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3장 대재해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23화 - 신망을 그 등에 -

개성공단 2020. 5. 1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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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는 없습니다, 루기스 님"

 

 

내뱉는 듯한 기세로 그렇게 말하며, 

베스타리누 게르아는 무거운 전쟁도끼를 어깨를 둘렀다. 

원래라면 다루기 어려운 전투 도끼를 가볍게 휘두르는 것은 

나날이 거듭한 수련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라면 떨림 하나 보이지 않을 베스타리누의 손가락끝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묘하게 초조함을 품고 있었다.
뜨거운 한숨이 찬 하늘 아래를 달려가 그대로 공기중으로 사라져 갔다.

 

베스타리누는 심장이 묘하게 사납게 뛰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왜 그래? 다른 방법이라도 떠오른 거야?

그렇다면 나도 한번 들어보자구"


루기스가 말한 것은, 장난으로 질문한게 아닌, 순수한 의문이였다


이곳에서 저것을 상대하는 데, 시간을 허비해버리면

간수들이 창을 들고 이곳으로 달려들 것이고, 

그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잇었다


시간이란 녀석은, 지금 이 순간에는 우리들의 적일 뿐이다

 

그 증거가 눈 앞에 있었다. 

복도에 있는 뿔 달린 마인은, 호전적인 듯 버티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발을 내딛을 듯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기한채로, 큰 아가리로 이쪽을 씹어부수려는 듯 했다.
아마도 시간낭비를 견디지 못한 사냥감이 

스스로 입안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같이 생겼으면서도 그런 추악한 건방짐은 바로 마인의 본질


하지만 베스타리누는, 

딱히 루기스에 대한 대항심에서 그 계획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결코 악의로 가득찬 계획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떤 멍청한 전략이라 할지라도, 

이곳에서 다같이 발목이 잡이는 것보단은 훨씬 낳을 것이다. 


하지만, 베스타리누는 루기스의 요청에 도저히 응할 수 없었다. 

그저 발이 도저히,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아닙니다... 안 하는게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루기스 님..."

 

내뱉어진 그 말은, 베스타리누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떨리는 모습이었다.
설마 자신의 입술에서 이런 나약한 목소리가 나오다니

한심한 것도 정도가 있지


순간, 베스타리누의 머리카락이 날카롭게 서고, 

폐 주위에 뜨거운 감정이 몰려들어왔다
그것을 분노라 불러야할지, 자책이라 불러야할지는 모르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스타리누의 두 다리는 얼어붙은 채.  

밤하늘에 노출된 쇳덩이처럼 보였다.
너무하군, 이런 추태는 보이기 싫었는데 말이야


아무리 다리를 움직이려고 발버둥쳐도 

그 때마다 공포라는 악마가 다리에 매달려 놓아주지 않았.


그렇다, 공포... 

베스타리누는 넘쳐나는 공포심을 느끼면서, 지금 이 자리에 서있었다.

 

그녀가 두려워 하는 것은 눈 앞의 용맹스러운 마성은 아이였고

혹은 피를 토해내는 것이나, 자신의 몸이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도 아니였다

 

두려운 것은 단 한가지 뿐...

루기스가 자신을 버리지 않고 있어줄까 하는 것

 

자신이 혼자 앞으로 돌진한다는 것은, 

배후에 있는 루기스를 믿고 나아간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루기스가 자신을 버린다면, 그 시점에서 목숨은 다하고 말 것이다.

 

베스타리누는 무심코, 자신의 가슴 속에 묻고 그리고 생각했다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배신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회의심이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머리로는 깨닫고 있었다

루기스라는 인간은 경박하긴 하지만, 비열한 성질은 갖고 있진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편하자고 남의 뒤통수를 치는 것보다, 

묘하게 집착해가며 정면에서 온갖 고생을 떠맡는 성격일 것이다.


그런 삶을 어리석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경멸한 적은 없다. 

분명 언니도, 그런 인간이 상대니까 마음을 허락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모르고 하는 말이십니까

당신이 저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그래요, 이것 때문 입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온다.

 

한때 베스타리누 게르아라는 여자에게, 인생은 멋진 것이었다.


명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훌륭한 아버지를 두고

베르페인이라는 도시를 위해 인생을 바쳐왔다

 

이것은 베스타리누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전부이며 행복이였다

곧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며, 베르페인의 성공을 기원하며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왔던 것이다

 

자신에겐 너무나 무거운 전쟁도끼를 필사적으로 끌어당기며,  

뼈가 갈리는 훈련을 견뎌낸 것도 

먹고 자는 시간까지 깎으며 명문가로서의 교양을

열심히 머릿속에 집어 넣었던 것도


사실은 전혀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분방한 용병들을 규합해 강철 공주라는 칭호까지 가슴에 장식한 것도.

