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7장 성전 시대 편 (45)
8성 연합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해줘!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신왕국군의 대천막 루기스의 신음과도 비슷한 격앙을 보자 천막에 앉은 피에르트와 엘디스를 포함한 주요 면면 기록관 라이쇼들은 경악과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그는 적은 겉으로 보이는 면으로만 따지면 매우 냉정했다고 할 수 있었다 가슴속으로는 죽음을 애도하고 있어도 고뇌에 휩싸여 있어도 지휘관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 이 날만은 달랐다 "리처드 할아범이 죽다니... 최악이야 오늘은 최악이 날이야... 두 번 다시 오늘이라는 날을 축하하지 않겠어" 심장에 버금가는 것을 빼앗긴 듯한 침통함을 담아 루기스는 말했다 그나마 침착한 모습이었지만, 속으로는 다를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동요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
리처드는 왼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허공에 던져 검은 검으로 쳐쉈다 내용물과 파편이 요란하게 돌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만이 둘의 신호였다 용자가 가진 검정색 검은 이제는 전에 있었던 천둥과 같은 반짝임을 잃었다 그것은 그의 전성이 실종된 증거이자 용자로서의 자격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수많은 마수들을 죽이고, 동료들을 잃고 상전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구한 용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저 한쪽 팔마저 잃고 노경에 이른 장군만이 여기에 있었다 상대는 지금이 전성기인 듯한 영웅 발레리 마법 갑옷이 움직였다 그것은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공기와 소리를 끊고 갑옷이면서 칼날과 다름없는 예리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장검 한 자루를 들고 용사에 도전했던 무모한 소녀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명의 전사..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보자 메드라우트 보루의 함락 직전 화약에 의해 만들어진 요염한 불꽃과 폭발은 성채에 들어온 적병을 쉽게 집어삼켜 고깃덩어리로 바꾸었다 지금은 외벽 부분만 도는 불길도 머지않아 성채 전체를 뒤덮을 것이다 화약이나 기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그것은 다 타버릴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대성교군이 기대고 있었을 식량도 이로써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그들도 강행군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불길이 도는 성채 외벽에서 패군의 장수가 된 리처드는 왼팔로 미개봉 술병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원군은 왕도로 향할 거야, 그걸로 됐어 너도 여기 더 이상 남지 말고, 도망가도록 해" "하지만, 장군" "입닥쳐! 명령이다, 전령하러 가라! 메드라우트는 함락되었고, 나는 죽었다, 그거면 돼!" ..
무너져가는 제브렐리스 외곽을 마녀 바로누스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더 이상 몸이 아니라 유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재빨리 그녀는 파악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주위의 마수처럼 당황하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솟구친 감정은 경악과 망연 저 정령신이 죽어간다... 저 대마가 죽어간다... 자신은 물론 위대했던 최초의 인간왕 메디크조차도 승리할 수 없었던 존재 그것의 죽음이 바로누스의 시야에 비쳐졌다 천년 전과는 상황도 환경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붕괴해 소멸해 가는 제브렐리스의 신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녀의 외곽은 신앙 그 자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였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제브렐리스의 몸은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그녀가 대륙에 남긴 상흔 이..
요새 거수가 무너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세계에서 소리가 사라졌고 시간의 흐름마저도 색깔을 잃었다. 망자보다도 탐욕스럽게, 갓난아기보다도 사심없이 사람을, 대지를, 세계를 잠식한 거구 낭비와 산락의 권화, 그 외곽이 지금 심지를 잃고 부서져 가고 있었다 이젠 구릿빛 용이 화구를 토해낼 것까지도 없었다 거수는 걸음을 멈추고 함께 시대를 보낸 천성도시를 껴안고 죽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찍이 하늘을 상징했던 용의 도시와 대지를 지배했던 정령신 거인왕이 죽은 지금 두 사람이 함께 무너지는 것은 낡은 신화의 끝을 의미했다 거인왕 프리슬란트, 천성룡 브릴리간트, 그리고 정령신 제브릴리스 일찍이 세계를 다스리고, 마를 지배하고 인간을 지배한 3대 마 아르티아에게 타도당하고도 여전히 멸망하지 않은 위대한 신들 거인..
