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성 연합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604화 - 포효하는 것은 나의 혈통 - 본문
발레리는 본래 왕국 최북단 스지프 보루의 파수꾼이였다
국경의 성채와 맞닿아 있는 적대자는
의외로 이웃나라의 병사나 산적이 아니였다
어차피 쳐들어오더라도 험준한 산맥에 의해
만들어진 험한 길로부터의 진군은 자살행위였으니 말이다
적은 오히려 인간이 아니라, 마성
산맥에서 솟아나오는 마의 짐승들을 주먹으로 쳐부수고
그들에게 본능을 능가하는 죽음의 공포를
전달하는 것이 발레리에게 부과된 의무였다
그런 마와 가까이 있던 그녀이기에
눈앞의 카리아에서 느끼는 것이 있었으니
두 갈래로 갈라졌던 그녀의 아름다운 은발은
실오라기 하나 잃었는지 지금은 하나가 되어 바람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몇 개를 뺨에 붙이면서
카리아는 작은 입술을 힘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루기스가 왔느냐, 안왔느냐
난 그 두 가지를 물었다"
남김없이 혼돈을 잉태한 은색 눈동자
대지를 준동하게 하느 목소리
넘쳐흐르는 마력의 분류
발레리는 틀림없이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완전한 마성이다
인간으로서의 기색은 이미 방치되어 있다
발레리가 느낀 것은 마력의 강약만이 아니라
본연의 자세 그 자체였다
카리아가 발레리, 로이메츠
다른 인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족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였고
길가의 돌을 쳐다보는 정도의 것이였다
아무리 인간을 싫어하는 사람도
이렇게 무감정하게 인간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너... 버드닉 가문... 아니, 기사 카리아냐?"
당돌한 침입자에
가르라스도 얼마간의 동요를 감추지 못하였다
하지만 발레리보다는 나은 모습이었다
가르라스의 눈꺼풀에는
프리슬라트의 대신전에서의 일막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카리아라는 인간은 거인으로 변모해
루기스에 대해 더없는 집착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 모습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대악의 일이라면, 난 몰라
여기에 와 있는지도 알 수 없지
그래, 아무튼 네 볼일은 그것 뿐이냐?"
"볼일...?"
가르라스는 창을 자연스럽게 카리아에게 겨누고 있었다
한 팔을 다룰 줄 모르는 발레리보다
카리아가 더 위협적이라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것은 아니였다
다만 가슴팍이 압박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은발이 숨을 삼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괴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인으로서의 것이 아니라
그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짐승의 직감이였다
발레리 역시 마찬가지
본래라면 아군이어야 할 카리아로부터
한 걸음 멀어져 간격을 도모했다
그녀의 목이 몇 번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뭔가 일그러진 공간이었다
서로 죽여야 할 발레리와 가르라스가
지금 이 때만큼은 단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심장 소리가, 세게 울렸다
"볼일... 아, 그렇지
사실 루기스에게 볼일이 있었어
응, 그래, 루기스에게만 볼일이 있었어
나는, 네놈들에게는 없어, 어? 하지만..."
카리아가 내뱉는 말은
평소 솔직한 그녀에겐 드문 혼란스러운 것이였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업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두려웠고
순간, 은빛 눈동자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생각났다, 네놈들은 루기스의 적들이였지?"
정말 방금 생각났다는 말투
그대로 카리아는 대검을 치켜올렸다
마치 당연하다는 행동이였고
그녀의 눈동자는 가르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단조롭게 대검을 내려치니
찰나 굉음과 함께 폭풍이 휘몰아쳤고
허공의 공백이 흐느끼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무기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다
뭐라 명칭을 정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거인의 포효
대검이 떨쳐지면서 세계는 암전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지 힘에 맡긴 일격일 뿐
공기가 윙잉거리면서, 대지로 직하했고, 모래먼지가 튕겨나갔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가르라스 또한 보통 인간이 아니였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검붉은 대검을 상대하는 것은 붉은 창의 일격
원래대로라면 결코 맞서서는 안될 일격에
기사 가르라스는 스스로 전진해 창을 들이밀었고
붉은색의 미려한 선이 허공을 찔러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사들이 등을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그러나 동시에 유일한 생존로를 찾은 결과이기도 했다
이 거인의 포효를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도망치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명료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일말의 삶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결과
과연 그 판단이 그를 살렸다
붉은 창은 선을 그리고 미친 포효와 맞물렸다
단순한 힘에 지나지 않았던 그것은
산뜻하게 가루라스의 온몸을 튕겨주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릴 정도의 충격을 가지고
가르라스의 체구는 나무 몇 그루를 쓰러뜨리고 나서야, 땅에 떨어졌다
인간과 같다면 어김없이 절명하는 폭력
결코 비유가 아닌, 카리아란 거인은
이제 자신에게 흐르는 피의 흥분한 대로 힘을 떨치고 있었다
"카리아... 카리아 버드닉
당신 도대체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발레리는 방금 마인을 날려버린 상대를 규탄했다
카리아가 자기 편에 서서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단지 먼저 눈에 띄어
가까웠기 때문에 가르라스가 선택되었을 뿐.
