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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09화 - 도주하는 끝에 있는 것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4장 마인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09화 - 도주하는 끝에 있는 것 -

개성공단 2021. 4. 8. 21:06







전신이 불타는 듯한 비명과 격통을 토하는 가운데
빛나고 소용돌이치는 힘의 구체를
나는 시야의 정면에 넣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숨이 절로 가빠지는 그것은
정신만 차리면 의식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극소의 세계



통제자 드래그만이 빚어낸 마력 덩어리를 가리키며
보석 아가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저것은 마인, 아니 마성의 종류도 아닌 것이라며 말이다

아마도 지금에 와서는
드래그만의 흔적은 대지의 어디를 둘러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그 존재 전체를 중심으로 삼아 순전한 마의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세계라는 틀을 얻어 형태를 이루려 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주위를 삼켜, 영원히 확대를 계속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빛나는 구체라고 아가토스는 말했다

투명한 듯 하면서도 바닥을 알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그 모습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마족이라는 것이 태어나기 전
그 근원은 이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이 구체는 기세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루기스는 엘디스와 피에르트에게 가볍게 몸을 맡긴 채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서 도망쳐도, 언젠가는 우리를 덮칠거란 소리잖아"




소리를 낼 때마다 목이 쉰 듯 통증이 왔다
아무래도 발성에 필요한 기관이 망가진 것 같았다

내가 아가토스 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는 나를 깔보듯이 대답했다

말마디 마다 느껴지는 오만함은 그녀 특유의 것




"뭐 그렇게 되네
오히려 처음엔 왕도 전체를 집어삼킬만한 양이였다고
도망갈 수 있을 만큼 시간을 벌어준 내게, 감사하도록 해
뭐... 됐어, 이거는 갓 태어난 세상의 태초 같은 거야
알겠어? 도망갈 기회는 딱 한 번 뿐이야"



아가토스는 말을 마치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째서 이 마인님은 이렇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도주의 기회를 주시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단순한 호의가 아닐 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아가토스의 눈은 결코 인간에 대한
호의의 감정 따위는 떠올리지 않았다
하찮은 존재, 잔해나 돌멩이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기 때문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 말은 진실일 것이다
아가토스에게 인간이란 속일 필요도, 가치도 없는 상대
허언을 늘어놓을 성질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이미 결정되었다
숨을 한 번 깊이 쉬니
온몸을 관통하는 아픔이 어떻게든 나의 의식을 붙잡아 주고 있었다



두 팔의 감각은 더 이상 없었지만
다행히 주먹만은 꼭 보검을 쥐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보검이 그만한 힘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건 나보고 역할을 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나는 피에르트에 기대면서, 흔들거리는 양다리를 어떻게든 일으키게 했다
씹는 담배 하나라도 피고 싶은데, 역시 사치스러울까

옆에서 엘디스가 푸른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팔에 닿았던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가볍게 울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기스, 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거야?"




엘디스의 손끝이 내 팔을 잡아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이젠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엘디스의 푸른 눈이 크게 일그러진 것을 보면
떼어놓을 마음은 전혀 없는 듯 했다

말을 다 하지 않아도
그 말만 들어도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고 나의 여왕 폐하께서는 말하고 계시는 것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어차피 삼켜지면 죽는다는데 스스로 뛰어들러 가려는 것이다
곁에서 보면 자살 지원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닐 것이다
피에르트도 입 밖엔 내지는 않지만
내 팔을 잡고 그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선의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나는 가쁜 숨을 억지로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도망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때로는 필요한 일이며, 설령 굴욕과 분노에 시달려도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용감한 결단인 것이다

하지만, 도주를 선택한다면
그 때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도망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등을 보인 자는 반드시 언젠가 따라붙어 그 뒤를 찌를 것이다

아무리 체념을 보이고, 도망치고, 못 본 척해도
무시무시한 과거는 어느새 땅속에서 발을 붙잡아
최악의 결과를 억지로라도 강요시키는 법이였다



아, 생각해 보면
나의 일생은 그 반복일지도 모른다
단지 도망가고, 포기하고, 그렇게 최악의 형태로 이어졌다

지금도 그저 도망쳤던 무리와 억지로 마주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또다시 도망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숨을 헐떡이고 뺨에 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을음 냄새가 코끝을 덮고 있었다



"엘디스 지금이 최선이야
최악이란 상황 중에 지금이 최고인거야
언젠가 놈이 쫓아올 것이기에
나는 지금 여기서 앞을 향하지 않으면 안 돼"





게다가 지금 도망친다고 해도
언젠가 녀석이 따라온다면
난 그때까지 겁먹고 지내야 할 것이다
과거가 언제 이 어깨에 손을 대는가 하고
마음속을 얼어붙게 한 채 하루하루를 지내게 될 것이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않겠어



보검 끝을 땅으로 향한 채
발을 한걸음 앞으로 내밀었다
몇 발짝 앞선 곳에 세계라 불리는 구체가 있었다

세계는 주위를 휩싸듯 바람을 발하고 있었다
옥좌 사이에 휙 하고 바람 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젠 주변 소리를 듣기 힘들 지경이였다

하지만 그 바람을 가르듯이 한 줄기 목소리가 흩날렸다
늠름하면서도, 뭔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끔찍한 일이군, 하지만 나쁘진 않아
네가 앞으로 가겠다면, 그것을 위한 길은 내가 만들어 주겠다"




순간 검붉은 색의 일격이 날아갔다
허공을 단절하며, 세차게 나아가는 그것은

옥좌 위에 있는 구체를 향했다
드래그만이 만들어낸 극소의 세계
마의 그릇을 깨뜨리려는 듯한 기세로 말이다

당장 날아간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누가 해낸 것인가만은 잘 알 수 있엇다
목덜미에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나도 모르게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기스, 변명할 말은 준비해두었겠지?
내 마음에 잘 와닿을 수 있다면 좋겠군"




나는 입술을 비뚤어지게 만들며
살짝 어깨를 기울이게 한 채 대꾸했다



"조금은 용서해줘, 이래뵈도 신경은 썼을텐데"



바보야, 라고 그런 말이 귀에 들린 것 같았다
우리의 기사님이 바로 옆에서 검붉은 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발을 흔들며 작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은빛 눈이 엘디스와 피에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 놈들도 네 놈들이다
이 남자가 우리 말을 한 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라고 카리아는 덧붙였다

너무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뺨을 실룩거리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인데
설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줄이야
나도 어떤 충고나 말은 받아들이고 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피에르트도 엘디스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쩌면 카리아와 같은 의견일지도 모른다
순간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동료의 마음속 깊은 곳이라는 녀석을
뜻밖의 곳에서 보게 된 기분이었다

아가토스가 뭐하고 있냐는 듯
의아스러운 듯 눈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이 시야 끝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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