 

모두 베르페인, 그리고 아버지 모르도 곤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거짓말이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애정의 전부가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 지도 못하고,
부친을 죽인 가짜 부모 모르도 곤을 십수년 이상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 허위는 언니와 루기스에 의해 들통나 

베스타리누는 진실을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렸다.

 

새로운 길을 걷기위해 베스타리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는 단지 베르페인을 위해 몸을 바치는 것 밖에 알 수 없었다

 

어리석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여자란 말인가 하고 

베스타리누는 자신을 비웃었다.  

이제 자신은 어수선한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분명 언니의 손을 계속 붙잡는 것도, 나에겐 그것 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제발 날 버리지 말아줘. 제발 날 배신하지 말아줘.  

이번에야말로 진짜, 모든 게 없어져버릴테니끼

 

그 날로부터, 베스타리누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두렵려웠다. 

배신이라는 행위가, 배신당하는 행위가. 

사실상 언니 이외의 모든 것이 추악한 의혹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것은 평소엔 이성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인간답게 있기 위해, 다소 신용한다는 것을 보이려 노력하기 위해서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전혀 타인을 신용 따위 하고 있지 않았다.


강철공주로서의 행보를 보인 것은,  

다른 이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약한 자신을 들키지 않고, 쉽게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서...

 

용병들을 감옥 밖에 대기시키고 루기스와 행동을 함께 한 것은,  

용병들로부터 눈이 닿지 않은 곳에서 

그에게 배신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다.


베스타리누의 머리는, 타인에게서 내쳐지는 것에 무엇보다 전율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압박당하는 듯한 감각조차 일어나는 것이였다.

 

이젠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좋을까. 

그런 정상적인 판단조차 베스타리누에겐 이제 없었다.

 

그러니까, 베스타리누는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반대편으로 건너는 순간, 루기스가 적의 손을 잡아버린다면.  

뒤에서 그 검으로 내게 달려든다면.

 

그런 말도 안되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신에서 튀어올라, 베스타리누의 발을 옭아맸다.

 

강철공주라는, 어쩜 이리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다 있는지,  

베스타리누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 날 이래,  자신은 쇠로 가득한 갑옷 안에서 덜덜 떨면서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을까, 배신당하진 않을까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비웃고 싶으면, 마음껏 비웃어도 됀다고, 

베스타리누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 중얼거림이 루기스에게 들렸는지 어떤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수초가, 지났다.  

베스타리누는 움직이지 못하고, 루기스 또한 

베스타리누의 말을 잠자코 들으며 몸을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인만이, 깊은 미소와 같은 것을 지으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갸아아앙'


그 정적을 깬 것은 루기스의 손가락 끝이였다


그 닳고 각진 긴 손가락이 허리 부분의 검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보검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백색검을 그 자리에서 뽑아 들었다.


장식 하나 없는 검은 얼핏 보기에 담백한 인상마저 ㅈ었다.
이름도 보이지 않고, 주위에 나타나는 위력은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루기스는 보검을 집어넣으면서, 입을 열었다.


"...안심했어, 내 주위엔 인간과는 동 떨어진 녀석들 뿐이라

그런 인간다운 말을 들을 수 있어서 말이야"

 

볼을 풀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미소를 짓는 루기스는 

베스타리누 팔에 보검을 칼집째 던져 보였다.


베스타리누는 무심코 눈을 명멸시킨 채 그것을 받아들었다.
손에 쥔 순간 보검에서는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칼집에서 무언가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와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베스타리누는 루기스의 허리춤에서 떨어진 보검을 처음 보았다.


그야말로, 서로 철석 달라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원래 무기와 무기의 주인은 그런 것이였다

특히 전장에 육체를 뉘게 하여, 마음조차 검투 속에 두는 자는

자신의 무기와 거리를 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게 자신의 목숨을 잃는 행위임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근데 그것을, 어째서 나에게?

 

루기스가 한걸음,= 앞으로 나아섰다.

 등에는 후퇴하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혁혁한 위용이 그 발걸음에 숨겨져 있었다.

 

마성이 그 행동에 반응하는 것처럼 움직였고

루기스는 흰색의 대검을 허공에 빛내며, 등 너머로 말했다


"누가 비웃겠어? 두려워하는 자는 제 발로 서 본적이 없는 녀석들 뿐이야

잘 들어 베스타리누, 네 검을 맡기겠어

내 목숨보다 소중한 거야, 소중하게 다뤄 줘"

 

그것은, 무슨 의미로 파악해야 할까,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베스타리누는 혼란한듯이 눈을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다.  

손끝이 지독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루기스는 더 이상 움직임을 멈추는 일 없이, 백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굉음을 내며 마성을 짓눌러 파괴하는 위세를 떨쳤다


그가 마성에게 일격을 날렸으니, 마성 또한 그에게 향할 것이다

 

그렇다면 복도를 건널 수 있는 것은, 이 순간 뿐


무의식 중에 베스타리누의 강철보다 더 무거웠던 다리는

그저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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