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성 연합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155화 - 전장의 결투 - 본문
"다시 한번 묻겠다
루기스 너는 내편이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초조도, 분노도 아닌
단지, 순수한 비애가
우러나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비애라는 말조차
지금의 심경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표현에
상당히 가까운 것이였음은 확실했다
나도 모르게 코끝이 아파왔다
나는 카리아의 장검을 되밀면서
조금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카리아는 거의 저항하는 기색도 없이
나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눈동자에 비치는 카리아의 모습은
과거 시절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연약해 보였다.
나는 카리아를 직시하며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 카리아,
너는 나와 다른 영웅의 그릇이잖아?"
언제나였다면 가벼운 농담이 나왔을테지만,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 처하다 보니
그런 말 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같은 조약돌에 비해서 말이야..."
그것은 카리아에게 들렸는지 모를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아마 나 개인의 비탄에 가까운
말이였음에 틀림없었다
카리아, 아니, 카리아 버드닉은
영락없는 영웅 임에는 틀림없었다
확실히 예전의 그녀는 포학의 인간이며
약자를 유린하고, 씹어 부수고 마는
강자의 오만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카리아 버드닉이라고 하는 여자는
전장의 패자이며,
평범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아아, 내가 동경했던 영웅 중 한 사람이였다
그 힘에 대한 탐구성을 가슴에 태웠었다
유례가 없는 힘을 가졌지만,
여전히 뼈를 깎는 단련을 거듭했고
그 입술에 피를 흘리는 모습에는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렇다, 카리아 버드닉은
틀림없는 나의 이상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앞에 있는 그녀는 어떠한가?
강인한 의지의 빛을 머금었던 눈동자는
연약하고 흐릿해 져버렸으며
가늘고 하얀 손가락은
과연 금을 다시 휘두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정도였다
오만하다는 말을 듣든,
불손하다는 말을 듣든 말든
모든 것은 나의 탓인 것이였다
이곳에 온 나의 부질없는 행동이
카리아 버드닉이라는 위대한 영웅에게
저런 모습을 가지게 해버렸다
그 사실이, 심장을 뛰게 해서
가슴을 찢어버릴 것 같았다.
카리아가 나에게 직찹에 가까운 감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만족해버렸던
내가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동경하던 영웅이
자신을 동료라고 불러준 사실에
행복에 가까운 기쁨에 젖고 말았다
그리고 그 기쁨의 결과는
나는 내 자신의 동경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아아, 그녀를 어딘가에서
증오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다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두 송이의 은발이 전장에 나부꼇다
그것은 지난 세계, 카리아의 모습이였다
"...즉 그것은, 내 편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카리아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몹시 차갑고 겁이 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전까지의 사고를
일순간 얼어붙이는 동시에
가늘어져있던 눈동자를, 부릅 떴다
카리아의 목소리의 차가움에 놀란게 아닌
일찍이 내 몸에 퍼부어졌던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다리를 물러서고 말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라고
핑계를 대려는 순간
그녀는 내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잘 알았다, 루기스, 잘 알겠어"
카리아의 발음이
서서히 열을 띄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갸날프게 흐려져 잇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의지를 밝힌 듯
불꽃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분명, 나 자신이였다
"잘도, 내 손을 물리쳐 주었구나
이런 수모를 당한건 처음이군"
그 말 자체는 가시가 들려있었고
그것을 내뱉는 카리아의 표정은
어딘가 흔들린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표정만 보고 있으면
어딘가 기쁜 일이 있는가 싶은 그런 얼굴이였다
하지만, 눈동자만은
미소를 띠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맹금류의 눈동자였다
젠장할, 나는 깨달아버렸다
나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도
최악의 선택지를 밟아버린 것이다
카리아의 손을 잡고
너야말로 최고의 동료야 라고 하는
선택지도 있었고,
강하게 손을 떨쳐버리는 것도 있었겟지만
나는 또 이상한 선택을 해버린 것이였다
"모욕을 당한 이상,
취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군
그것이 우리의 방식이고, 전장의 규칙이지만"
카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땅에 내려놓았던 은장검을 내게 겨누었다
살짝 기울기 시작한 햇빛이 검을 반짝였다
나는 카리아의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여자가 모욕이란 말을 꺼낼 때
무엇을 원하는 지도 알고 있었다
눈꺼풀 뒤에 그리운
술집의 광경이 새삼 떠올랐다
"루기스... 네 놈은 나의 존엄을 짓밟고
그리고 나의 명예에 먹칠을 해주었다"
그것은 이전과 같은 경쾌한 술집의 결투를
선서하는 것이 아닌,
상류층의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맹세 같은 것이였다
"따라서 네놈과 내 인생을 걸고
다시 한번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그것은 나와 카리아에게 한정된 것이 아닌
전쟁터 전체에 울려퍼지는 듯한
크고 맑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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