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성 연합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81화 - 젖은 진흙 - 본문
가볍게 기름을 바른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입을 열었다
스스로도 힘이 빠진 목소리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봐 엘디스, 지금 쯤이라면 되돌아갈 수 있다고?"
눈을 짓밟으면서, 간신히 프리슬란트의 중턱을 눈 아래에 두는 그런 무렵
찬바람이 휘몰아쳐, 방심을 하면 살갖 자체를 잘라내 버릴 것 같은
그런 하늘 아래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엘디스가 아니라니까
그냥 여행을 하는 엘프일 뿐이야"
내 곁에 붙은 채로 가볍게 방한 모자를 기울인 엘디스
아니, 나그네 엘프 씨는 입술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실제로 그녀의 벽안은 어딘가 장난스러운 색을 띄고 있고
표정도 왠지 즐거움을 가득찬 거 같았다
그 음색과 표정의 구조는
엘프의 여왕으로서 엘디스가 보여주는 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였다
평소의 엘디스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은...
아니, 오히려 이쪽이 그녀의 본래의 표정일지도 모르겠군
뺨에, 차가운 바람이 스쳐갔다
단지 스쳤을 뿐인데도, 뺨에는 마치 작은 벌레에 물린 듯한 아픔이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원래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 발을 들여 놓으면
대개 안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야
신화에선 흔히 있는 얘기지"
내 말을 듣고, 엘디스는 모자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잡고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내 영역이 숲속 뿐이라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일까?
게다가 그렇게 말한다면,
너네 영역은 그토록 믿는 신의 땅일텐데, 왜 이런 산중에 있을까?"
엘디스는 이쪽을 뻔히 들여다보며, 볼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고
한숨은 곧바로 하얀색으로 변하며, 바람에 휩쓸리듯 하늘로 흩어졌다
그만두자,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엘디스도 여왕으로서의 책무를 하는 동안, 말쏨씨가 늘어 버린 것 같군
탑에 있을 때와 다르게, 유난히 혀가 잘 도는 것 같아
섣불리 파고들다간 뼈아픈 앙갚음을 당할 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이제 프리슬란트 산맥의 등, 그 중턱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혼자 돌아가길 바라다가, 조난이라도 당해버리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 문제가 일어나버리겠지
물론 엘디스가 물러서는 일은 일은 없겠지만
엘프가 설산 속을 혼자 행동한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야
엘프, 숲의 백성으로 불리는 그들이지만
나무들이 다 자라 있으면, 어디에든 기거하는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그 거주지는 극히 미미한 범위 뿐이였다
이들이 선호하는 곳은 기후 변화가 적고, 따뜻하며 온화한 곳
그러면서도 주위 세계와 동떨어진 지역이였다
그런 의미에서 공중정원 가자리아는 그야말로 엘프계 왕국에 어울렸다
엘프라는 종족은 말하자면, 불변에 능한 종족이다
몸도, 목소리도, 사상도, 삶의 방식조차도
그 모두가 일생 동안 거의 바뀌는 일이 없다
그들은 수백을 헤아리는 일생 내내,
단 한가지를 믿고, 단 한가지를 이룬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엘프는 변화라는 개념을 싫어하며
그들이 인간이라는 종족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 일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곧 몸도 목소리도 변모해서
사상 또한 하루아침에 변해버리는 종족이였다
이는 엘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엘프는 인간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얼마나 변덕스러운 녀석들인가, 도대체 말이 통하는게 없어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생각하겠지
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녀석들인가,
수십 년이 지나도 왜 생각 하나 바꾸지 못하는가
결국 엘프와 인간은 대화하는 말만 같을 뿐
그 본질은 서로 같은 것 하나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변화를 심하게 혐오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살갗을 뚫고 온몸을 옥죄는 극한은, 어금니를 드러낸 위협 그 자체 일 것이다
단지 그 자리에 눌러앉기만 해도
둔탁하게 느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잇을 수 없다
원래부터 극한에 살았다고 하면, 그것은 별도이겠지만 말이다
엘프의 옆모습이 어딘가 창백해 보였다
엘디스는 나도 모르게 긴 손가락으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서로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그녀의 손끝에서 차가운 냉기가 느껴짐을 알 수 있었다
"뭐, 거인의 잠자리라 칭해질 정도니까
엘프와 궁합이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닐까?"
