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3장 대재해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58화 - 살을 먹는 자들 -

개성공단 2020. 5. 2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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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닿는 데까지, 꼭 손을 내밀어 보이겠어

 

그렇게 입술을 움직이며, 천천히 필로스의 손을 잡았다.  

매몰차게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손을 뿌려쳐지지도 않고 그 손은 받아들여졌다.

 

그것이 어떤 감정에 한 행동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흔쾌히 승낙해준거라면 기쁘지만, 필로스의 상태를 보건대  

탐탁치는 않지만서도 손을 잡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내가 그녀를 이용했듯이, 나를 이용하려는 심보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옛날 나보다 몇 단은 위일 귀족들을 손바닥으로 굴린 녀석이다

본래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그 정도의 일은 용이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번에 내가 한 일에 대해선

맞고 나가 떨어질 정도로는 당연히 각오하고 몸을 굳히고 있었는데. 

그조차도 해주지 않는다니, 참으로 가차없다.
심장 부근을 죄악감으로 멱살 잡힌 기분이 든다.

 

그녀는 이것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필로스와 시선을 거듭하며, 다시 한 번 말을 흘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시선 끝에서 은발이 흔들렸다

 

"기다려라, 루기스

네놈 아까부터 뭘 멋대로 혀를 굴리는 것이냐"

 

카리아가 아름다운 은안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색깔이 옅은 뺨이 지금만큼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여주는 그 모습은


틀림없다. 

카리아라는 인간이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울분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예전에도 본 적이 없던 정도로...


그 은색 눈동자 속에는, 범상치 않은 감정이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손끝에서 핏기가 일제히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젠장할

이것은 완전히 도를 넘어 버렸어

조금 엉뚱한 짓을 해버린 건가


방금전에 카리아의 말을 잘라낸 것도 한몫한 건지.  

그녀의 말은 그 마디마디에서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간단히 네가 몸을 던져주고 있는데

네놈이 그 등을 내게 맡긴다고 한 것을 잊었느냐

이제와서 그 몸이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마치 사자처럼 사나움을 동반해, 카리아가 긴 속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호흡은 주위를 들끓게 만들 정도의 열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분명 등을 맡긴다고는 했지만. 그거랑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게다가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쥐어짜내겠다고 했을 뿐. 

딱히 몸을 내던지겠다고 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어떻게서든 말을 꺼내려고 한 것과 동시에, 

카리아는 요염함조차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내 입술을 손끝으로 막았다.

 


"뭐냐 루기스, 변명이 있다면 들어주마, 하지만 말조심해라

만약 혈맥교합의 맹세를 저버린다면, 나는 내가 어떻게 할지, 짐작할 수 없어"

 

입술을 한번 닫고,  양손을 가볍게 들면서 카리아와 마주보았다.

은안이 조각만큼의 여유도 보이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썹이 일그러지고 뺨이 찡그려졌다.

 

최악이다

그 은안을 본 순간, 

카리아가 조금도 농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이 녀석은 한다면 말 그대로 하는 여자다

그것은 과거부터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에 대해 분개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 듯 하다.


"맞아, 약속으로 말하자면

루기스, 당신은 꽤 큰 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서도

나는 들은 기억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피에르트는 검은 눈과, 하나로 묶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카리아보다는 냉정한듯이 보였지만, 

목소리의 떨림으로 보아하니 그 안에 깃든 열량은 전혀 바뀌지 않은 듯 했다.


피에르트고 뭐고, 사실 이번 건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이야기 한 기억은 없지만

 

이유라고 하는 것도, 나 자신 또한 이것이

어디까지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랐고

잘 다룰 수 있을지도 불명료 했다

그래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말로 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피에르트의 입술이, 뺨에 아름다운 선을 그려갔다.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화려한 미소.

 

"루기스, 난 당신의 뭐인거야?

그저 단순한 친구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말은 어디까지나 부드럽고, 이쪽을 감싸오는 듯한 기색조차 있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담겨진 
것은 상처하나 없는 완고한 의지. 