창공의 잔을 움켜쥐며 엘디스는 푸른 눈을 활짝 열었다 엘프의 공주이자, 여왕에 걸맞은 발랄한 미소 요정향의 중심지에서 찬란한 미모를 내뿜었다 그런데 무섭게도 눈동자에는 엄청난 주술이 쏟아지고 있었다 요정족에게 축복과 저주는 고유한 것 예로부터 이들은 때로 남을 사랑하고 은총을 주며 때로 남을 난처하게 하는 장난을 하곤 했다 가장 인간에게 친근한 가정요정이나 장난요정들의 류 였다 정령이 어우러져 모종의 변질을 띠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너 같이 재생을 반복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내" 하지만 이 여왕의 본질은 너무 저주에 치우쳐 있었다 축복이란 바라는 것이요, 저주는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에 특화된 그녀가 인간에게 사랑을 한 것도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이기에 마성이..
"이런 젠장할! 아직도 낮이야? 이러면 땅 아래에 숨어있어야 하는 건가?" 엘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엘프의 고운 피부에는 땀이, 푸른 눈에는 초조가 넘치고 있었다 그녀는 발로 몇번이고 땅을 밟으며 굴러 떨어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루기스는 중심부에, 엘디스는 최하층에 둘밖에 없는 귀중한 전력을 분산시키는 우책이었지만 이것이 취할 수 있는 선택 가운데 최선이었다 게다가 제브렐리스의 피인 검은 액체는 중심부에 집중해, 밖으로 향하며 분산하고 있었다 엘디스는 문제없이 최하층에 내려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적어도 예외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아서 말이야" 그렇게 말한 남자... 흡혈귀는 잔뜩 당긴 팔을 굉음과 함께 내밀어 허공을 관통했다 그 자체로 천장..
구릿빛 용의 포효가 허공을 지배했다 불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눈을 흩날릴 먹구름마저 날려보냈다 대지에 마가 쏟아지면서 극대의 화구가 구릿빛 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일찍이 온 하늘을 지배했던 5대룡 중유일한 생존자, 구릿빛의 여왕룡 샤드랩트 그것이 현현하는 순간, 전쟁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도, 마수까지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자기 것이라는 것과 날개를 펴는 거만함도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거만한 행동도 모든 것은 그녀의 것이였다 현실에 없어져 버린 신화의 전승이 지금 여기에 되살아나고 있다 그녀의 모습 자체가 전설이 모두 진실이고 둘도 없는 역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허물어져라, 화구!"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구리의 비늘을 펼치며 허공을 나는 그 위용 그녀 앞에 선다는 것이야말로 유리와..
정령신 제브렐리스는 감은 눈으로 검은 액체 위에 앉았다 걸터 앉은 곳은 이끼 낀 옥좌 그녀만이 앉을 수 있도록 허락된 의자였다 일찍이 세계의 중심은 제브렐리스의 옥좌였다 신앙은 그녀에게만 쏟아지고 시야의 구석구석이 아니, 이 대륙 전체가 제브렐리스를 위한 정원이였다 마의 근원은 그녀이며, 마의 종착도 그녀 가까이 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절대의 옥좌 그런 그녀에게 지금 수많은 벌레가 몰려들고 있었다 제브렐리스는 눈을 감은 채 그 존재를 자각했다 껍질 속으로 파고든 마인과 요정왕 공중을 우러러보면 용과 보석 대지에 시선을 내리면 거인의 활보 도무지 지금이 인간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마성 투성이 결국 마성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마성이라고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신에 맞서는 부도덕과 절대 도망치지 않..
감정을 억제해야 해 그러면서도 핀 엘디스는 오랜만에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것은 바로 꽃 같은 미소였다 숲, 식물과 더불어 사는 엘프의 여왕다운 표정 하지만 꽃이란 본래 가련한 것도, 덧없는 것도 아니다 꽃의 생태란 얼마나 다른 생물에 봉사할 것인가만을 생각한 것 벌레를 유인해 꽃가루를 날라주고 새나 사람의 손을 사용해 씨를 나른다 언뜻 보기에 아름다운 꽃잎도 예술가를 신음케 하는 향기도, 교활한 생체의 현현 "...후, 후" 하지만 압도적인 녹룡을 눈앞에 두고도 꽃의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숨기기 위해, 엘디스는 입술을 쓰다듬었다 본래 즐기는 기색도 루기스 앞에 감춰야 했다 그래도 샘솟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위기는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의 손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