자는 나에게 뭐라고 할까

위로를 해줄까, 아니면 멍청한 짓이라고 질책할까

 

아니면 주군답지 못하다면서, 나를 버리지 않을까

 

싫다, 그것만은 싫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그에게 맞는 주군이어야 해

그러므로 도망치는 것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해

 

루기스의 말이

엘디스의 정신을 속박해나갔다

겁이 많은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고

엘디스는 정신을 추스리고, 고개를 들었다

 

'루기스가 내 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정해져 있는 책무이겠지?'

 

그런 말을 그의 등에 걸었었는데

루기스가 그것을 듣지 못한 것이

 

그것만이 엘디스의 유일한 아쉬움 이였다

 

 

 

*

 

 

 

당초 엘디스가 이끄는 혁명군은 우세해 보였다

 

농성을 하는 라기어스의 군대에 대항해서

부대를 둘로 나누는 것으로

군사를 기동적으로 운용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였다.

 

이것도 방어 수단의 하나겠지만,

가자리아의 지형은 병사가 진격을 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설령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왕궁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극히 일부의 군사가 되버렸다

 

그래서 부대를 둘로 나뉘고,

별동대는 더 좁은 길로 진격을 했다.

적군도 동시에 둘로 갈라지면서,

이 쪽의 피해는 훨씬 경감되었다.

이렇게 공격수를 늘린다면, 효과는 더 늘지 않을

 

...까라고 생각해버렷다.

라기아스군은 농성을 시작해버렸으니 말이다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것이다.

적은 농성을 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왕궁 주위에는 성벽 만큼은 아니지만,

산맥이 울타리 처럼 있었기 때문에

방어에 적합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농성을 한다면,

적군은 유리한 상황으로 바꿀 수 있었고,

그렇게 버티며 복병으로 뒤를 친다면,

우리를 사지로 몰아 넣을 수 있었다.

 

거기다 갈라이스트의 병사들이 도착한다면,

여기서, 이 소규모의 전쟁은 끝이 날 것이다.

 

숙련된 정규군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라기아스 세력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왕궁에 틀어박혀서 방어를 다지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았다.

그것은 일찍히 갈루아마리아에서 

그 모습을 보였던, 보라색 빛의 검...

그건 내 손에서 나와서, 내 손가락으로 잡혔다.

 

정말 편리한 검이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지난번에 카리아가 말한대로 암살자나 되보는건데..

스스로를 비웃듯이 볼을 일그러뜨렸다

 

광기의 눈동자를 담은 엘프가

나의 앞에 창끝을 겨누며 달려왔다.

나는 몸을 조금 비틀며, 보라색의 섬광을 날렸더니,

나에게 달려오던 엘프의 손목이 날라가고 말았다.

 

이 엘프를 저지했다고, 위협이 사라진건 아니였다

바로 그 순간, 다음 위협이 나에게 다가왓다

 

이 처럼, 전쟁터는 멈출 수 있는게 아니였다.

한번 전장에 나간 이상,

다리를 편히 쉴 수 있는 것은, 시체들 뿐이였다.

 

특히 적은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았기에,

이 쪽은 쉴 틈도 없었다.

좁은 길거리 안에서

병사들의 피와 살이 튀기고 있었다.

 

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건만

이번에도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건가?

 

그렇게 우리의 본대가 점점 허술해지려는 순간,

 

적측이 갑자기 성문을 열어, 기습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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