일체의 발뺌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이

피에르트는 흑안을 부릅뜨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건 좀 용서해달라고

잊을리가 없지, 피에르트는 공범자님이고 말고

대답과 동시에, 입에는 묘하게 타액이 고여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글쎄, 그렇다면 이상하지

공범자라고 하는 것은, 상담도 없이 

단지 사후보고를 받는 것 뿐인 관계인 걸까?

어떻게 생각해, 루기스? 말을 골라서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 서서히, 냉철함을 띠어갔다. 
이쪽의 도망갈 곳을 조금씩 처내가는, 그런 모습...


알았어, 미안해, 내가 나빴어

땅바닥보다 깊이 반성하고 있어

그러니 더 이상 몰아붙이진 말라고

도망갈 곳도 없으니, 사지를 붙잡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야

 

좀처럼 말을 생각하내지 못한채, 손끝을 움직여댔다.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허공을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필로스 쪽을 향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조금 지원사격이나 분위기를 진정시킬 말을 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나 그러한 말을 해주던 안은 여기에 없었다

 

필로스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하얀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아까 한 말은, 모든 계약을 제쳐두고서

네가 나의 동맹자가 되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데?"

 

필로스는 정면에서 이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과연. 아무래도 내 시선의 의미를 상당히 잘못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니, 그 입술 끝이 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보건대
나에 대한 보복행위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은색과 흑색, 그리고 하얀색의 눈이 내 살을 도려내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내며 침을 삼켰고, 숨을 몰아쉬는 것조차 묘한 저림이 있었다

 

평소라면 가볍게 올라올 말이,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단단히 문을 닫은 채 무엇 하나 반응을 보내오지 않았다.

 

무척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대답하든간에, 측면과 배후에서 뭔가 찔러올 예감이...


등줄기를 땀같은 것이 타고 내리며, 숨이 목을 역류했다

 

침묵을 어떤 의미의 대답으로 받아들인 건지, 

피에르트가 더욱 더 말을 거듭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등으로 쌓여가는 듯 했다.


"게다가, 그녀, 필로스 트레이트의 혈연 건도 그렇고

마수 재해도 그렇고, 루기스, 아직도 내게 뭔가 숨기고 있는 거야?"

 

심장이 뛰었다

숨이 급격히 가빠진 것 같았다

 

피에르트가 꺼낸 말에, 카리아 또한 동의하며 그 턱을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
직 그 가슴 속 깊은 곳에는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듯 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

그걸 뱉어내는데 조각만큼의 주저도 그녀들에겐 없었다.


"예전부터 네놈은 그랬어

신형 마수를 묘하게 알고 있거나

각 도시의 정세에 통달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일반 서민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애당초 그게 사실인지, 네놈이 어떻게 안다는..."

 

물론,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다고 해도 딱히 바뀌는 일은 없지만
그 부분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고, 

카리아는 예리한 미소를 얼굴에 드러낸채 말했다.

 

위험해


볼을 볼룩하게 한 채, 침대에 앉았다

양 손바닥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이젠 도저히 도망갈 곳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참으로, 그녀들다운 압박 방법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내가 허술했다고 해야할까.
아니 둘다 일지도 모르지만


"....잘못했어, 발뺌할 방법은 없군

일이 끝난 뒤, 꼭 원하는대로 청산을 할테니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참아주겠어?"

 

나는 씹는 담배를 품에 넣어둔 채, 입을 움직였다. 

이제서야 쥐어짜낸 말이 이거라니.

말끝을 이리 저리 돌리는 게 내 재주였을 터인데 

까딱 잘못하면 그것마저 잃었을지도 모른다. 


머리에 손을 올리며, 이어서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서 내 출생이라고 했나?

좋아, 마침 지금 여기에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있지"

 

원래는 너무 민망해서, 얼굴조차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인사 정도는 해 두지, 나를 길러준 양부모님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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