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8장 악덕 왕국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08화 - 영웅담 -

개성공단 2020. 4. 2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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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햇빛이 서니오 평야를 핱아갔다

평야의 중심부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기의 그림자가 살짝 뻗쳤다

 

"영웅이란 건 이야기 속에서나 볼 수 있는거야

그건 네가 누구 보다도 잘 알잖냐, 루기스"

 

리처드 할아범은 하얀 턱수염을 만지며 가볍게 말했다

나는 그저 표정이 굳어진 채로 그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할아범은 반복하듯, 영웅도, 용사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바람결에 태우듯 말했다

 

뭘, 새삼스럽게, 틀린 말은 아니지

 

세상에 모든 것을 구원할 영웅이란 있을리 없고,

운명을 뒤바꿀 만한 용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역사의 산물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기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울음소리를 내고

박해받고 돌을 맞은 여자는 성자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노리개가 된다

 

"네가 뒷골목에서 굶어죽을 뻔 했을때, 누가 도와줬지?

어느 누가 너에게 손을 내밀었던 적이 있었느냐?

그래, 너의 친구들은 몇 명이나 살아남았지?"

 

젠장할, 이 할아범 듣기 싫은 소리만 남발하는군

분명 친구라는건 고아원 때 아이들을 말하는 거겠지

대부분 죽었지만, 오히려 죽는게 나을 수도 있다

 

남자라면, 운이 좋으면 모험자나 용병이 되어

검에 베어서 죽었을 테고

운이 나쁘면, 노예가 되어, 주인에게 머리를 맞아 죽든지

탈주하다가 굶어죽든지, 잡혀서 죽든지의 결과가 날 것이다

 

여자라면, 미모가 좋다면, 부잣집의 노리개

그 외엔 사창가에서 인생을 보내게 되겠지...

 

어느 것이나 앞날이 창창할리가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래 머물을 바에

그저 빨리 편하게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운이라는 곳

 

운명으로 뽑힌 영웅도, 신의 총애를 받은 용사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는 원망하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곳...

 

이 세상엔 구원도 행복도 분명 존재하지만

빈자에겐 꿈도 꿀 수 없는 곳...

 

이 곳은 그런 장소다

영웅은 그저 동화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

 

나는 엎드리듯 땅을 응시하고 있다가, 시선을 올렸다

위에는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눈이 있었다

그 눈은 일찍히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진지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루기스, 영웅 놀이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에겐 파멸적인 최후만이 있을 뿐이야"

 

그 유혹의 목소리가 귀에 저절로 스며들었다

나는 몇 번이나 눈꺼풀을 깜박이며, 깊은 호흡을 두 번 내쉬었다

 

그리고 묘하게 마른 입술을 흔들면서 할아범에게 말을 돌려주기 위해

나의 목에서 새어나온 목소리가, 유난히 맑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리처드는 귀에 쟁쟁히 들리는 그 목소리에

그의 눈꺼풀에 살짝 쥐가 났다

 

"할아범, 미안해, 카드패를 드러내놓고

이제와서 꼬리를 내린다는 건, 인정할 수 없는 거 같아"

 

그 옛날의 제자가 흘린 말은, 리처드에겐 예상 외의 것이였다

 

리처드는 제자 루기스가 명확하게 햇볕이 드는 곳을 꺼리는 성질,

정식 무대라는 곳을 자연스럽게 기피하고 있다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타고난 것인지, 환경이 만들어 낸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리처드가 루기스라는 존재를

인식했을 때, 이미 그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권유는 설사 거절당했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있을 터였다

 

리처드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매력적으로 들렸고

그의 추임새는 루기스의 마음을 다소 흔들 수 있었다

이제 적군의 우두머리인 상대의 심장에

미혹을 묻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이익이 될 것이다

 

게다가 리처드는 진심으로 

루기스가 자신과 매우 닮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루기스의 대답은 뜻 밖이였다

설령 거절하더라도, 조금만 더 권유 한다면

금방 자신에게 넘어 올것이라고 믿었지만...

