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64화 - 결착 -
- 결착
그 검에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번 이름을 바꿧다고 해야 옳다.
손에 쥐는 자에 따라
이름과 모습을 바꾸고 역할을 수행하다가
다시 이름이 없어졌다.
수많은 영웅의 손을 거쳐가며
여러 명에 몸을 새겼다.
때로는 영광 그 자체와
승리를 가리키는 검으로 불렸다.
그 검이 영웅에 손에 닿는 것은
마치 신이 정한 운명 같았다.
그렇게 영웅이 역할을 다했을 때,
그 검은 남 모르게 잠에 들고,
다음 소유자의 품으로 옮겨질 때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검은 지금 무거운 눈동자를 뜨고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신의 이름이
몸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
동시에, 옛날에 마력으로 쓰여졌을 검 자체가,
소유자의 육체에 짜넣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검이였지만,
이런 일을 처음이였다.
- 바라건대
마력에 가까운 자의 목소리가
자신이 눈을 띄게 한 원인 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름이 없으면, 자신은 그냥 무딘 검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손은 펜을 들려는 기미가 안보였고,
세계는 축복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검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인간이 나의 소유자가 될 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인가
자질이 없는 사람은 운명을 비틀지라도, 나를 가질 수 없다.
그럴리가 없다. 그는 나를 깨웠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형태로는 분명히 영웅임에 틀림없다.
이름이 새겨지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소유자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새기면 된다.
본래 그럴 수는 없지만, 이러한 상황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검이 천천히 이 남자의 정보를 수집해갔다.
어떤 인간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길을 택했는지...
만약 이 인간이 소유자에 적합하지 않는다면,
다시 잠에 들면 그만인 것이다.
당연한 소리였다.
자신은 이제 그의 피요, 육신이요, 뼈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루기스, 혈통도 매우 낮은 신분이다.
재주는 평범하며, 영웅이라고 하기엔 강하지 않다.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천천히 정보를 읽던 검이 무심코 의식을 멈춘 것은,
그의 정신성이였다.
뭐랄까...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정신 상태랄까
한번은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굴복했다.
자기를 평범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의지를 선택했다.
흔히 있는 일이야
평범한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나아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잇지
그러나 그는 다시 한계를 넘어서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설령 육신이 찢어지든, 운명이 그 몸을 발길질하든 말이다.
더군다나 성격이 나빠서 제대로 살 수 조차 없는건가
정말이지 바보같은 사나이군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다.
육체는 도저히 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그 정신은 체념이란 단어를 넣지 않은 채,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하는 정신성이야말로
나의 소유자에게 어울린다.
그렇다면 나는 이름을 새기겠다.
검이 비로소 소유자에게 어울리는 형태로
모양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평범하면서도 체념을 답파하고,
영웅의 목으로 손을 뻗으려믄 소유자라면
내 이름은...
*
그것은 엄청난 광경이였다.
왼쪽 손목은 부러지고, 두개의 칼을 상실한 그 남자는
헤르트 스탠리의 시퍼런 칼날에 의해
몸통이 잘리기만 기다릴 뿐이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의 오른손 안에서
주위의 검을 삼키고 나타난 것처럼
하나의 검이 출현했다.
갑자기 나타난 칼은
숨을 삼킬 정도로 아름다운 칼이였다.
은빛 칼날과 짙은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색
헤르트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것을 어찌해야 하는가?
검을 조금 놀리면 한 순간의 시간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 다음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인가?
저 검은 대체 뭔가?
헤르트는 머리속에 혼란스러운 생각만 가득했다.
보라색 빛의 칼은 이쪽을 향해 날라오기 시작했다.
헤르트는 자신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심을 다해 시퍼런 칼을 반짝이며
공간을 베듯이 휘둘렀다.
시퍼런 칼날과 보랏빛 칼날이
공기를 베어가며 맞붙었다.
- 이것은 우리집의 가보야
전설상으로는 신비로움과 기적으로 불렸대
일찍이 들었던, 카리아의 그 말이
뇌 속에서 다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눈을 뜬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자신에 손에 왠 보랏빛 검이 쥐어져 있었고,
그 검은 헤르트의 검을 절단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검은 땅으로 다시 기어 올라서
자신을 지킬 무기가 없어진 헤르트를 향해 도약했다.
순간, 잘 못 봤는지는 몰라도,
그 공격을 받는 헤르트의 뺨이
살짝 미소를 짓고 있던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일격의 종착은 헤르트의 목덜미가 아니라,
그의 왼쪽 눈동자를 도려내는 것이였다.
피가 주위로 솟구치기 시작했고,
나의 손에는 헤르트를 벤 감각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실감한 순간 뇌는 흔들리고,
몸은 고통을 다시 기억한듯, 격통과 피로를 손 끝에 이르게까지 했다.
무심코 이를 악물고 쓰러지는 일만은 면했다.
"신이, 우리에게 운명을 하사하셨다! 전원 돌격!"
이 목소리는 성녀 마티아인가,
방금까지 죽을 것 같은 얼굴이였는데...
헤르트도 저 부상 상태로는 곧바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기에.
위병단 병사에게 어깨를 맡기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나도 더 이상 움직이기에는 무리였다.
아아, 제발 죽지마...
나는 스스로에게 간청했다.
그 순간, 눈동자 끝에서 푸른 빛이 났다.
그것은 위병단 대검의 색깔 이였다.
아아, 또 너 인가
그 집념만큼은 내가 인정해주지
파충류처럼 꿈틀거리는 눈동자에
핏발이 선 도마뱀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