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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78화 - 거울 같은 자와 몸을 깨무는 축복 - 본문
그는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하고
엘디스는 그 벽안을 굴리며 뺨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눈이 느긋하게 감기고, 눈꺼풀 뒤에는 무척이나 그리운 광경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탑 안에 있을 때의 기억
정신은 부패하고, 무릎은 무너져 내려 모든 것이 저주받기를 바라던
그 시절, 겁쟁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때의 광경이다
그는 루기스는 자신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지금과 다름없는 제멋대로이며,
정말로 심한 말투 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포기하고 싶은 건 너 자신이잖아
너의 의지로 포기하려는 것 아닌가?"
그 말은 아직도 엘디스의 긴 귀에 강하게 새겨지고 잇었고
도무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엘디스 자신에게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버려야 한다는 하나도 들지 않았지만...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엘디스는 루기스에 대해 제멋대로이고 오만한 놈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도 아무렇게나 말해주는 구나
그렇다면 억지로 이 사람을 끌어들여서
마지막에는 내 눈앞에서 우는 소리를 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가 이끈 결말은 전혀 다른 것
자신의 기대와 달리, 큰 소리를 치고, 전장을 찢으며,
그리고 마침내 나를 탑에서 구해내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루기스가 제멋대로 인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 성질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마음대로 남의 영지에 들어가
마음대로 이 마음을 움켜지고,
그리고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또 어딘가로 가버리는 것이였다
정말 제멋대로 인 것 같아
지독한 인간이군
하지만, 그 방자함에 구조된 것이
이 핀 엘디스라고 하는 엘프라면
설마 그 모든 것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방자함을 원망하면서, 그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독한 모순된 꼴이라고, 엘디스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녀는 흰 장갑을 두 손가락에 걸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루기스가 북방의 대산맥 프리슬란트로 향한다고 그랬을 때,
그가 걸치는 정령갑주는 그것이 어떠한 속임수를 위해
거짓말을 고한 것이 아니라고, 말을 전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고유한 이치와 확신을 갖고 행선지를 정했단 말이다
거기에 과연 적측의 마녀,
대성교의 심장인 알류에노가 있을지는 모른다고
루기스는 거짓 없이 그렇게 말한 것이였다
그렇다면 엘디스는 그것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기 기사가 확실하다면 그게 맞는 것이다
다른 말들이 큰 파도가 되어, 그를 부정하려 한다 해도
나는 그의 말만 믿으리라
그녀는 어깨에 두꺼운 외투를 짊어지게 할 정도로
프리슬란트는 극한의 땅이라고 전해 들었었다
일교차가 심한 곳에는 찾아오지 않는 엘프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엘디스의 손은 멈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루기스의 말을 듣고 나서 그 총명한 머릿속을 달렸던 것은
어떻게 프리슬란트를 짓밟아 주느냐 하는 것 뿐...
어쨌든 체념을 죽이는 것은 다름아닌 엘디스가 가르쳐준 것
이제와서 행선지가 혹한이라고 하는 것은
발끝 하나 말릴 이유가 되지 않았다
거인의 잠자리가 어쨌다는 것인가
결국 거인도 과거의 대패망 끝에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종족 아닌가
아무리 그들이 엘프의 천적이였다고 해도
이제 와서 그런 존재에 겁을 먹고, 등을 보일 수 있겠는가
엘디스가 여행 준비의 끝과
특별히 만든 검을 허리에 두르려고 하는 그때
가라지아의 대천막 속에 감정의 한숨이 지나갔다
"정말 수수께끼인 프리슬란트 땅에 발을 디뎌야 하겠습니까, 엘디스 님"
그것은 엘디스의 시녀인 발레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담긴 색조는, 분노도, 비애도, 연민으로도 느껴졌다
엘프로서는 정말 귀하고 근사한 감정의 몸짓이라고 엘디스는 생각했다
이처럼 타인의 감정에 민감할 수 있는 엘프가 또 있겠는가
"가고말고, 난 예전처럼 스스로 목을 조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래, 옛날처럼 스스로 포기할 이유를 찾아다니며
겁에 질려 꿈틀거리는 추태는 부리고 싶지 않아
엘디스의 말을 듣고, 발레트는 손끝을 떨었다
도저히 여왕을 향해서는 안 될 감정이 쏟아질 것 같았다
"당신은 가자리아의 핀
정령의 총애를 받고, 우리 엘프를 이끌어가실 분입니다
엘디스 님의 목소리를 수 많은 동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든 나쁘든, 발레트라는 엘프는 엘프답지 않았다
평소의 엘프라면 담담히 사실만을 고하고
거절당한다면, 재빨리 단념하고 포기해 버리는 법이였다
엘프의 수명은 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종족은 뭔가 한 가지 일에
열을 가하거나 집착하는 감정이 엷어졌다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감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느긋하게 마치 식물처럼 삶을 키우는 것은, 엘프 조상들은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면, 분명 발레트와 나는 이단일 것이다
발레트는 강하게 언성을 높이며,
눈동자에 남아있는 감정을 띄우며 말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겠습니다
엘디스 님의 생각은..."
