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72화 - 지울 수 없는 기억 -
"어머, 당신 여기 있었나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입은 바짝 말라 대답조차 할 수 없었고,
몸은 얼어 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그 광경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는 지난 세계에서
그 공주의 본성을 몰랐던 무렵이다.
"거슬리는데 사라져주지 않겠어요?"
긴 머리를 흩날린 공주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미 조각이 된 마수의 잔해와
커다란 손톱으로 도려낸 것처럼 난잡하게
파헤쳐진 대지를 뒤로 하고
엘프의 공주님은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피를 뒤집어씬 나는
멈춰있던 머리를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죽는다. 확실히 죽을 뻔 했다.
공주는 주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수를 향한 공격을 해버렸던 것이다
가슴속에 떠오르는 감정은 단 하나,
'공포'..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녀의 힘은 대형 마수를 팔 하나로 잡아
숨도 못쉬게 하는 그런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그녀의 존재 자체...
그녀를 보는 순간, 난 이해해 버렸다.
그녀는 나를 조금도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
아니, 인식한 적 조차 없었다.
그러니 마수를 공격했을 때도,
나를 그저 지나가던 애벌레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 뿐만이 아니라,
아마 그 영웅놈을 제외한 모두에게 그랬을 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얼마간의 대화를 거듭해도,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하등한 생물일 뿐이였다.
그리고 그랬던 그녀가
지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녀의 모습은 예전과는 달랐지만,
얼굴과 목소리만은 틀림없이 지난 세계와 일치했다.
가슴 속에서 공포가 닥쳐와서 그런지,
나는 말 하나 할 수 없었다.
그런 나의 심정을 알아챘는지,
옆에 있던 문장교도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엘디스 님, 저흰 그냥..."
"누구 맘대로 내 이름을 부르는거야?
이 하등한 생물이..."
엘디스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녀는 적의에 가까운 감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분위기 때문에
옆에 있던 숲의 나무도 모두 그 기사를 노려보는 듯 했다.
호위기사는 그런 시선에 짓눌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시 다물고 말았다.
동맹의 교섭 보러온 엘프가
이렇게나 험악하게 대응하다니, 이러면 곤란하다
어쩔 수 없이
아직도 목소리가 나지 않는
목을 억지로 열면서, 말을 뱉었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이름은 부르지 않겠습니다.
서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틈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문장교도인 성녀가 엘프의 왕고
면담을 원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다.
엘디스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어딘지 비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아 왕, 핀 말인가?
이제 그런 것...핀은 한 번 가면을 쓴 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말이야"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핀 이란 엘프가 왕을 가리키는 칭호를 말한다.
왕이 된 자만이 이름에 핀을 붙이는 것을
허락 받는다. 그것은 틀림없는 경의의 표시였다.
하지만 엘디스는 핀을 가리킬 때,
마치 모멸하는 듯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핀은 엘프에게 상징적인 존재이며,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나도 굳이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하지만, 그녀는 핀 따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핀, 즉 엘프의 왕은 그녀의 아버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괴팍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인가?
"게다가 나는 너에게 말했지 않았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에는 분노를 드러낸 것 같은
그런 색의 어두운 빛이 보였다.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의 마음이고 몸이고 할 거 없이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는 생각이 가득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가자리아의 공중정원에 이르면 안된다니까?
너희 인간들은 말이야, 조금 전의 말도 까먹는단 말이야
내가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말해 줬으면,
그걸 알아듣고 지켜야 하는거 아닌가?"
그렇게 그녀는 말을 마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숲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엘프라는 종족은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그들은 다른 종족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언제나 옳은 말은 엘프의 말일 뿐이였다.
그러니 엘디스로서는 그 행동이 지극히 옳은 것이였다.
여러 개의 발굽이 땅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마차보다 앞에 있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멀리 왔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호위기사는 마티아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고삐를 돌려 마차로 향했다.
나는 아직도 의식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서 몇번이나 천천히 깊은 호흡을 해야했다.
장부의 안 쪽이 얼어붙은 듯 단단한 쇠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 감정의 정체는 타오르는 분노도 아닌,
장부를 녹일만한 증오도 아니였다.
모든 생물이 가진 감정의 근원, 공포 였다.
나는 지금도 이 괴물을 무서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