만약 발레리가 가깝다면 주저 없이
카리아는 그녀를 표적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 팔로 자세를 풀지 못한 채 발레리가 물었다
여기서 내가 등을 보였다가는 로이메츠나
다른 사람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 발레리 브리트니스
다만 어느 누구도 내 몸 속에 흐르는 피를 이길 수 없다는 것 뿐"
농밀한 거인의 피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자신의 체내에
현저하게 맥동하고 있음을 카리아는 실감하고 있었다
포효하는 그것은 오만의 극치이며
수없이 많은 것을 이기지 못하는 거인의 피
사도 질루이를 날려버린 그 순간부터일까
이 피에 사고를 맡기면, 훌륭하고 기분 좋은 음색이
들린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 버렸다
그리고 카리아는 생각했다
그는 왜 내 옆에 없을까?
그것은 그가 무심하기 때문일까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가 나를 싫어해서일까
아니면 그가 나를 신뢰하기 때문일까
아니, 모두 틀려
그를 찾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 카리아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썩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그에게 영광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그에게 영광을 돌리면
그만큼 영광에 매달리는 멍청이도 많아진다
그를 방해하는 자도 적도 늘고 마는 것이였다
점점 더 그는 자기 곁에서 멀어질 것이다
상냥한 그는 설사 인류 전부가 상대라도
손을 뻗치는 것을 멈출 수 없으니 말이다
아, 그래서는 안 될 거야
이것은 나와 그가 시작한 모험이야
등장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둘이 있으면 되는 법
그러니까, 그 이외의 적은 멸망시켜 버리자
거만한 거인의 피는 그것을 긍정하고 있었다
적대자의 절대적인 파괴야말로 거인의 정수
이 세상 모든 것이 적일지라도
그 사람만 있으면 별 상관없으니 말이야
은빛 눈동자가 혼탁해지고 있었고
마치 무엇에 사로잡힌 듯 집착만이 영혼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 그 남자는 골치 아픈 일을 떠맡은 것 같군"
"자, 너도 그 녀석의 적이였지?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어"
발레리는 한 손을 움켜쥐며 단숨에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자포자기한 것은 아니였다
눈깜짝할 사이에도 카리아를 파고들 틈을 찾고 있었으니 말이다
발레리는 그녀가 실성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누군가의 간섭이라도 받은 듯 한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위협적이고, 그래서 더 승기가 보였다
일련의 움직임을 보는 한
지금의 카리아는 단지 맹위를 떨칠 뿐
적절하게 힘을 다루기 위한 몸놀림도
적을 죽이기 위한 기술도 모두 잊어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사 가르라스는 단숨에 절명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카리아는 전력으로도 모자란다
순간 발레리는 가르라스가 무너져 내린 나무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힘겹게 움직이는 오른손을 손가락부터 움켜쥐었다
"자, 어디 한번 와 보시지
너한테 죽음을 당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바보짓을 시킬 생각은 없어
혹시 알아? 그런 짜증을 내니까, 그 남자도 도망쳐버린 거야"
발레리에겐 자조도 담은 말이었다
찰나, 살의 덩어리가 뺨을 때렸다
몸을 반쯤 숙인 채 발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 갑옷에 아무리 마력을 쏟아부어도 견딜 수 없는 일격이 오고 있었다
그 포효가 떨쳐진 시점에서 인류에게 멈출 길은 없다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에
거인의 일격이라고 부르는 것이였다
발레리는 왼팔과 마법 갑옷을 버릴 작정이었다
대신 그에 상응하는 희생을 치르고, 한 방을 먹인다면
제정신을 차릴 방법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문득 발레리는 마음속에 있었던 기묘한 공감대를 깨달았다
평소 같으면 카리아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녀는 엉겁결에 뺨을 일그러뜨렸다
옛날의 나와 그녀를 겹치는 것은 분명 잘못일 텐데...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닮은 것 같은 기분이 있었다
그 남자 앞에서는 늠름하게 행동하던 주제에
그의 모습이 없는 곳에서는 이름을 부르며, 쫓아다녔으니
분명 그녀도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마는 성격일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발레리는 역시 자조했다
다음 순간 검붉은 대검이 치켜들리며
발레리의 눈동자를 가늘어지게 했다
한 호흡 안에 죽음과 생이 결정될 영원한 한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양자가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그보다 먼저 그림자에서 기어나온
거인의 포효가 폐촌 전체를 때려눕혔기 때문이였다
그 충격은 누구라도 움직임을 일순간 꿰맬 만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은발의 거인을 진정으로
멈추게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발레리에 대한 살의를 내던진 카리아는 칼조차도 그 자리에 내려놓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루기스?"
그녀는 지독하고 불쾌한 감정이 담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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