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8성 연합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79화 - 그녀의 실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7장 성전 시대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79화 - 그녀의 실 -

개성공단 2021. 5. 23. 01:43




리처드는 왼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허공에 던져 검은 검으로 쳐쉈다
내용물과 파편이 요란하게 돌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만이 둘의 신호였다

용자가 가진 검정색 검은
이제는 전에 있었던 천둥과 같은 반짝임을 잃었다
그것은 그의 전성이 실종된 증거이자
용자로서의 자격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수많은 마수들을 죽이고, 동료들을 잃고
상전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구한 용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저 한쪽 팔마저 잃고 노경에 이른 장군만이 여기에 있었다

상대는 지금이 전성기인 듯한 영웅 발레리



마법 갑옷이 움직였다
그것은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공기와 소리를 끊고
갑옷이면서 칼날과 다름없는 예리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장검 한 자루를 들고 용사에 도전했던
무모한 소녀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명의 전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 갑옷과 흑검이 맞물렸다
단단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것이 몇 번 이어졌다

리처드가 발레리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손목을 돌려, 칼날을 갑옷에 닿게하며, 돌려갔다

1초라도, 한 순간이라도, 조금이라도 방심을 한다면
그 순간에 흑검과 리처드의 몸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만한 힘이 발레리에게는 있었다




한합, 두합, 세합... 다섯합...

시간이 지나도 흑검의 궤도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재주구나 하고 발레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용자란 존재에게 가장 꺼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패배도, 철퇴도 아니다, 죽는다는 것

인류의 사랑을 받는 희망인 용자는 죽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살아야 한다
계속 살면 반드시 그들은 마지막에 승리할 것이다

그래서 용자는 적을 베어 쓰러뜨리는 근력과
동시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지금 리처드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것 뿐



그가 전성기였다면 발레리의 일격을 제압한 직후에
한 발을 내디뎌 그의 빠른 속도로 목을 베었을 것이다
지금의 그에게 그만한 힘은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발레리였고
그녀는 슬픔을 느끼면서 갑옷 안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 선명한 일격도, 드문 반짝임도
보통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는 속도도, 리처드는 잃어버린 것이였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간신히 전력을 다해 발레리의 주먹을 막아내는 것뿐

그렇다고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는 것이였다



수많은 칼싸움 속에서
검은 검의 칼끝이 순간 발레리가 내민 오른손에 튕겨졌다
두 전사 사이에 있어서 그 순간은 치명적

순간 리처드는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것이 한계치

순간 발레리의 팽팽한 주먹이 날카롭게 허공을 꿰뚫었다

그리고 리처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포탄에 날아간 듯 그의 몸은 성채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의 뼈가 쑤시는 소리를 들으며 리처드는 뺨을 찌푸렸다
지금의 몇 합의 교환으로, 이제 발레리에게는
어떻게 발버둥쳐도 닿지 않는 것을 실감했으니 말이다

리처드가 단 몇 합 사이에 쓴 기술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머리 위에서 손가락, 발 끝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속이는 기술은 진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섭게도 발레리는 모든 것을 분쇄했다
어떤 잔재주라도, 하나의 방대한 힘에는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 같았다

섬광으로 착각할 정도의 속도
마성보다 더 마성다운 강인함
이제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영웅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생물이었다




"으으으으...."





벽에 내동댕이친 리처드는
가까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벽을 차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음 순간에는 발레리의 주먹이
리처드의 몸집이 있던 곳을 도려냈다




"...."




리처드는 헛주먹을 날릴 때의 노출된 한순간의 틈에 흑검을 날렸다
하지만 발레리의 마법 갑옷은
숙주의 마력을 이용해, 산뜻하게 칼을 튕겨냈다




"이야야압!"




그리고 발레리는 순간적으로 한 다리로 반원을 그렸다
틈을 노릴 만한 일격이었지만
그래도 잘못하면 뼈째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이미 결말이 날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성능차는 메우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영락없이 리처드는 발레리에게 살해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잔재주
리처드는 검은 검을 가까이 있는 불길에 비추었고
그 것만으로 흑검은 불에 의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또 잔재주인가? 어짜피 발악일 뿐이다"


"상관없어"




리처드는 검에 붙은 불꽃을
몇 걸음 걷다가 그대로 땅에 떨어뜨렸다
그것은 이미 정해놓은 장소였으니...