피에르트가 검은 머리에 엉킨 눈가루를 손끝으로 털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눈 속에서도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머리카락을 추스른 그 모습은, 약간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피에르트 또한 동방의 인간이고
추위에 강하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녀의 안색은 엘디스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엘디스는 피에르트의 말에 한숨을 내쉬듯 답했다
"거인이 엘프의 천적이라는 것은 아주 먼 얘기야
그렇게 치면, 마인도 예전에는 인간을 포식하는 쪽이였어
정말 인간이라는 종족은 달라지는게 특기인가봐"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검은 색과 파란 색의 시선이 한 순간 교차된 것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피에르트와 엘디스
아무래도 이 둘은 서로 잘 맞물릴 성질이 아닌 것 같다
아까부터 이따금씩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마법을 다루는 자와 정령술을 다루는 자의 본질이 지금 드러난단 말인가
적어도 지난 세계에선 둘 다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그러보고니
지난 세계의 엘디스는 상당히 정신이 나간 모양이였다
인간과의 관계는 거의 없었기에
그렇다면 지금의 그녀의 행동이나
사람과의 접촉 방식이 변모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지 모른다
게다가 달라진 것은 엘디스 뿐 만이 아니다
약간 이쪽에 기대려고 하는 피에르트도
우리보다 앞에서 양양하게 은발을 흔들고 있는 카리아도
모두가 마치 정신에서 뭔가를 빼내 버린 것처럼
지난 세계와 달리, 크게 모습을 바꾸어 버린 것 같았다
본질적인 부분에선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분명 변화가 있다
그 변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등은
미래를 내다보는 듯한 눈도, 매사를 심판하기 위한 권능 같은
신의 능력도 갖고 있지 않으니, 일단 지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모두가 변해버렸어
그건 분명, 나 자신이 과거처럼 체념과 방관에 얽매이는
그런 꼴을 만들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겠지
순간 카리아의 은빛 눈이 이쪽을 돌아보았고
피에르트와 엘디스는 궁합이 맞지 않으면서도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지금 모습만 놓고 보면
더 이상 과거의 잔재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의 일 따위는 모두 내 꿈이였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버리고 싶어지지만
그래도 그들과 있으면. 아무래도 생각나버린다
눈꺼풀을 살짝 감으면,
아직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없고,
동경에 손을 뻗어도, 손가락 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던 그 시절들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 했다
도저히 한마디로는 다 말할 수 없는 그 광경
과거의 유뮬이라고 할 기억들이 아직도 내 안에 있었다
아아, 이게 무슨 꼴이람
카리아 버드닉, 피에르트 볼고그라드, 엘디스
일찍이 내가 애태우고 동경했던 그들이
지금 나 따위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나의 의식은 예전의 여로 안이라니...
참으로 무섭구나
과거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물감을 덧발라 준 곳에서
기분 나쁜 진흙이 베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야
언제까지나 그것들을 주시하고 있을 순 없다
억지로라도 그 진흙을 파헤쳐서, 밟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혁혁한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일은 넘어서야 할 것이야
내 소꿉친구도 분명히 그런 말을 하겠지?
가자리아에서 시궁쥐의 목을 비틀고
베르페인에서 겁쟁이의 발밑을 잘라내버리고
그렇게 해서 서니오 전투에서 과거의 자신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뿐
예전의 여로
구세 여행을 매듭지는 것
남은 선택이란 이것 밖에 없어
언제까지고 과거로부터 외면한 채,
슬금슬금 도망다니면서 얻는 안녕이란 것이
번번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알류에노의 손도 잡아 줄 수 없을꺼야
허리 밑의 보검이 달그락, 욱신거리듯이 소리를 냈다
시야의 끝에, 이전 여로의 목적지 중 하나였던
오래된 대신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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