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성 연합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43화 - 모든 서곡 - 본문
갈라이스트 왕국 최북단, 스위프 요새.
본래의 주인을 잃은 이 요새는 이상하게도 쓸쓸함을 더해갔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병사들의 거친 한숨과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외벽 상부,
눈이 내려 쌓이는 양판을 발바닥으로 두드리며, 도레는 입을 열었다
건조한 한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약간 경련했다
"...장군, 원군이 도착했습니다
국군과 귀족 사병 합쳐서 6만 정도
기병과 보병, 일부 마법병도 섞여 있습니다"
도레는 본래 발레리 브라이트니스의 부관이지만,
그녀가 부재중인 지금 요새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임시 주인을 보필하고,
이 보루의 거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장식에 불과한 장군과 비교하면,
실질적인 집정자는 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표면상으로 장군직을 맡고 있는 남자는,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임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던건지 도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과묵한 인간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런 남자가, 오늘 이 순간만큼은 입을 열며 말했다
"병사들에겐 불행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잘 와줬다고 격려해야 하는 것이 좋을까"
기운이 없는 목소리였다.
임시라도 갈라이스트 왕국의 장군이 할 말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쪽이냐 하면 문관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것.
그도 그럴것인게 도레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본래 정치의 길을 목표로 했던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사고 방식도 무관의 것이 아니었고.
겉으로 보기에 인상도 싹싹했다.
그런데 어째서 무관, 장군직 같은 걸 하고 있는 건지
그것까지 조사할 생각은, 도레에겐 없었다.
어차피 집안 상황에 의한 것이라던가, 그러한 배경 밖에 나오지 않겠지
늘, 귀족이란 그런 법이였다.
하지만, 이 때 도레는 옆에 선 기운없는 훤칠한 남자를 핍박하거나,
모멸의 감정을 부딪히려고 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존경심에 가까운 마음조차 들었다.
이유는, 한가지. 저걸 앞에 두고, 그는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눈 사이사이로 보이는 그것에 도레는 시선을 두었다.
그것은 처음 봤을 때, 거대한 나무이거나 죽은 유적처럼 보였다
시선을 들고, 더 올려다보며, 하늘을 올려다볼 정도가 되어야
정점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건축물
담쟁이 덩굴이 얽히고 이끼가 끼고, 썩은 곳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세월이 흐른 것으로 보였다.
인간의 거처라기 보다는 엘프의 주거에 가까운 것일까.
뭐라해도 그건 거대했다.
적어도 스위프 요새의 외벽에서 보아도 올려다보지 않으면 안될 정도.
그것이 지금, 조금씩 이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렇다, 거대한 그것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였다
처음엔 모두가 잘못 본 거라고 말하며,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마수가 사용하는 환술이나 마법이라고 쑥덕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모두가 그런 말을 주워담지 않게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버린 것이였다.
피부로 느껴지는 위화감에서. 눈에 비치는 실상에서.
그리고 귀에 남는 기어오는 소리에서.
저건, 틀림없는 현실이라고.
요새 거대 괴수 제브릴리스
훗날 그렇게 불리며, 과거 대재해의 상징이 되었던 그것.
삼림도, 건축물도, 짐승도, 사람도. 모든 걸 짓밝아가며 진격하는 재앙
그저 먹어치우고, 그저 낭비하는 그 거대 괴수가,
아직 이름도 없는 채 스지프 요새로 다가왔다.
그리고 주위에 다양한 마수 무리를 데리고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과연 저게, 군대라는 인간이 모였을 뿐인
나약한 조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인가.
창은 겨누어봤자, 가랑잎처럼 날아가면서 끝나는게 아닐까
그 거대함은, 보는 이들의 전부에게 그런 생각을 상기시켰다.
대마, 마인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지금 분명히 보이는 곳까지 와있었다
이곳에 파병된 국군, 게다가 귀족사병은 무척 불행한 것임에 틀림없다.
도레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들에겐 더이상 싸울 상대는 없다.
그저, 그 몸을 가지고 막아내야 할 재해가 있을 뿐
재해에 어떻게 인간이 대항하면 좋은 것인가.
그저 참고 견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걸 기다릴 뿐
만일 재해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재해와 동급인 존재 정도 일 것이다
눈이 도레의 머리카락에 얽히고, 뺨을 때렸다.
"날씨가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장군
국군의 지휘를 맡아주셔야 하잖습니까"
장군이라 불린 남자는, 도레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멍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내가? 내가 모든 병사의 지휘를?"
당연하지 않은가. 이곳의 장군은 한명 뿐이다.
지금까지는 마수군와의 소규모 국지전에 불과했기에,
딱히 대장이 없어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대군을 이끈다면, 그 지휘는 장군이야만 한다
반복하며 물어오는 남자에게, 도레는 하얀 한숨을 억누르며 끄덕였다.
본래라면 이런 남자가 장군이어서 괜찮은 건지 한탄하고 싶은 참이지만
저걸 앞에 두면,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나마 도망치지 않는 것을 위로로 여겨야 겠지
아니, 오히려 경의를 표해야 하려나
어쩌면, 단순한 어리석은 자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도레는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
"대리를 세우시겠습니까
아니면 병권을 주는 셈으로 위임을 하신다는지"
그렇게, 도레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말을 삼키듯이, 남자는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나는 몹시 못난 사람이지만, 그래도, 대장은 대장이다
귀족으로서 책임을 져, 의무를 다할 필요가 있지"
고귀한 자의 의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도레는 역시, 이 남자가 왠지 싫어질 수 없었다.
멍청한 남자는 취향이 아니였는데 말야.
장군으로서의 존경은, 자신의 주인에게 바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존경은 인간에 대한 경의다.
평소 고귀한 자의 권리라고 말하면서,
의무를 다하려 하지 않는 귀족은 어디든지 차고 넘쳤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놈들이야 말로 귀족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다.
귀족이란 것들은 권리만을 탐하고, 의무를 내팽겨치는 법이니
하지만 이 남자는 실로 드물게도, 스스로 의무를 다하겠다고 나섰다.
그러한 점에서 말하면 그는 충분히 존경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그래... 최소 나흘은 버텨보겠어
아무리 못난 나라도 나흘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야
설령 마수들이 외벽을 올라오더라도, 창을 들고 싸워주지
그러니까 도레..."
그 장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깨에 맨 외투를 휘날리며
도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얼굴은 어디까지나 상냥해 보였다
도레는 다양한 장군과 군인을 봐왔지만,
그와 같은 장군과 만난던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였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장군으로서 가져야 할 무언가를 눈에 떠올리며 말했다.
"특명을 내리겠다, 꼭 이루길 바란다. 국가를 위한 것이다"
그것만을 말하고, 작게 말아진 양피지를, 억지로 도레의 품속에 넣었다.
도레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었던 건, 이것이 마지막이 되엇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과묵한 인간으로 돌아와, 그리고 전장으로 향했다.
지금부터 6일 후, 요새는 거대 괴수 제브릴리스의 존재로 인해 함락되었다
일체의 기적 따윈 일어나지 않았으며
당연하게도 너도나도 모두 사망했다
일부 예비병력을 제외한 보루 내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전멸
국내 백성을 지키려고, 과감하게 싸운
그들을 기록할 만한 책은 없었다
왜나하면 누구도 목격자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대재앙이 그만큼 두터운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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