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3장 대재해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50화 - 전갈과 인형 -

개성공단 2020. 5. 2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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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관 제이스 브래켄베리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폐에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 눈앞의 여자를 보았다.

 


자연스럽게, 올리비아 베르티의 부드럽게 말아진 머리카락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녀는 차분하면서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무심코 브래켄베리는 눈썹을 들었다.


아직 젊은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그러한 풋풋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른스럽다, 라는 말과는 또 달랐다. 

어느쪽이냐 하면, 세련된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묘하게 장소에 익숙한 듯한, 그런 분위기가 그녀에겐 있었다. 

그만한 경험을 쌓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인간인걸까. 

적어도 그녀의 부친과 만났을 적에는, 

이러한 인상을 받지 못했던 건 분명했다.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올리비아의 입술이 열렸다.


"귀중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래켄베리 호국관, 어떻게 해서든 말씀드릴 내용이 있어서요"


절도 있게 말을 내뱉는 올리비아에게, 

브래켄베리는 가볍게 턱을 당기며 대답했다.


그의 하얀 얼굴에는 감정이란 것이 조금도 보이지 않않다. 

가슴 속에 있는 초조함이나 짜증스러움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끝이 조금 들썩였다. 

정신이 민감해진 것 같은 기색을, 브래켄베리는 느꼈다.


"상관없소, 하지만 시간은 없소

무례하고 미안하지만, 용건만 간단히 말하시오

분명 경이 몸소 발걸음을 옮길 만한 일이였겠지"

 

음색이나 태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브래켄베리의 머릿속에는 명확한 경계심이 드러나있었다.
그래, 이건 경계다.

 

예리함을 동반한 시선이, 때때로 올리비아의 뺨을 찔렀다.


브래켄베리는 평소, 운명론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무언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불행의 징조라던가 행운의 방문이라고 말하는 점쟁이의 말은, 

그에게 있어선 꺼려야 할 대상이였다

 

군인의 대다수는 운명이 가져오는 행복이나 불행을 믿고 싶어하지만 , 
브래켄베리는 가능한 한 
그러한 것은 멀리하며 살아왔다.


지휘관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꿈 속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이뤄지는 일이 였기 때문이였다


한명의 병사에겐 가족이 있고, 부모자식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였다.
지휘관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그들의 명령을 내리는 권한을 얻기에. 남에게 행동이 좌지우지 되는 자는 지휘관 자격이 없을 것이라고

브래켄베리는 믿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러한 징조 같은 것을 브래켄베리는 믿고 싶어졌다.
눈 앞의 여자는, 무언가 안좋은 것을 불러 온다는. 

그런 직감이 있었던 것이다.


가슴속 부근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과거, 정기원에서 합의 때도 그렇다.

조금 브래켄베리가 주장한 안으로 기울여지던 그 자리는,
올리비아의 한마디로 방향이 바뀌어 버렸다


최후의 선언을 내린 것이 왕이라곤 하나, 상황을 바꾼 것은 틀림없이 그녀.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왕의 거처로 향하려고 한 바로 직전의 갑작스런 방문

 

호국관이라도 해도 상급귀족이 직접 방문한다면, 

원하지 않더라도 시간을 할애할 수 밖에 없다.
일개 사제와는 입장이 다른 것이였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거늘. 정말, 타이밍이 나빴다.


그런 브래켄베리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올리비아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입을 열었다

 


"요새 거대 괴수 제브릴리스에 관한 것입니다

호국관에서는 그의 마수에 대한 대응을

최우선으로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감정을 흘리지 않은 채, 브래켄베리는 말했다. 그 눈꺼풀이 조금 깜박였다.


"당연한 일이오, 국난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 귀족은 귀족이 아니며

적을 앞에 두지 않는 자는 군인이 아니니까 말이오"

 

대체 뭘 물으러 온 거지, 

이 여자는 그런 말이 무심코 브래켄베리의 가슴속을 쓰다듬었다.


문장교나 각국에 사신을 보낸 것을 추궁할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고, 

정치적인 주제라고 생각하면 또 그것도 아니였다.
대체 뭣 때문인지 알 수가 없군

 

그녀는 틀림없는 상급귀족. 

그 본인이 움직일 정도라면 그 이유는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베르티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나. 혹은 보다 높은 상위의 것이 관계될 때...

 

브래켄베리의 경계심이 눈에 명확한 색을 띄었다.  

시선 너머로 올비비아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본건에서 손을 떼 주셨으면 합니다

제브릴리스는 틀림없는 대마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성교의 적임이 틀림없기에, 관할을 옮기고 싶습니다"

 


이건 교황 휘하, 게다가 성녀님께서도 바라시는 일이라고, 

올리비아는 말을 이었다.
둥근 눈이, 똑바로 자신을 관통하는 것이 브래켄베리에게 알 수 있었다.

 

한 순간, 잠시 집무실 안에 숨막힐 듯한 공백이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 브래켄베리는 깨달았다

확신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근거가 드는 것도 아니였지만


어떤 사고가 매달리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적이다

여자의 가죽을 쓴 채, 교활한 몰골을 숨기고 있다

 

올리비아가 말하는 대로, 대마란 존재는 대성교가 맡아, 토벌하는 것
구제신 아르티우스가 대마를 멸한 순간부터, 

그 약정은 지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약조에 따르도록 각국을 속박하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성교의 영향을 받는 국가들은 그 교의에 따를 것을 맹세해왔다.  

따라서 약정의 구속력을 발휘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어떻게 그 재해를 앞에 두고 손을 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기미 조차 보이지 않은 대성당에게

 나라의 존망을 맡기란 말인가.

 

대성당의 속셈은 뻔히 보였다. 

이 기회을 틈타 갈라이스트 왕국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하는 거겠지
올리비아도, 대성교의 영향아래에서 이익을 얻는 자. 

그쪽에 붙는 것은 모를 것도 아니였다

 


하지만, 그건 사실상 갈라이스트 귀족이 할 행위가 아니다. 

매국노의 행동인 것이다.

 

브래켄베리는 눈썹을 치켜들며 가볍게 팔꿈치를 폈다.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여러 개의 단어가 쌓이고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한 말을 골랐다.

 


"그건 명목상에 불과하오

경도, 대성당도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없소

교황 휘하 건, 성녀건 말이오

나에게 명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국왕 폐하 뿐이오"

 

브래켄베리는 입술을 크게 벌리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갈라이스트 귀족 올리비아 베르치의 말을 듣긴 했지만

대성당 사신의 말을 들은 기억은 없소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내주려고도 한 적 없소"

 

그러면서 소리를 거의 내지 않은 채, 브래켄베리가 일어섰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라고, 그런 태도를 보이려하고 있었다


시선은 얼어붙을 정도로 딱딱하고 서늘해져, 

뿜어져나오는 분위기는 어디까지나 적의를 띄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조금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는 지금 성녀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계십니다

틀림없이 폐하께서는 승낙하실 겁니다"

 


그런 목소리를 어깨 너머로 들으면서, 브래켄베리는 눈을 일순 부릅떴다.
있을 수 없다. 국왕 되는 인간이, 그러한 판단을 내릴리가 없다.


지금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국가 재난이며, 

국가는 백성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
귀족은 자신의 임무를 다할 책임이 있다.


브래켄베리는 과거 총명했고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덕행을 가지고 있었던 국왕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쇠락했다고는 하나, 

그 왕은 어리석지 않다고 브래켄베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무엇인가 떠도는 것이 있었다

형연할 수 없는 섬뜩한 무언가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그 여자에게 뺏긴 게 아닌가 하는 묘한 예감만이 있었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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