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71화 - 가르침 받은 자 -
검은 피비가 터지면서 마성의 무리들이 사라져갔다
장검이 한 번 휘둘러지는 것만으로도
마의 혈육이 허공을 크게 더렵혔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 같은 광경
피투성이인데도 신성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윈시적이고, 그러면서도 일방적인 학살
가장 순수한 투쟁의 형태
그것을 이루는 것이 마가 아니라
사람이였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했다
저것은 무엇일까?
단지 그만큼의 물음을 가슴에 품고
마체화된 마수들이 날아가버렸다
피가 흩뿌려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부서졌다
아니... 사실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왜 저것이 우리를 해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수 마시카의 안구가 빙 돌았다
눈을 크게 뜨고, 점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정체를 보았다
은발의 인간, 언뜻 보면 단순한 몸집의 소녀
인간이란 힘없이 마수에게 그저 엎드리는 존재인 줄 알았건만
그러나 눈 앞의 인간의 몸 속엔 마성이 박혀 있었다
등줄기가 그대로 얼음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우리보다 훨씬 위대하고.... 훨씬 강인하고... 그리고 거대한...
그.. 그래 거인이야, 결코 쓰러지지 않는 대지의 패자
거대한 마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그렇다면 왜 거인 같은 마성이 자신들을 덮치는 것인가
아무래도 마시카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은빛의 눈이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마시카가 오열을 터뜨리고
피를 토하며, 발을 움직였다
마치 무릎을 꿇고 희망을 가지며 손을 뻗듯이
왜냐고, 그렇게 묻는 듯이 말이다
눈앞의 거인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죽어라, 그것이 네놈의 최상이다"
검은색 피가 마시카의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그곳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 몸의 마수의 시체만이 남아 있었을 뿐
*
"등장할 차례는 고사하고, 대사 하나 못 말한 기분인데"
은발에 뿌려진 마수들의 피를
카리아가 정성스럽게 닦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루기스는 말했다
그 주위에는 마수의 골육이 쌓여 제각각의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없군, 갈채말고는 없겠어
지난날의 여로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무시무시해
지금의 카리아를 평가하기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마수들의 옆구리를 쳤다고 하나
그들을 쉽게 짓누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카리아의 존재 덕분
그녀의 칼은 어느 것 하나 날카로움을 잃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날카로움을 더해가고 있었다
이젠 탈인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한순간 등줄기에 으스스한 것이 지나갔다
이쪽의 시선을 눈치챘느지
카리아는 볼을 느슨하게 하며, 시선을 돌렸다
전쟁터, 그것도 마수의 시체 속에 있는데도 묘하게 아름다운 얼굴이였다
"어떤가? 네가 자랑하는 방패는?
이보다 더 좋은 건 없겠지?"
카리아는 어딘가 도발적으로 말했다
그녀의 은색 눈이 핑그르르 흔들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크게 움츠리고,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내겐 정말 아까울 지경이군
평생 방패막이로 살기엔 어려움이 없을 거야"
루기스는 킁킁거리며 농담조로 말했다
카리아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틀린 답은 아니였던 것 같았다
요즘 아무래도 말 한마디 마다
그녀는 묘한 가시를 돋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욱 말에는 신경을 썼다
아니.. 잠깐
그 점에 관해선 예전이랑 똑같아
그래, 아무것도 변한게 없어
조금 산개한 병사들을 모아놓고 있는 참에
문득 옆에서 피에르트가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시선 끝에는 갈라이스트 병사로 보이는 인간이 몇 명 보였다
먼저 마수들과 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은 그들
마디마디에는 상처가 보였고, 상처 없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엔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문장교에 가자리아, 게다가 갈라이스트 왕국의 귀족 깃발까지
그들의 눈에는 기이한 것임에는 틀림없기에 말이다
음... 솔직히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땐 마티아나 엘디스에게 부탁해야겠지만
그들은 아직 후방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말을 고르지 못하고 있자니
선두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여성이 눈을 치켜 뜨고 말했다
그 표정을 보면 고지식해 보인다고나 할까
딱딱해 보이는 인상이 남았다
"우선은 구원의 감사를 표한다
나는 왕도 구호병단 부관 네이마르 글로리아라고 한다
너희들의 도움로 내 병사들은 목숨을 구했다
...다만, 너희들은 어떤 목적으로 온 것인가?"
문장교, 게다가 가자리아가 갈라이스트 왕국의 영토가 들오더다니
그녀는 알 수 없다고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 시선이 나를 포함해
카리아나 피에르트, 그리고 병사들의 얼굴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 한 마디가 다소 힘겨워 보이는 것은 피로함 때문일까
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일단 나는 형식적인 말을 흘리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어디에 소속된 것도 아니지만, 이름은 루기스다
목적은 단순한 구원이다. 그것말고는 없다"
말과 동시에 네이마르의 얼굴이 어딘가 굳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와 표정을 바꾸지 않으려고
어딘가 애쓰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문득, 한순간 그 표정을 보고 내 안에 묘한 위화감이 싹텄다
뭐라고 할까, 결코 그녀와의 안면은 없을 텐데 말이다
그것을 지워버리기 위해, 말을 이었다
"갈라이스트 왕국 왕도는 함락됐고
급기야 신화시대마냥 대마에 이어 마인까지 대지를 밟았다
이제는 사람끼리 서로 물고늘어질 때가 아닌데 말야?"
그래서 왕도를 구원하러 왔다는 건가?
내 말에 네이마르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 박자 쉬고, 그녀는 조금 전과 다름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말 또한 힘이 있어 보인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명확하다고 할 수 있는 적의가 숨겨져 있었다
"당신들의 정확한 목적은 구호가 아니라...
문장교와 가자리아에 의한 왕도의 실효 지배인 셈이겠지
인류 역사 이래, 실효적 지배를 받은 땅이
남에게 무혈 입성 당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데 말야"
담담한 음색이였다
고지식한 듯하면서도 이쪽의 속마음을 감아오려는 듯한 말투
그 본연의 자세에 뭔가 기억이 날 것만 같았다
아마도 이것은 본래 그녀가 자진 특성이 아닌, 누가 가르쳐 준 것
그렇구나, 위화감이란 그런 거였군
당연한 거야, 나는 볼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네이마르는 내 표정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당신들의 구호엔 감사를 표하겠다
하지만 구호란 것은 이 폭설과 함께 녹아내릴 것이고
그렇게 해서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나를 만만하게 보진 말라, 문장교의 영웅 루기스
나는 당신의 목적을 묻고 있는 것이다"
구호병단의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닫았다
뭐... 그녀 위에 누가 있었고,
누가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었는진
잘 알 것 같았다
하아... 참으로 귀찮은 일을 떠안았군
일단 더 이상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짜피 그것에 의미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나는 지어낸 것이 아닌 본래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찌나 그리운지 뺨이 이완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직 그의 밑에 있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최악의 결과라... 가령 그렇다고 하지, 네이마르 글로리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눈동자 속으로 말을 걸며 말했다
"하지만 마인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단 낫잖아?
대마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멸망당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리처드 할아범도 분명 내 선택을 존중했을걸?"
그 할아범도 황무지는 매우 싫어했으니 말이다
그제서야 네이마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루기스 브릴리간트, 그게 내 임무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