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9장 서니오 전투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19화 - 양쪽의 날개 -

개성공단 2020. 4. 2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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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사람

 

아무리 가도 사람 떼가 무기를 들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노, 공포, 적개심이 뒤섞인 그 색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카리아는 전쟁의 최전선에서 은검을 휘두르며

뺨에 떨어지는 땀을 튕기고 있었다

 

창이, 내장의 맛을 보려는 듯이 뻗어왔다

쇠비늘이 가슴을 할퀴려고, 비 오듯이 다가왔다

어느 한 곳을 찔려도 사람이란 쉽게 죽음에 이르는 생물이였다

전쟁터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엿고

그 이유는 가장 나약한 것이기 때문이였다

 

날마다 저만큼 모여서,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듯리

지상을 활보하고 다니는 인간이

이 전장이라는 공간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죽음을 맞이해 갔다

 

그 모양이 카리아의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더듬었다

그 녀석은 무사하려나

 

"루기스 녀석, 내게 이런 시시한 일을 맡기다니"

 

문장교군 우익의 최전선에서 카리아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왠지 못마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자군의 우익에서 적을 붙들고, 맞아들인다

그것이 카리아에게 주어진 역할이였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정도 잘 해내가고 있었다

병들도 방어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기색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수에 밀리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잘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카리아의 마음 속은 맑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초조함에 이빨만 갈아댈 뿐이였다

 

그 녀석이 부탁하기에 선뜻 받아줬겄만

부탁이라해도, 좀 더 멋있는 것을 하던가...

 

카리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호탕한 솜씨로 장검을 휘둘렀다

힘것 휘두르든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칼끝은 섬세해 보였다

 

은빛검이 공중에 반원을 그리는 순간

적병의 투구와 목이 정겹게 날아갔다

철냄새가 카리아의 콧구멍을 간질였다

 

솔직히 이건 최악이야

어짜피 전장에 나서는 거라면, 루기스와 함께 전장을 나서고 싶단 말이야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그가 저승사자에게 잡히는 순간

어떻게든 빼내오기도 힘들단 말이지

 

그녀는 자군의 중앙에 시선을 두면서

루기스가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하고 안절부절 했다

 

이럴 바에야 억지를 써서라도

그 놈의 곁에 있어야 했는 걸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카리아는 눈꺼풀 뒤의 루기스가

자신에게 간절히 부탁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부탁하다며 청하는 목소리...

 

아, 안돼, 나는 정말 못돼 먹었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부탁을 거절하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어

 

이것을 약함이랑 강함 중에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자부심 때문일까, 집착 때문일까

 

하지만, 녀석에게 내 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적어도 위로와 포상이라는 것을 줬으면 좋다고 생각하는데 말야

 

베르페인에서 자신의 생애를 수중에 넣은 남자에 대해

카리아는 역시 불만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은빛의 검을 다시 휘둘렀다

 

그 검이 전장을 어루만질 때마다, 

대지에 혈액으로 물들고, 병사의 비명이 하늘을 흔들었다

 

 

 

 

*

 

 

 

 

문장교군 좌익 엘프의 군세가

근소하게나마 활을 매고, 정령술을 두른 화살을 쏘아 적병을 관통했다

화살이 피부를 집어삼킬 때마다, 

대성교 병사들은 혼절하면서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령의 굴레가 살갗을 뚫고, 영혼을 파고든 증거

 

정령이란 존재는 엘프에게 가호를 주는 반면

인간에게는 해를 끼치는 일도 많았다

그 몸을 자기 영역에서만 살 수 있도록 저주하거나

아니면 뚜렷한 악의로서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입혔다

정령이란 본래부터 그런 것이였다. 인간에겐 신보다 악마에 가까운 것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는 없겠지

신에게 기도하며, 정령을 멀리한 것은 인간 쪽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령술이 있어도, 거인에게 활을 쏘는 격이군

다소 상처를 입혀도, 엎드리기나 할까?"

 

아까부터 이곳에 가능한 활을 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장은 요동치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이 행위에 의미가 있느지 없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엘디스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이쪽에 적병을 끌어당기지 않으면

그의 길을 막을 수 있었다

 

후위에서 전장을 바라보는 엘디스의 시선이 황야의 중심부를 향했다

깃발이 크게 흔들리며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틀림없이, 루기스는 거기 있다

아직 적군 중턱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더 나아가서 앞으로 칼을 꽂고 있는 걸꺼야

 

그러므로 그 방해를 하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의 기사이고, 나는 그 주인

기사가 주인을 위해 공을 세우고 분발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하지 않는 주인이 어디 있을까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

 

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렇다면 주인은 지켜보면서

그저 약간의 도움 외에는 줄 수 없을 것이다

 

다시금 허공에 엘프의 화살이 날라갔다

그러나 적군은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대성교군은 정말 전장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거인과도 같았다

 

이것을 죽이려면, 역시 그 목을 꺾는 수 밖에 없겠지

엘디스의 벽안이 작게 일그러졌다

 

"엘디스 님, 잠시만 물러나세요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시녀 발레트가 손발을 떨면서, 엘디스에게 목소리를 흘렸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엘디스의 방패막이가 될 것처럼

약간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리와 목소리엔 뚜렷히 겁과 떨림이 보였다

본래 전장에 서는 엘프가 아니였던 것이다

 

엘디스는 조용히 뺨을 무너뜨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내 기사가 전쟁터에 있으니, 

주인으로서 그를 지켜보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느냐"

 

자네는 올라가도 좋아요, 발레트 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다고 시녀는 대답했다

뭐라 고집을 부리는 성격이라고 말해야 할까완고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점에서 이 소녀는 그와 닮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디스는 어깨를 흔들며 생각했다

 

루기스, 게다가 나의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는데

그 주인인 내가 천막 속에 틀여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내게는 책임이 있다. 벽안으로 모든 것을 간수할 책임이 있다

나는 그들의 영혼을 끌어안아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자리아에서 내전을 일으킨 날로부터 변함이 없어다

자기 발로 죽어가는 그들을 짊어질 수 있는 건, 나 뿐이야

 

게다가, 조금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다

 

이쪽은 의도한 대로 적병을 억누르고 있다

그것은 좋다. 이 점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애초에 루기스가 적진에 도착하는 것 조차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지극히 좋은 일이긴 했는데

이쪽의 의도 이상으로 너무 잘나가고 있지 않은가

마치 적까지도, 이것을 미리 알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이 많은 건가, 아니면 적들이 연극을 하는 건가

 

엘디스의 입술이 살짝 무너졌다

 

 

※ 좌익, 우익 이것은 정치 용어가 아닌

익(翼) 날개를 뜻하는 말입니다

오른쪽 날개, 왼쪽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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