 

지금의 루기스의 눈동자와 말투엔

마치 방황이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왠지는 몰라도, 리처드의 흥미를 끌었다

리처드는 어쩌면 자신과 닮은 인간을 

조금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였다

 

리처드는 루기스의 심중을 헤아리듯이 말했다

 

"왜 그러는거야? 영웅이란 칭호가 맘에 드는 거야?

아니면 거기서 아내라도 생긴거야 뭐야?"

 

그 가벼운 말에 루기스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썹을 올렸다

 

"그럴리가 있겠어?

게다가 딱히 문장교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라고

대체로 나 같은건, 사람을 인솔하는 성격도 아니고

칭찬받았다고 해서, 적합하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아

여하튼, 빈민굴에서 자란 시궁쥐니까 말이야"

 

그것은 참다운 말투와 자세였다

언제나 대로의, 루기스의 말투

옛날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 본연의 자세[

 

하지만 리처드에겐 뭔가 살갗이 따끔따금한 느낌이 뭔가 있었다

루기스의 말이 다시 귀를 뚫고 지나갔다

 

"다만, 그런 나 따위를 영웅이라고 불러준 녀석들이

손을 잡으면서 까지,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거야"

 

햇빛이 중천에 떠오르더니

평야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호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겠지"

 

말과 동시에 태양이 마치 루기스의 등 뒤로 올라와

그를 빛나게 하듯이 빛나고 있었다

아침 이슬을 비추는 정경은 묘한 환상적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햇빛 자체가 무슨 탄생을 축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빛났다

 

리처드는 햇빛의 눈부심 때문에, 무심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세상에 영웅이 있을리가 없어... 

세계를 바꿀 구세자도 마찬가지지...

네 말이 맞다면, 내가 그렇게 된 곳에서, 

불평에 오는 녀석은 한 명도 없어야 한다고..."

 

리처드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슬프군, 과거의 제자가 내 손을 물리치다니

너한테는 많은 걸 가르쳐줬을 텐데"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허튼소리였다

엷은 웃음이 리처드의 뺨에 새겨졌다

그것은 언제나 거리에서 지었던 경박한 미소...

뭔가를 바보로 만드는 듯한, 그렇게 웃는 미소였다

 

눈 가장자리에서 햇빛이 빛나고

루기스가 볼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그래, 당신에게 받은 가르침은

오늘까지 나를 살게 해주는 큰 원동력이 되었어"

 

루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할아범, 오늘은 당신과 결별하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넘어서, 예전의 나를 없애기 위해

당신을 만나러 여기에 온거야"

 

리처드는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루기스의 그 말이 겉으로 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온 말이라는 걸 알고 잇었으니까

 

리처드와 루기스, 

두 사람의 얼굴에서 예전의 경박한 미소가 사라졌다

마치 긴장된 공지 속에 있는 것처럼

서로 함께 표정들을 굳히고 있었다

 

"그렇군"

 

리처드가 짧게 대답했다

수 많은 세월이 흘러도 등불을 잃지 않았던 눈이 일그러졌다

그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리처드는 가슴속 깊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여기서 죽어야 해

 

재치도, 자질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죽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큰 화근을 낳게 될거야

 

리처드는 가볍게 올린 것뿐인 오른손을 그대로, 똑바로 떨어뜨렸다

그것은 원래부터 정해져있던 신호였다

 

'피잉'

 

순간 바람을 꿰뚫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나는 날카로운 활 소리

 

서니오 평야에는 키가 큰 들풀이 많았다

그야말로 딱 활과 화살을 숨겨 놓기에

적당한 들풀들이 얼마든지 우거져 있었다

그 들풀들이 마치 스스로 뿜어낸 것이라는 듯

철의 흉기를 루기스를 향해 쏟아붙이고 있었다

 

화살이 하늘을 뒤덮은 소리를 들으면서

리처드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엇다

그것은 무엇도 자기 생각이 잘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그런 미소가 아니였다

 

단지, 루기스가 직전에 어떤 말을 내뱉은 것

 

"할아범, 나도 조금은 현명해졌다고"

 

그 말이 바람을 뒤덮은 순간

 

주위의 하늘이 꿈틀거리며, 마력을 띤 회오리바람과

한 줄기의 은빛 섬광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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