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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42화 - 쌓이는 신용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5장 배덕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42화 - 쌓이는 신용 -

개성공단 2021. 4. 14. 18:58




나는 담배를 이빨에 얹으면서
엷은 향기를 콧구멍에 넣었다
공기가 습한 탓인지 냄새마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시선 끝에 보이는 가도는
최근 며칠 사이 온통 눈으로
살레이니오가 군사를 거느린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마차도 제대로 다니지 않는 가도는
조용해서 공간 자체가 졸아드는 듯했다

저 멀리, 가도가 이어지는 훨씬 앞에
볼버트 왕조의 대군이 군화를 울리고 있다고 한다

볼버트 왕조의 서정
역사상 반복적으로 축적되어 온 그 야망은
대재앙의 와중이라는, 최악의 순간에 무너졌다


대마, 마인의 위협에 처해
인류로서 존망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자신 세력의 사기를 위해 그 일을 감행했다
설령 자신이 목을 베이는 순간이
아주 조금 앞으로 뻗쳐질 뿐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기가 막혔다
기가 막히게 인간적이군
과거에도 어쩌면 볼버트 왕조는 이런 야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단지, 어떠한 요인이 있어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

저번 세계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요인은 이제 알지도 못하지만
이번에 형성된 요인은 이미 자명해졌다
이젠 눈을 돌릴 수도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분명 나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러버린 것일 것이다
스스로는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실패는 언제나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 법

그리고 나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이라면
당연히 제거하는 것은 내 몫일 것이다



괴뢰도시 필로스의 성문 앞에서 말고삐를 당겼다
밖은 눈에 젖어 은빛 일색인데도, 녹색 군복은 묘하게 따뜻했다

눈 아래에서는 라르그도 안이 바쁘게 외치고 있었다
말 위에서 보면 작은 체구의 그녀가 한층 더 작아 보였다




"영웅님, 성녀 마티아는 왕도로의 복귀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공주도 당신이 귀환해야 즉위를 할 것이라 합니다!"




굳은 목소리였다
말을 다하면서도 앞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말이 나올지, 그녀는 사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하지 않으면 된다고도 생각했지만
안의 성격상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떼고 입술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왕도에는 돌아갈거야
하지만 잠시 어떤 곳 좀 들리고 돌아갈게
정해진 길만 걸으면 재미없잖아?"




그렇게 말하자, 안은 두 눈썹 꼬리를 내리고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못 내고 억지로 그걸 삼키는
뭔가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잖아
시야를 약간 일그러뜨리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드높은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자신감이 넘쳐보이는 목소리였다




"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사람은 귀가 있어도 듣는 사람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루기스가 어떤 부류인지, 너도 잘 알 잖아?"




카리아는 두 가닥의 은발을 묶으면서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웬일인지 그녀는 조금 으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은빛 눈이 양양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조롱하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군
카리아야말로 남의 말 따위는 귀담아듣지도 않는 성격일 텐데
내가 한 말을 들어준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러나 아무래도 안에게는 카리아의 말이 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코를 쫑긋 세우고 감정을 억누르듯 눈동자를 떴다





"볼버트군은 3만이 넘는 대군이라고 합니다
마법장갑병도 동원할 수 있는 만큼 넣었다고 하는데..."





마법장갑병
볼버트 왕조가 자랑하는 주력군
너나 할 것 없이 마구라 불리는 물건을 몸에 걸치는 병단을 말하는 것

마법사가 긴 시간과 주문을
그야말로 저주라고 불릴 정도로 다듬어 만들어 것이 바로, 마구
밀도가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마법사에겐 최대의 가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국가가 앞장서서 만들어내게 하고 병사들에게 주어
전쟁의 도구로 삼게 한다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마법국가 만만세라고나 할까나?

아무튼 그런 엄청난 마법장갑병은 몸 하나가 기병 이상으로 흉악했다
말 몇 마리로 끌게 하는 전차가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듣기로는 놈들은 큰 나무조차 쉽게 죽인다던가

그것이 수를 갖추어 차례차례 쏟아진다면, 바로 악몽 그 자체일 것이다

외벽은 무의미하게
그냥 보병 같은 것은 재미있다는 듯이, 쳐부수겠지
숫자로만 따지면 3만이라지만 전력으로 따진다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아마도 도시국가군은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성벽 도시 갈루아마리아조차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어
심지어 소수 군인으로 향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말하는 거겠지?
그래 마티아도, 너도 모두 옳을거야"




그렇게 입을 놀리자
안은 잠자코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녀의 원망어린 시선을 피하듯이 어깨를 움츠리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버리기엔 아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
우드도, 셀레알도, 함께 술마신 할아버지도
다친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귀여운 동네 꼬마아이도 있었어"




이건 뭐라 말하든, 내가 일으킨 것
그런데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그들 모두를 버린다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딱 잘라 말해 버린다면...




나는 이제 분명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편리한 이치를 따지고 포기할 이유를 찾아 억지를 부리며 살아가겠지
그런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다 결국 죽을 때까지 계속 생각이 남을 것이다
그때 나는 스스로의 비굴함 때문에 그들을 버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그런 생활 방식만은 이젠 질색이다
과거에 버림받은 쪽이였던 내가
반대의 입장에 서서 누군가를 버린다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영웅이란 머나먼 것
내가 아는 그 녀석은 분명 이런 일로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떤 난국에서도 사람 구하는 일은 쉽게 해냈을 것이다

틀림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웅 흉내 정도일 것이다
아, 그러니까 적어도 흉내만은 해내고 말겠어

뺨을 오므리고 보검과 백검을 허리께로 기울이며 말했다
안은 아직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 정면에서 칼을 부딫치려는 게 아니야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거야
조금은 이 영웅님을 믿어주지 않겠어, 안?"




안은 내 말을 듣고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었던 걸까
순간 눈을 뜨면서도 미간에 주름을 잡는가 하면
다음에는 뺨을 일그러뜨리는 등 다급하게 표정을 계속 움직였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했다





"신용이라는 것은 쌓아올려야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의 하나로 삼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영웅 님, 부디 무사귀환을 바랍니다"




눈초리가 불쑥 올라갔다
나는 그정도로 신용이 없는걸까?
적어도 카리아보다는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뺨을 실룩거리면서 카리아 쪽으로 시선을 주자
그녀도 안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시의 행동이라는 건, 재난이 닥쳤을 때 싹이 트는 법이야
루기스, 그건 그렇고 너는 어떨까?"




어떨까, 하고 물으며 유쾌한 듯 뺨을 치켜올리는 순간
이제 카리아 속에서 답은 정해져 있는 듯했다
뭔가 분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이 피에르트나 엘디스라면 조금 달랐을 텐데

나는 다시 안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한 감옥은 어때? 어떻게든 될 것 같아?"




그러자 안은 순간 순순히 얼굴을 바꾸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준비는 해 두었습니다...
이제 명령만 해주신다면, 바로 오게끔 해 두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잠깐 끊긴 안을 앞에 두고 말을 잇듯 했다
경계니 의심이니 하는 것들이 안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필요해서 말이야...
고기를 자르기 위해서는
위험해도 칼을 쓰는 법이잖아, 그런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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