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0장 혼란도시 필로스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39화 - 나의 몸은 방패 -

개성공단 2020. 5. 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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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카리아, 내 등을 맡아줄래?"

 

나는 맨 정신으로 아주 하기 부끄러운 그 말을

카리아를 향해 말했다

그 표정은 마치 나를 바라보는 듯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알겠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이 몸은 지금 이때부터 네 방패야, 루기스"

 

그러면서 카리아의 은안이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눈에 박혀 있던 혹박함이라든지

하는 것은, 어떻게든 사라진 것 갗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이번에는 반대로 실로 기학적인 열을 띤,

그야말로 과거 시절에 자주 보던 색이, 눈동자에 떠 있는 기분이였다

 

젠장할, 너무 너무 나쁜 예감이 드는 군

그녀의 작은 입술이 눈앞에서 다시 한번 흔들렸다

 

"그래서, 설마 그 말 하나로 끝은 아니겠지

루기스, 날 혀 하나로 굴릴 수 있을 줄 알았냐?"

 

그리고 순간, 나의 볼을 감싸안는 카리아의 손가락이

명확한 힘이 깃든 감촉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이제부터 내 얼굴을 쥐어짜놓을 것 같은 힘이...

 

나는 이런 명확한 죽음의 감촉에

식은 땀 같은 것이 등골을 핥아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급격이 조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루기스, 나를 다른 여자들처럼 똑같은 선상으로 보지마

나는 네 말 하나로 현혹될 만큼, 달콤한 사람은 아니니까"

 

카리아는 내 온몸을 억지로 의자에 누른 채

차분히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뺨이 씰룩이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아무래도 나는 카리아의 역린을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슴속을 잘못 읽고 있었나 보다

카리아가 나를 안아주고 잇는 것 같은 집착이라는 이름의 진한 감정

그것은 지금 성벽 도시 갈루아마리아에서 느꼇을 무렵 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농밀하게 쌓여져서, 걸쭉해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과거 여정에서 카리아는 이만한 것을 보여준 적이 있었을까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의 방패님은 무엇을 바라시는 건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카리아는 입술을 파도를 치듯이 웃었다

예쁜 선이 볼에 그러져 있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그냥 웃어주는 거라면 오히려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표정뒤에는 무엇보다 혹박하고 기학적인 의지가

갖춰져 있다고 생각하니, 이 여자는 두려운 것이였다

 

아마도 카리아가 요구하는 것은 앞의 문구가 새겨진 계약서나

명확한 형태로 남을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카리아로부터 신용이라는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으니 말이다

 

뭐, 그정도면 되겠지

양피지에 펜을 놀리는 것 정도는

어서 빨리 해치워 버리자구나

그것만으로 카리아가 만족해준다면...

 

그런 생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카리아와 같이 작은 미소를 짓는 순간

 

입안에 뭔가가 들어왔다

가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억지로 입술과 이빨을 밀어젖히고

그대로 나의 목구멍을 관통해갔다

 

시야가 명멸해졌고, 목구멍에서 뭔가가 역류하는 기색이 있었다

 

뭐야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몸이 자극에 반발하려고 해도

카리아에게 짓눌린 나머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오열을 터뜨리며, 어떻게든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보았다

입안에 들이민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카리아의 하얀 손가락

카리아는 기학의 색을 눈에 띄면서

나의 혀와 목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입 안에 쇠 같은 냄새와 맛이 덮어 갔다

그건 영락없는 피의 맛

 

"마셔라, 루기스, 피의 맹세는 오래된 약정 방법이지만

알기도 쉬운 약속이다"

 

마시라고? 뭐... 잠만 네 피를?

 

카리아의 손바닥이 퍼진 상처에서 피가 흘려내렸고

그것이 나의 입 그리고 목구멍으로 억지로 흘러 들어갔다

쇠맛이 싫을 정도로, 혀가 넓어졌다

 

피의 맹세, 분명 구시대에 상류층 집안끼리

사용하던 의식이였을 것이다

 

아직 왕권이 취약해, 온갖 상류층 사람들이 뱀이자 독이던 시절

그럴 때 믿을 만한 인간을 찾는 다는 것은

그야말로 바다에서 작은 배를 찾는 것고 같은 말

숲속에서 나뭇잎 한 장을 찾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끔 누군가와 손을 잡고

등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그럴 때, 귀족들이 사용했던 것이 피의 맹세였다

 

귀족과 그렇게 불리는 인간은 무엇보다 자부심과 피를 중요시했다

그 집착은 서민인 나에게는 이미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끝없이 자신들의 피에서 벗어나

광기라고 생각할 정도로 혈액의 순수함을 추구했다

 

그런 자부심과 피를 중시하는 그들이였기에

이 피의 맹세라는 결속이 성립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약을 하는 자들이 서로에게 피를 주며

이로써 이들은 이제 피를 같이하는 친족에게까지

가까운 혈맹자가 되었다

 

사실 그 약속이 어디가지 유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귀족들 사이에서 신중하게 다뤄졌던, 의식임엔 분명해보였다

 

물론 실제로 의식이 거행될 때는

억지로 상대방의 입에 손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와인 속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던가

하는 것이였겠지만...

 

역시 이 카리아라는 여자는

분명 어딘가에 나사가 빠져 있을 것이다

 

카리아는 내가 몇번이고 목을 울리는 소리에 만족을 했는지

그대로 스르르 손가락을 뽑으며, 움직이미지 말라고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더 이상 저항에 의미가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의자에 체중을 실으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엔 카리아가 내 뺨에 상처를 내며

볼에 피가 흐르도록 가만히 놔두었다

그러고는 그 피를 그녀의 손에 묻히면서

 

"자, 루기스. 네놈은 내가 등을 맡기를 원한다 했고

나는 그 말을 받았다. 이것은 주종간 체결된 계약이다"

 

카리아는 내 귓가에 속삭이며

나의 피를 자신의 혀에다가 넣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생각하자니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앞으로 네놈이 계약을 맺었음에도

지금까지와 같이 혼자서 어딘가로 사라진다면

그곳이 땅끝이더리도, 반드시 네놈을 찾아내서

두 번 다시 혼자서는 나돌아다닐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마"

 

잠시 후 카리아의 입김이 볼에서 살며시 떨어져 나갔다

몸에서 무게가 사라지고 나서야

사지가 풀린 것 같은 기색이 역력했다

 

눈꺼풀을 뜨자, 카리아는 질리지도 않는 건지

나의 몸을 가까이서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천막에 들어왔을 때에 비하면

꽤 부드러운 것

 

그녀의 작은 입술이 눈 앞에서 열렸다

 

"루기스, 나는 네놈의 방패, 절대로 놓치지 마라

놓치는 순간, 주인을 잡아 먹어 버릴테니까"

 

카리아는 농담조로 그렇게 말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은빛 눈이

즐거운 듯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 뭐랄까 본질적인 곳은 변하지 않는 구나

이 여자는...

 

"떨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써주길 바라는구나, 카리아"

 

나는 카리아에게 맞추듯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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