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89화 - 열쇠를 쥐고 있는 자 -
목이 쉰 목소리가 왕궁의 한 방을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초조 또는 여유가 없었고,
오직 감정 자체가 사라진 것 같은
앙상한 목소리만이 있었다.
"엘디스, 그 놈의 목숨만은
반드시 전쟁터에서 없애야 한다.
반복한다, 항복도 애원도 받아들이지 말고
무조건 죽여야만 한다."
라기아스는 땅바닥에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전령에게 말했다.
전령은 핀에게 경례를 하고,
곧바로 실내에서 뛰쳐나갔다.
엘디스, 엘프의 공주,
그리고 정령의 은총을 받은 자
정말로 귀찮은 존재야
라기아스의 눈동자가 작게 좁아졌다
본래 엘프의 관습에서
정령의 은총을 받은 자를 처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안흔다.
참, 바보 같은 전통이다.
물론 그런 전통 따위,
핀의 위엄으로 얼마든지 짓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라기아스는 그럴 수 없었다.
라기아스는 주름진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곳곳에 많은 나이를 먹은 증거가 보였다.
아무리 엘프가 장수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남은 수명은 기껏해야 수십년 뿐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수명을
백성들의 감정을 건드려, 그에 맞서는 것으로 보낼 수는 없다.
나의 수명은 오직 가자리아를 위한 것이다.
정치란 감정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라기어스라는 노엘프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편에서 관습을 바꾸고,
다른 한편에서 관습을 숭상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해감으로써,
민중에 변혁의 씨앗을 심어 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카딸은 오늘 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야 하낟.
전장에서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비극이다.
사랑스러운 조카를 지키지 못하고
비탄에 잠긴 핀을 모습을 연기만 하면 된다.
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그렇게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핀이시여, 적군의 기세가 강렬해서,
경우에 따라, 돌파될 위험이 있습니다."
집무실에 노크도 하지 않고,
참모가 발을 들여놓았다.
불미스런 행동였지만, 라기아스는 그냥 넘겨 짚었다
"괜찮아, 계속 시간만 끌어라.
그것보다 정문 앞의 돌격을 늦추지 마라
일체의 느슨함 없이, 적의 본대를 짓밟는 거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날 것이다"
적군이 두 편으로 갈라진 시점에서,
방침은 이미 정해졌다.
성문을 열어 수비를 포기하고,
적군을 향해 닥돌한다.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번거로움이 적은 전술이다.
시간과의 승부가 되겠지만,
처음부터 이 내전의 승리는 자기 것이라고,
라기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 나라의 군대가 오기 전에, 승부를 가려야 한다.
도중에 전투를 멈추는 행위는 일절 금지 하겠다"
지금 가자리아라는 나라는
체제가 막 변화한 참이였다.
이제 겨우 인간과 국교를 정식으로 맺을까 하는 도중에,
내전으로 국내가 매우 혼란스럽고,
반란군을 상대로 고전을 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인간들은 우리를 어떤 모습을 볼까...
그렇기 때문에, 재빨리 반란군을 없애버리고
강한 국가라는 모습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여햐 한다.
동시에,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은
핀에 자리에 적합한 통치자 임을 보여주는 증거기도 했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
조금도 늦추지 말고, 적의 심장을 움켜잡는거다
"부대는 성문 앞으로 집결하였나?
적군에 가할 공격 준비는 마무리 되었나?"
전령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적군의 움직임이 수상치 않다고도 보고했다.
흠, 하고 라기아스가 목덜미에 손을 대었다
적군의 별동대가 보이지 않다는 뜻이였다.
적군에도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하지만, 우리도 더 이상의 시간은 없다"
숫자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좁은 길목이라는 변수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어느 점에서도 모두 유리한 위치에 있다.
압도적으로, 재빨리 마무리를 해야한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적군이 무슨 수를 쓸지 모른다.
양날의 칼은 언제까지나 휘두를 수 있는게 아니다.
결단이 필요하다
라기아스는 몇번인가 턱수염을 쓰다듬은 후,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음... 발리안느를 불러라"
*
전쟁터로 변한
왕궁 정면에서 보라색의 섬광이 날아다녔다
튀어나오는 창을 아래로 내리찍으며,
힘껏 팔을 내밀어 그들의 목을 쳤다.
엘프도 인간과 다름없이 피가 빨갛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어깨가 흔들렸다.
미세한 열상과 찰과상, 타박상이
양팔 곳곳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절대로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머리 속으로 다가오는 생각은
패배할 것이라는 절망 뿐인 것이였다.
겉으로보면 양측은 팽팽해 보였지만,
이대로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결말은 안 봐도 뻔했다.
이 쪽은 점점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시작했으며,
사기 또한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진짜 골로 갈 것만 같았다.
아오, 또 나는 무슨 판단을 해버린 것인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한가지 였다.
발리안느가 어디까지 해줄 것인가
라기아스 내의 병사로 잠입하고 있는
발리안느의 존재는 매우 컸다.
그가 요충지에서 적군을 배신하고,
그 기세와 전력을 파열시켜만 준다면,
이쪽 손에 승리가 한 걸음 더 가까워 질것이다.
물론, 나의 뇌피셜이였지만
나의 머리속은 그것만을 기대하며, 나의 사기를 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정면 방향으로
다수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병사를 재편성 한 것일까?
눈을 부릅뜨고 다시 그들을 응시하니,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깜박이고 흔들렸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은빛 갑옷을 입은 무리.
명확한 적의와 살의를 가지고 돌격하는
사나운 군사들이였다.
그 적의는 이미 한 번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 이 가자리아에 처음 들어 섰을 때 말이다.
그리고 그 부대의 지휘관도 그대로였다.
눈빛을 강화하고, 자신감을 온몸에 불어일으킨 엘프
발리안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