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5장 가자리아 내전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101화 - 시궁쥐 이야기 -

개성공단 2020. 3. 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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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술로 적을 방심케 하다니

정말 대단한 전략이구나 조카야"

 

그건 비웃는 말투가 아닌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한 말투였다

라기아스의 목소리는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그 태도가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뭐, 이것 외엔 생각이 안 떠오르더 군요

그런데 당신은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시내요?"

 

사실 환영술 전략은 나의 생각이 아닌,

엘디스가 돌발적으로 행했던 것이였다

 

물론 그 덕분에 

나는 지하도에서 시체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튼, 어딘지 여유가 없어 보이는 나와 다르게

라기아스는 어디까지나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설마 어딘가에 비장의 카드를 숨기고 있다는 건가?

 

"...숙부님, 하나만 질문하겠습니다"

 

"이렇게 만난 게 몇년만인가 조카여.

그래, 나는 이미 패자다.

물어 볼 것이 있다면, 마음껏 물어 보거라"

 

작심한 듯 말을 흘린 엘디스와

그 자리에 주저 앉은 라기아스가 

몇 마디의 말을 주고 받았다.

그것은 심히 가냘픈 목소리였기에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작은아버지와 조카딸의 대화는 곧 끝났다

엘디스는 눈을 돌리며, 나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끝났어, 이제 됐어 루기스"

 

환영인채로 내 옆에 서있는 

엘디스의 목소리가 울러퍼졌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었다

엘디스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핀의 자리를 빼앗기도 했으며,

나를 오랜 세월 동안 탑에 가둔 그 삼촌이

바로 자신 앞에 있었으니 말이였다.

 

그녀는 표정 자체는 평정을 추스르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전혀 다를 것이다.

가능했다면 라기아스의 목을 졸랐을지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서

늙은 엘프의 앞에 섰다

 

"핀 라기어스, 이 이름임에 틀림없나?

 

"허허, 그래 내가 라기아스다"

 

늙은 엘프는 빛을 잃지 않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너는 조카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루기스라는 영웅인가?"

 

"아, 이름은 맞긴 한데.

영웅은 아니고 그냥 시궁쥐에요

영웅이라면 모 해적 만화처럼

너 내 동료가 되어라 하면서

당신을 동료로 삼았을 지도?"

 

마음속 깊이 그렇게 생각했다.

과거의 강대한 적을 자기편으로 삼는 것은,

영웅의 클리셰가 아니였던가

 

나같은 비루한 존재에게는

그런 일을 할 수 잇을리가 없었다

그런 무사태평한 너그러움은 이 몸 어디에도

매달려 있지 않았다

 

말을 내뱉은 다음

왼손으로 꽉 움켜진 보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칼날을 앞에 두면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늙은 엘프를 표적으로 삼아, 명확한 살의를 둘렀다

 

지금부터 이 영웅을 죽인다

 

그 광경을 두고 라기아스가 불쑥 중얼거렸다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말아라, 꼬맹아"

 

나도 모르게 그 말에 눈동자를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는 어딘가 유쾌한 듯 말을 놀리던 

엘프는 상당히 어조가 변화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어딘가 굳어진 듯한,

본래 있던 소리의 무게를 되찾은 듯한 말투였다.

 

"그냥 바보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한테 존경심까지 들 정도다"

 

이 엘프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그냥 이 칼날을 내리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가자리아의 전쟁도, 엘디스와의 인연도,

이 눈 앞의 늙은 엘프의 목숨도 말이다

 

"자각이 없는 건가?

인간 루기스여"

 

담담한 라기아스의 말이 지하도에 울렸다

눈앞에 있는 검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실로 느긋한 어조 였다.

 

"루기스, 네놈은 이 나를 몰아세웠고,

지금은 나의 목숨을 없애려하고 있다

그런 네놈이, 스스로를 시궁쥐라고 비하한다는 거냐?

다시 말하지만, 나를 바보취급하지 말거라"

 

그것은 틀림없이 조용히 분노를 포함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떤 욕설이나 잡언이 날라올 줄 알았건만,

너무나도 예상 외의 말이 였기 때문이였다.

 

"나는 한번도 평범한 엘프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잘 봐라, 가자리아의 찬탈자이자

엘프라는 전통을 짓밟으려고 하는 대악당이 바로 나다

그리고 이 나를, 지금 네가 넘어서려는 것이다."

 

젠장, 이 틀딱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들을 필요가 없는데...

 

"네놈의 방패막이가 된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네가 승리해 온 상대들도 마찬가지야

전부 네가 발판으로 삼아왔기에, 여기에 온것이다

알겠냐? 루기스, 나의 원수여

네놈은 더 이상 시궁쥐 같은 신분이 아니야"

 

라기아스는 지금 죽어도

할 말은 다 하겠다는 그런 심정 같았다

 

심장이 흔들렸다

약간의 긴장과 흥분에 가까운 무언가가

혈류가 되어서 온 몸을 감도는게 느껴졌다

 

"꽤나, 높이 사주는 군

하지만 보잘것없는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내 말에 라기아스가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매력을 느끼게 하는 웃음이엿다

 

"너의 안에 있는 시궁쥐를 죽이고,

나를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라

그것이 영웅, 그리고 승자의 의무다"

 

영웅이라...

나를 그렇게 부르다니

 

진정한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라기아스가

어디를 봐도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나를 가리켜

영웅이라고 불렀단 말인가

 

어떻게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기에

나는 감정을 죽이며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두겠다

엘프의 왕 핀 라기어스

언젠가 또 한번 만나자고"

 

"하하, 나도 그러면 좋겠다

루기스, 나의 원수, 그리고 위대한 인간의 영웅"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후

나의 왼팔은 늙은 엘프를 향해

지체없이 압박을 가했다

 

지하도에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

 

 

 

 

가자리아의 찬탈자 핀 라기아스의 죽음

 

그의 죽음으로 종말을 맞은 것은 의외로 드물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하여

역사는 새로운 분기점으로 스며들었다

 

가자리아의 내전이 마지막을 맞이했지만,

이것은 다음 대전에서의 잠깐의 휴식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하나 끝은 다음 시작에 대한 발판이니까

 

뭐, 라기아스의 죽음으로

확실하게 끝난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한 시궁쥐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다는, 단지 그것뿐 이였다

 

 

 

 

제 5 장 「가자리아 내전」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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