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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76화 - 기쁨의 날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7장 성전 시대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76화 - 기쁨의 날 -

개성공단 2021. 5. 22. 02:33



요새 거수가 무너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세계에서 소리가 사라졌고 시간의 흐름마저도 색깔을 잃었다.

망자보다도 탐욕스럽게, 갓난아기보다도 사심없이
사람을, 대지를, 세계를 잠식한 거구
낭비와 산락의 권화, 그 외곽이 지금 심지를 잃고 부서져 가고 있었다

이젠 구릿빛 용이 화구를 토해낼 것까지도 없었다
거수는 걸음을 멈추고 함께 시대를 보낸
천성도시를 껴안고 죽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찍이 하늘을 상징했던 용의 도시와
대지를 지배했던 정령신 거인왕이 죽은 지금
두 사람이 함께 무너지는 것은 낡은 신화의 끝을 의미했다

거인왕 프리슬란트, 천성룡 브릴리간트, 그리고 정령신 제브릴리스



일찍이 세계를 다스리고, 마를 지배하고
인간을 지배한 3대 마
아르티아에게 타도당하고도 여전히 멸망하지 않은 위대한 신들
거인과 용과 정령의 시대를 만들어 낸 자들

오늘날 이들의 신화 시대는 진정한 의미에서 막을 내렸다

시대의 종말을 누구보다도 느끼고 있는 것은 정령신 제브렐리스였다

천성도시와 그녀의 체구와의 충돌은
단순한 물리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자신을 신앙했던 도시 그 자체
천성도시는 용의 신앙을 형상화한 도시였다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항상 다른 신앙일 뿐
지금 용의 신앙과 정령의 신앙의 덩어리가 충돌해
서로 물어뜯고 있는 것이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서로 소멸할 수 없는 결말이 있었다




"너무 슬픈걸, 결국 복고는 그저 내 생각일 뿐
신조차 세계 앞에서는 여의치 않는다는 것일까?"




제브렐리스가 불쑥 말했다
도저히 처참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그저 어이없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한...

아무리 발버둥쳐도 당장 그곳에서
죽음의 모습을 본 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를 계속 지켜온 거구도
신전조차도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요정왕의 저주가 사라져도 소용없을 것이다




"네가 나빴다는 것은 아니야
그저 우리들이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만 했어"


"어머!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닌데!
마인... 아니, 루기스, 이 세상에 선악은 없고, 승리와 패배만이 있어
넌 이겼고, 난 졌어, 그저 그만한 일일 뿐이야"




무너지는 제브렐리스의 몸속에서
루기스는 마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한 걸음을 다가섰다
그가 무엇을 해주려고 하는지 제브렐리스는 쉽게 이해했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신을 죽일 수 있는 원전을 지녔을까?

그는 평범하다
다만 재능이나 체구를 말하는 게 아닌
정신의 본연의 자세만을 묻는다면 영웅적일 것이다

평범이라는 것은 감정면에 있어서다
아무리 악을 표방하든 그의 본질은
선을 좋은 것으로 인식하고 악의를 싫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원전을 가진 자는 그것이 이상할수록 선악을 잃기 마련이다
자신의 소망하는 원전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의 영혼의 윤곽까지 본 제브렐리스이기에 더욱 불가사의 했다
왜 죽음을 주관하는 원전 같은 것을 그가 갖게 된 것인가

루기스는 제브렐리스에게 다가가며
어깨 언저리에 칼자루를 끌어당겨 마검을 세로로 일으켰다
적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조용한 의지만이 숨겨져 있었다

역시 그는 영웅에는 적합하지 않다
죽여야 할 사람과 상대하여 자신이 아니면
죽이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웅도, 하물며 마성도 아닌 것이다

불쌍하다고 제브렐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날 죽이려면, 더 가까이 오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는 극복해야 할 것도 극복할 수 없어
너는 이제 잠자리에서 편히 죽을 수도 없는 몸이야
자신을 증오하고 원망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겠지

  내가 말했지? 인간은 언젠가 너를 무서워 할거라고
정확히는 당신을 사랑하거나 무서워 할거야
누구도 무관심할 수 없는 존재, 영웅이란 그런 거니까"


"옛날에는 미움만 받았으니 그나마 그게 낫겠지"


"어머나, 말로서는 이길 수가 없구나"