성실하지 못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자신도 모르게 말이 막혀버린 발레트를 보고
엘디스는 눈을 느슨하게 떴다
엘디스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귓속을 맴도는 듯한 목소리가 천막 안으로 울려 퍼졌다
"발레트 엘프로서 내가 성실했었다면
나는 지금도 그 탑 안에서 죽지 않은 삶을 구가하고 있었을 거야"
그렇고말고, 지금 생각하면 그 때
탑 안에서 루기스의 손을 잡고, 그것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나는 이미 엘프로서 성실하지 않게 되었다
똑바로 이어졌을 길을, 잘못 헛디딘 격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아, 오히려 그를 생각하는 감정이 가슴을 녹이는 이 감촉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설령 황금이라고 해도, 이 행복엔 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라고 엘디스는 말을 이으면서
발레트의 젖은 눈동자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그 광택은 젖은 거울을 연상시켰다
"7일만 있으면 돼, 나에게 시간을 주겠어?
발레트, 핀으로서의 특권을 단지 이것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
엘디스가 그렇게 고한 순간
발레트의 몸에 깃든 정령의 술식이 천천히 변질 되어 갔다
그것은 모종의 이변이였다
본래 정령의 술식은 변질되지 않으며
그냥 그대로 행해지는 것이였다
변질된다는 것은 정령의 폭주 일 때 뿐이였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변질이 나타나도, 엘디스는 요지부동이였다
그것이 발레트가 잉태하는 본질임을 이해하니 말이다
빛이 공중으로 튀어오르고,
발레트의 몸을 구성하는 술식이
그 모습 자체를 변질시켜 갔다
이건 정령술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이질적이지만
그래고 기적이라 부르기엔, 약간 뭐했다
그래서 엘프들은 이것을 정령의 괴짜라고 불렀다
엘디스의 눈꺼풀이 깜박이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느긋하게 몸을 기울였더니
엘디스의 눈 앞에는, 더 이상 발레트가 아닌
그녀 자신이 있었다
해맑은 벽안에 동색 머리카락,
흰 살갖에 주위를 유혹하는 듯한, 아름다운 자태
항상 거울로 봤던 그 존재가 여기에 있었다
그것이 발레트의 몸을 변하게 만든 술식이였다
"미안해, 발레트"
눈 앞의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것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이것이 제 역할이잖아요
그러나 엘디스 님, 제가 아무리 정령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7일이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와 주세요"
그 목소리와 몸짓은 엘디스 그 자체였다
원래 남들을 자신에게 대입시키는 것이 특기였던 발레트는
엘디스의 거동마저 구현할 정도였다
엘디스는 다시 발레트의 정령술을 보고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를 눌러썼다
본래는 위난이 닥쳤을 때에 써야 할 영법사를
이러한 형태로 쓰게 해 버리다니
발레트에게는 너무 심한 짓을 해버린건가
돌아간다면 그녀가 좋아하는 잔치에 함께 어울리도록 해야지
예전처럼 밤을 넘기게 되더라도, 이번만은 받아들이자
엘디스의 벽안이 이때만큼은 부드럽게 풀어졌다
천막을, 자신의 모습으로 변장한 발레트와 함께 나왔다
머리카락을 감추고 모자를 깊이 눌렀는 것이
엘디스 본인 따위라고는, 병들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이다
겨우 가자리아의 진지를 벗어났을 무렵
문득 엘디스는 생각했다
남장을 해서라도, 곁에 있으려는 자신을 보고
엘디스는 무슨 생각을 할까
기뻐할까, 어이없을까, 화낼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그 기대에 부응해주는 것이 좋겠지
게다가 말이다
한 가지 더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루기스가 입은 정령갑주
그것은 그에게 계속 정령의 가호를 베풀지만
반면에 그의 영혼에 발자국을 깊게 남기고 만다
어쩌면 머지않아, 내가 곁에 없으면
몸이 무거워질 수 있을 것이다
엘디스는 모자 밑에 감춘 벽안을
가늘게 일그러뜨리면서, 요염한 미소를 뺨에 머금었다
루기스, 너에게 모든 축복과 행복을 주마
그야말로, 그것을 잃어버리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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