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05화 - 작은 거인 -
카리아는 자신의 몸이 한없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바로 방금전까지만 해도 애검이 부서지고 그 의지마저 쓰러졌을텐데.
만신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이 신체는,
자신이 말하는 것 따위 조각만큼도 듣지 않았엇는데 말이다
그게 지금은 어떤가. 단 한사람,
마음 속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눈동자는 선명한 시야를 되찾고,
손끝은 열정적으로이 움직이고 있었다.
참으로 노골적으로 차이가 나는 법이라고,
카리아는 스스로에게 질린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도, 방금전까지의 차게 식은 힘없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뜨겁고, 자신을 몸을 흥분시키는 것이였다
은색눈을 부릅뜨며 앞을, 향했다. 발끝의 떨림은 어느샌가 멎어있었다.
눈 앞에선 아르티우스가 금발을 나부끼며,
또 한걸음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신에 주어진 압력은, 지금 당장이라도 피부를 찢어발길 것만 같았고
그녀는 마른 침을 소리가 안날 정도로 작게 삼켰다.
신령의 입술이, 물결쳤다.
"기사가 영웅이 됬다고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사랑하는 자식이 악의에 물들었다고 한탄해야 할까?"
그것은 정말,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목소리.
적어도 이 상황에 이 자리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였다.
왠지 무게감이 떨어진 그 음색은 물론이고 말이다
카리아는 입술을 열면서, 답한다.
"네놈이 어떠한 것으로 부르든지 나는 상관없다
진정 나를 아는 자는 단 한 사람 뿐이니까"
그것은 카리아가 생각하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본심.
물론, 허영심이 없다곤 말할 수 없었다.
찬사를 받고 싶다는 욕심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단 한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은 그 외에 모든 것을 짓밟아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카리아의 마음은 짜릿하면서도
달콤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은색 눈동자에는 조각만큼의 망설임도 없고,
알갱이 크기의 흙도 없었다.
단지 바로 앞의 황금을 꿰뚫고 있었을 뿐.
아르티우스는 카리아의 말과 시선을 받아들이며,
일순 상냥한 미소를 떠올리면서도 눈이 흔들었다.
그리고 한박자를 쉬고 나서, 말했다.
또 한걸음, 그 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훌륭하구나. 역시, 너는 내가 한눈에 반한 영웅 카리아 버드닉이다"
압도적인 위엄을 가지고서 전해지는, 그 말.
찬사를 받았음에도, 카리아는 물리적으로 심장을 꽉 쥐어지는 듯한
감촉마저 느낄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자,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하고 카리아는 손끝을 가볍게 튕겼다.
그녀도 그럴게 아무리 기세 좋게 열을 토내해도,
상황이 딱히 나아진 것도 아니였다.
자신의 애검은 산산조각나 수중엔 가진게 없었고.
그리고 루기스는 서있는게 기적일 정도의 상태였다.
상황이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등을 보이며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가슴에 품은 채로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 카리아를 막은 것은,
루기스의 팔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뜨는 카리아에게, 루기스는 평소와 같은 음색으로, 말한다.
"카리아, 여기에 가만히 있어줘"
그 말과, 동시에 공기가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카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신전 속, 황금과 보라빛은 서로 물어뜯으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공간을 장악하기 위해 준동하는 황금실 무리와
그 목을 떨쳐내는 보라빛의 일격.
그저 그것만이 공간에 있었다.
아르티우스가 발사하는 명주실처럼 보이는 황금은
마치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듯이 넘실거리며,
여러 가닥이 루기스, 그리고 카리아의 몸까지 묶어버리기 위해
비명을 질렀다
그 실은 얼핏 보기엔, 가느다랗고 한숨만 내쉬어도 날아가 버릴 것 같았고.
솔직히 사람을 해칠만한 것으론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본질은 겉모습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있었다.
카리아는 입술 끝을 살짝 깨물었다.
저건, 사람을 치명적으로 파괴하는 무언가일 것이다.
사람의 몸뚱아리, 그리고 영혼까지도.
그 전부를 파괴해 백지로 만들어버리는 무언가 말이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있게 하는 것을 빼앗아버리는 마성 그 자체.
그것이 몇가닥이나, 허공을 가르며 육박해온다.
그것은 틀림없는 공포.
전장에서 창을 앞에 두고 싸우는 것과는 또 달랐다.
자신의 심장이 꿰뚫려 죽음이 임박하는 공포가 아닌,
자신의 근본이 사라져버린다는 파멸의 공포.