순간 성채 안에서 불꽃이 피워졌다

바닥에 흩뿌린 불길이
불꽃을 유도해 순식간에 발레리와 리처드를 감쌌다




"네가 여기 올 줄 알고 있었거든"




발레리는 반드시 자기를 죽이러 올 것이다
그것은 리처드에게 있어서의 확신이었다
불손하지도, 오만하지도 않고 발레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부관 도레가 아니라
적인 자신이라는 자신감이 리처드에게 있었다

뭔가 거꾸로되긴 했지만 말이다




"나도 당신이 결사책을 쓸 것을 알고 있었어"




불꽃이 시야를 가린 순간 발레리는 뛰고 있었다
그녀는 불길을 뛰어 넘어, 마법 갑옷을 반짝이며
주먹을 불끈 쥐어짜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리처드를 죽이기 위한 주먹일 것이다




"그렇겠지"




그녀에 맞서는 리처드는
왼팔에 혼신의 힘을 다해 두 발을 멈췄다
더 이상 따돌리기 위한 검격이 아닌
발레리를 격파하기 위한 것

이 곳밖에 없다고 리처드는 생각했다

완전히 자세를 취한 발레리 상대로는
지금의 나로서는 말도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 태세를 무너뜨려야 했다

허공을 뛴 발레리는 방향 전환도 안 되고 주먹도 뺄 수도 없다
그래서 이곳만이 리처드에게는 최적의 승부처

그 순간 둘 사이에서 호흡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다음... 결판이 났다

리처드는 호통을 치며 말했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바보야"


"...입 다물어"





힘과 힘이 만나면, 강한 힘이 나오는 것
강한 힘은 어떠한 계책이든 짓밟는 것이였다

리처드의 검은 칼은 발레리 앞에서 살짝 벗어난 반면
발레리의 왼팔은 리처드를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결판과는 정반대로 리처드의 표정은 냉정하고
발레리는 고심에 차 있었으니




"영웅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네 꿈은 네가 이뤄준 것 같구나..."


"아니야, 아니야... 난 아니야!!"




리처드의 몸을 감싸안으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발레리는 목소리를 떨었다
전쟁터에서, 아니 사생활에서조차 그녀가 결코 보이지 않는 얼굴이였다

그녀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미쳐버린 것 같았다




"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런 것은 그저 어릴 적의 꿈일 뿐이야"




어릴 때는 확실히 꿈을 꾸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고 갈채를 받으며
악인을 모조리 베어버리는 영웅

그런 것이 되고 싶다, 이루어질 줄 알았다
모종의 어린 시절 발레리에게 그 상징이야말로 용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였다
정작 갈구하던 것은 그런게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뭐냐, 대체 뭐가 되고 싶었던 거냐"




발레리는 이제는 눈물을 막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스지프 보루의 용사들을 구원해 주고 싶었어!
제브렐리스에 겁먹은 백성들을 도와주고 싶었어!
그리고.... 당신과 한 약속을 이루고 싶었어...!"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발레리는 오열을 터뜨렸다
유일하게 허락한 사람을 앞에 두고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리처드를 양손으로 끌어안으면서 왜 그랬을까, 하고 자문했다

스지프 보루에는 이르지 못했고
제브렐리스를 죽이기에는 역부족
그 때문에 대성교와 함께 길을 걸었고
이렇게 리처드와 대립했다
하지만 하필 대성교의 손길에 리처드는 불사자의 씨앗을 심게 되었다

이제 발레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선택한 길은 분명 옳은 것일텐데
그런데도 스스로의 바람과는 자꾸 어긋나 버린 것이였다
그녀의 다리는 가시밭에 휘말린 것과 같았다
고뇌하고 몸부림치며 걸을 때마다 상처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실을 가지고 열심히 움직여갔다
그녀의 몸은 꼭두각시로서 해야 할 역할을 했다

그런데 리처드와의 결판을 앞두고
어찌된 영문인지 그게 끊어져버린 것이였다

아니... 아군이든 적이든, 리처드만이 발레리의 실이였다




"....그래, 힘이 있든 없든 모두가 휘둘리고 있는 거지"




이 세계가 만약 한 무대라면 끔찍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용자로 태어나고 영웅으로 태어나고 
각본대로 농락당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 결말의 하나가, 이 용자와 영웅을 서로 죽이는 것이었다면?
어쩌면, 이 서로 죽이는 것조차 의미는 없을 뿐더러
단지 각본을 쓰는자가 입맛대로 지맘대로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발레리는 이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순수한 힘,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였으니까

당대의 영웅 발레리의 손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발레리"




리처드는 발레리의 등에 손을 두르며
죽어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



 

발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메드라우트 성채는 함락되었다

성채 수호병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 노병들이었던 성채는 모두 타버릴 때까지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장군 리처드 퍼밀리스는 
보루와 함께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