루기스가 천천히 다가갔다
눈을 감으며 제브렐리스는 그것을 느꼈다
이제 몇 초 안에 서로의 중간에 들어갈 것이다
공기가 따갑고 호쾌한 붕괴가 주위를 뒤덮은 가운데
둘 사이만 이상하게 조용했다

제브렐리스는 신전을 잃고 몸과 영혼마저 죽음을 맞고 있다
이제 그녀의 체구에 마력다운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제브렐리스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다
루기스 역시 마검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양측의 적의 없는 살의가 교차했다



호흡조차 잃은 공간에서
제브렐리스의 검은 액체가 루기스의 사지를 뚫고 몸속으로 침식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단순한 생물이라면
그것만으로 사지가 튕겨나갈 정도의 충격

하지만 루기스는 단숨에 마검을 내려쳐 그것을 잘랐다

보라색이 빛나는 선을 그려, 옛 정령신의 육체를 찔렀다
칼날이 제브렐리스의 왼쪽 어깨에서
심장을 가르고 오른쪽 옆구리로 빠져나갔다

검은 피가 주변에 튀며, 신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제브렐리스는 별다른 감개도 없다는 듯
자신의 상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자신의 죽음은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만 죽거나 루기스도 같이 죽거나 둘 중 하나

그리고 답은 이미 나왔다
그는 자신을 뛰어 넘었음을 보여준 것이였다




"루기스"



제브렐리스는 상처받은 몸으로
신이 선탁을 하듯 말했다
동시에 루기스의 살을 애는 추위가 찾아왔다

집적된 검은 액체 전부를
제브렐리스는 스스로에게 흡수해
손가락 끝에까지 마지막 힘을 주었다
신화 시대의 마가 피가 되어 그녀의 두 다리를 서게 했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그러면서도 엄숙하게
제브렐리스는 눈을 뜨고 루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에 눈에 박힌 것은 안구라기보다 오히려 빛 같은 것이였다

그것은 일찍이 제브렐리스가 신이었던 무렵의 위광
그녀가 세계를 바라보던 신화시대의 유물
그리고 지금 그것으로 루기스를 보는 것이였다




"만약 다음에 만난다면, 그 때는 친구하자?"




스스로를 죽인 상대에게 건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애정을 담아, 말은 전해졌다

아니, 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리슬라트 원전의 본질이 파괴이고
브릴리간트의 것이 약탈이었듯이
제브렐리스의 것을 든다면 그것은 낳는 것이였다
마를 낳다... 자신과 동일화 시키는 것

그녀의 거구가 이뤄온 모든 것이
제브릴리스의 원전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원전이 모든 마를 낳기 위한 것이라면?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마는
모두 그녀를 친부모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제 루기스는 인간이 아니라 마였다

그래서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을 말하듯
제브렐리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번뜩이는 눈으로 루기스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아이의 여행길을 지켜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금 이 시점에서 신화의 세계가 끝났다






대재앙의 상징이자 신화의 색깔을 남기는 마지막 존재였던
제브렐리스는 천년이 넘는 삶을 이날로 마감했다





 ◇◆◇◆





대마 제브렐리스의 죽음
사서를 풀어보면 이날의 일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떠한 입장, 어떠한 시점에서 그려진 것이든
대마 제브렐리스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녀는 바로 이 시대를 장식하는 상징의 하나였고
그 마지막은 역사의 전환점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적어도 대재앙이 끝난 것에 대해
누구나 기뻐하고 갈채를 보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대마는 죽었고, 인간을 위협하는 마는 사라졌다
설령 인간끼리 전역이 있었다고 해도
대륙이 인간의 것이 된 사실임에 틀림없다

마성의 발호로 잃어버린
대륙의 패권을 인류는 이날 되찾은 것이다

많은 사서가 기록했다
이 날은 기쁨의 날이었다, 라고...




하지만

이날 일어난 일은 꼭 제브렐리스의 죽음만은 아니였다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너무나 큰 사실이기 때문에 기록에서는 방치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그 현상 또한 이 시대의 전환점의 하나다

루기스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진
엘프의 기록관 라이쇼는 수기로 루기스가 했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대마 제브렐리스의 죽음과 같은 날

장군 리처드 퍼밀리스가 수호하는 메드라우트 보루는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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