아아, 무심코 손끝조차 부들부들 떨릴 것 같은 광경이다.
카리아는 크게 목을 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같은 공포를 루기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단 한번의 실수로, 자신이 골로 가버릴 수 있는 광경을,
그 눈동자 안에 새길 것임에 틀림없었다.
카리아는 은색눈을 크게 뜨며,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신체 기관은 아직도 딱딱하고 무거웠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 녀석은 이렇게 진지하게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일까?
언제 손발이 마비를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도 이상할 게 없다.
지척까지 다가오는 거대한 적을 보고 다리가 주저앉아도 이상할 게 없는데.
카리아는 흘러넘치는 초조함과 타오르는 듯한 분노가
머리를 지배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그의 옆에 서고,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고 말해놓고서,
검 하나 잃은 걸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그에게 지켜지기만 하는 추한 모습이라니...
숨을 내쉬고 은색눈을 가늘게 떴다.
위험한 짓을 하지말라고 당부해놓고서,
지금은 자신이 위기에서 보호받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야. 어처구니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카리아는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며, 어깨를 떨며, 중얼거렸다.
분해.
자신의 목소리만이 아닌, 무언가 다른 목소리가 겹치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대신전으로부터 단절된 그곳.
하늘 높이 끝없이 푸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
거인의 권능에 의해 만들어진 그 이계가,
지금 소리를 내며 무너지려하고 있었다.
허공엔 갑작스럽게 검은 균열이 스스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코웃음 치듯 소리를 내며 파괴되어 버렸다.
기묘하고도,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공간이 유리처럼 산산조각나고, 그 몸을 깎아갔다.
도저히 기분 좋은 광경이라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파괴는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이계가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권능의 소유자가 그 손에 쥐고 있던 세계를 포기했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거대한 세계 하나가 죽음에 이르는 그 참상은 처참하다.
머리를 부서져 흩어진 거인은 태산이 무너질듯한 굉음을 내며 절규하고,
본래 이미 썩어 문드러져 존재할리 없는 그 거구가
이계를 관짝 삼아 무너뜨려갔다.
더이상 서있지도 못할 것이다.
거인이란 본래 쓰러지지 않는 자.
그것이 한번 땅에 엎드리면 두번 다시 일어설 수 없다.
그렇기에 이 거인의 본체는 옆으로 누운 자세로 잠든 채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숙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 환상은,
어차피 의식체에 지나지 않았다.
영원하다고도 생각될 세월을 거쳐서 만들어진 환상.
눈 깜빡하면 사라져버릴 덧없음...
거인의 시조 프리슬라트의 옛 위광을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
환상이 천천히 그 모습이 흔들리며 그 존재가 희미해졌다.
그건 다시금 그 의식이 잠에 들려고 하고 있다는 증거임에 틀림없었다.
프리슬라트는 쓰러지면서, 공기를 비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하다...
다시금 거인은 한 명의 황금 아래서 그 강대한 몸을 꿇어엎드려야만 했다.
상대가 일부러 자신의 영역으로 뛰어들어왔는데도 말이다.
본 기억이 있다.
이 굴욕과 패배도 옛 기억속에 있었다.
덩치도 자신에 비해 한없이 작으면서도 나를 땅을 엎드리게 한
여자의 이름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인간들을 이끄는 자, 아르티우스,
그 증오스러운 이름에 저주가 함께하리라고 외치며,
모든 동족은 목숨을 잃었다.
거인의 시조로 불리는 자신조차,
이 몸을 땅에 처박은채 평생을 영면 속에서 지내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금 자신은
이 거대한 체구를 썩어문들어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저 마성은, 유유한 발걸음으로 자신을 질책했다.
수천년에 걸쳐 겨우 만들어낸 의식도, 이제 곧 끊기겠지.
분하다. 자신은 이보다 더한 굴욕도 분노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힘을 숭상하는 거인이 같은 자에게 또다시 패배해 버리다니...
소리라고도, 목소리라고도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거인은 울부짖었다.
아아, 이대로 다시 끝없는 굴욕 속에 세상의 양분으로 축적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하게 쓰러질 뿐이라면
거인은 거의 망가져가던 눈을 떴다.
시야 끝에 그림자가 보이고, 그곳에 한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모든 힘을 쥐어짜서, 입을 열었다.
"아르티우스와 맞서는 자여
그리고 우리 하나뿐인 작은 동족이여
지금 너를 거인으로 인정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