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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78화 - 운명의 본성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7장 성전 시대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78화 - 운명의 본성 -

개성공단 2021. 5. 23. 01:21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보자
메드라우트 보루의 함락 직전

화약에 의해 만들어진 요염한 불꽃과 폭발은
성채에 들어온 적병을 쉽게 집어삼켜 고깃덩어리로 바꾸었다

지금은 외벽 부분만 도는 불길도
머지않아 성채 전체를 뒤덮을 것이다
화약이나 기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그것은 다 타버릴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대성교군이 기대고 있었을 식량도 이로써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그들도 강행군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불길이 도는 성채 외벽에서 패군의 장수가 된
리처드는 왼팔로 미개봉 술병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원군은 왕도로 향할 거야, 그걸로 됐어
너도 여기 더 이상 남지 말고, 도망가도록 해"


"하지만, 장군"


"입닥쳐! 명령이다, 전령하러 가라!
메드라우트는 함락되었고, 나는 죽었다, 그거면 돼!"




머뭇거리는 군사를 노려보고 리처드는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우수한 군사였다
두려움을 알면서도 억누르고 싸울 수 있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죽게 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그는 각오가 된 노병이 아니라 아직 젊었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아직 이를 것이다

병사는 표정을 회한과 눈물로 일그러뜨리며 경례를 하고 떠났다
역시 좋은 병사다,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명령을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녀석은 시간을 맞췄겠지?
하지만 내가 시간을 맞추지 못했군, 하하하"




루기스로부터의 선행 부대 도착
그것은 그가 제브렐리스를 타파했음을 의미했다
어떻게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하지만, 해냈을 것이다
기묘한 확신만이 리처드의 가슴에 있었다

재능은 없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동자만 번지르르하던 깡마른 아이
주워도 언젠가는 모르는 사이에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와 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아이가 남자가 되어
먼 곳에서 영웅이 된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리처드는 생각했다

그래서 선행부대를 왕도로 보내게 했다
그가 이끄는 군대를, 이 패전에 관련시켜서는 안될테니까

그것은 병사의 소모일 뿐 아니라
더 큰 신왕국의 통치에 관한 문제


이후의 사서를 인용한다면
이 시대의 문장교 신왕국 통치는 안정된 것으로 기록되어 진다
반란은 없었고 귀족들도 새로운 여왕을 무사히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였다

여왕 필로스와 성녀 마티아의 통치 기반은 매우 취약하다
신흥 세력에 안정 같은 건, 있을리가 없었다

여왕을 떠받드는 것은 비오몬도르를 동량으로 한 귀족들
그러나 그들은 원래 구왕국 내에서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
 필로스 밑에 붙은 자들이였기에, 그 지배 영역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필로스를 받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멜라이츠 국왕을 따르지 않았던
기회주의자 귀족들도 왕국 내에 남아 있긴 한데

이들은 현재로선 왕도를 품에 안은
필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지만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은 많은 권력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큰 것은 종교의 문제다



신왕국은 구왕국과 달리 문장교를 국교로 내세웠다
하지만 귀족의 대부분은 대성교로
현재 여왕은 자신들이 믿는 신과 반목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천한 첩의 자식이며
성녀 마티아만 해도 시류를 탄 벼락출세한 양반이였다

필로스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은
비옥한 왕도 주변 영역과 비오몽도르 파벌의
귀족령뿐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반란 따위는 언제 일어나도 이상할 것 없었다
마성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사람의 욕심이나 반항심이라고 하는 것은
억제하기 어려운 것인 것이였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일까
왜, 유유낙낙 젊은 여왕의 발밑에 굴복하는 것인가

그것은 승리에 대한 경외



여왕의 지지기반인 문장교는 승리를 이어왔다
성벽 도시 갈루아말리아, 용병 도시 베르페인
가자리아 내전부터 서니오 전투
내부 반란군과 대마, 마인과의 전역

그 모든 전역에서 문장교... 영웅은 계속 승리해 왔다
승전보를 울리며 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해지는
그가 문장교 나아가 신왕국에 가담하고 있었다

신왕국에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영웅의 칼날이 목덜미로 내려진다는 것

아무튼 영웅의 불패 신화만이
신왕국의 권력 기반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루기스의 군사를 왕도로 향하게 했다
이렇게 하면 리처드는 비록 졌다고 해서
루기스가 패배한 것은 아니라는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불패 신화는 살아 있다고...





"하하, 드디어 오셨군?"





리처드는 적병도 죽고, 아군도 잃은
성채 외벽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돌격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였다

성채 안에서 불이 슬쩍 돈 그곳에 그녀는 있었다
숨을 삼킬 정도로 날카로운 두 눈
두 어깨에 넘쳐 흐를만한 자신감
그리고 그녀의 몸을 두르는 푸른색의 마법 갑옷

발레리 브리트니스는 리처드에게 군림한 것이였다




"그래, 이 몰락한 악당아
성채에 스스로 불을 지르다니, 정말 바보아냐?"


"뭐 어때? 이런 추운 날씨엔 따뜻한게 최고지 않나?"




발레리는 리처드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었고
그에게 어떤 운명이 임박했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에 선을 넣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일체의 방심도 없는
폭력의 화신인 발레리 혼신의 모습으로 말이다




"...뭐, 목적은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리처드가 응해 왼손으로 검은 검을 쥐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연소음과 두 사람의 목소리만 여기에 있었다




"당신을 죽이러 왔어, 리처드"


"아아, 나도 너를 죽이겠어, 발레리"





이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면
운명은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일 것이다

일찌기 함께 큰 뜻을 품고, 함께 꿈을 이야기하고
같은 자리에서 만난 두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서
흔들림 없는 살의를 서로에게 쏟고 있었으니 말이다

발레리는 리처드가 불사자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리처드가 타인에게 살해당하는 것 따위는 허용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리처드 또한 발레리가 얼마나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유일한 영웅의 승리를 바라기 때문에
여기서 그녀를 놓칠 수는 없었다




"죽여달라는 간절함은 어디로 간거야?
변함없이 말과 행동이 다르군"

"쓸 만한 건 어떻게든 쓰는 게 내 방식이야
설마 아직도 눈치 못 챈건가?"




평소와 같은 가벼운 응수였다
함께 로이메츠 밑에서 와인을 주고받으며
담소를 나누던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비장함도 무참함도 없는 해학적인 모습만이 두 사람에게는 있었다



불길이 펄펄 타오르는 것을 신호로
발레리가 손 끝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리처드, 당신은 나를 배신하고
우리의 큰 뜻을 짓밟았으며, 가장 사랑하는 자를 빼앗아갔어"




그건 맹세의 것
존엄과 생명을 걸기 위한 축복과 결의의 말이였다
발레리의 찬란해 보이는 전사로서의 면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말을 끌어냈다



"나와 당신의 인생을 다시 한 번 하늘에 맡기지
승자의 손에는 두 가지의 인생을
리처드, 나는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어"


"승낙하지, 용사의 이름으로 결투에 응하겠다
우리는 명예와 긍지를 최고로 여기는 자들이니까"




북쪽의 영웅과 용사는 이곳에서 만났다
함락되는 화염에 젖은 성채 안에서
이들의 마지막 결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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