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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18화 - 어이없는 악몽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5장 배덕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18화 - 어이없는 악몽 -

개성공단 2021. 4. 11.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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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건 피와 내장의 냄새
사람의 비명이 온 곳에서 만연했다
동화 따위는 개나 줘버릴 그런 광경이 있었다

눈을 부릅뜨니
시선 끝에서 절명하는 스승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놓쳤다는 이유로 칼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돌도끼에 짓눌리는 모습

그 모든 것을 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알던 사람이 부서지고 죽고 잃는 모든 것을
그런 악몽 같은 광경은 현실감이 넘쳤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여하튼 그것은 틀림없는 현실이었으니 당연할 것이다

거기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
적에게 부서질 것을 각오하고 용감하게 싸웠었나?
한바탕 으르렁대기라도 했었나?
절규의 소리라도 질렀었나?



아니... 난, 무엇 하나 하지 않았었다

할아범의 말을 면죄의 증거로
그저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만 했었다
은사의 죽음을 발판 삼아 살아남았기만 했다
참으로 훌륭하군...

아, 그때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난날 수없이 머릿속으로 되뇌던 그런 말이 떠올랐고
동시에 눈꺼풀이 열렸다
눈가에 미미한 열이 떠 있었다


머리, 그리고 온몸의 감각이 둔했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것에 싸여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몸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고, 호흡이 묘하게 거칠었다

가볍게 손가락을 뻗어 움켜쥐고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던 입김이 잔잔한 실내로 흘러내렸다

그리우면서도 지독한 꿈이었다
오랜만에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할아범이 나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목숨을 잃었고
그리고 그 원수조차 갚아주지 못했던 그 시절
이 손엔 아무것도 없고 존엄조차 없었던 그 시절을 말이다...

정말이지 싫증이 났다
가능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란, 과거에 생긴 스스로의 상처를
가능한 한 눈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따금 이렇게 가슴 깊은 곳에서 진흙처럼 기어나오곤 했다

뚜껑을 아무리 굳게 닫아도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는 법
과거란 머지않아 스스로 마주치게 될 운명이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품안의 씹는 담배를 찾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그저 허공만을 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티아에게 일시적이지만, 피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세상에, 나보고 살지 말란 말인가




"안녕, 루기스
잠에서 깨어나면, 우선 인사가 먼저 아냐?"





멍하니 눈을 뜨고 몸을 느슨하게 일으키니 머리맡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문득 올려다보니 검은 눈동자가 내 앞에 있었다

피에르트 라 볼고그라드
그녀의 총명한 눈동자가 좀 괴팍하게 가늘어져 갔다
왠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뭐지?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걸까?

옥좌의 한 장면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잠이나 깨기를 만연히 반복했던 탓일 것이다
아무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가 많았고
의식 자체가 둔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아침이구나 피에르트, 하지만 미인이 웃어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어머, 그건 네 태도에 따라 달렸지
뭐 아침 정도는 내가 갖다 주도록 할게"





피에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미소를 띠고 걸음을 움직였다
이왕이면 술 쪽이 좋았는데, 그 말을 하면
괜히 기분이 상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혼자 있으니 비로소 머리의 희미한 안개가 걷혔다
뇌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인, 통제자 드리그만과의 전투

그 승리의 저울은 수많은 행운과
참기 힘든 희생 끝에 인간 쪽으로 기울었다
아니면, 나처럼 모두 누더기처럼 시체가 되있겠지

그러나 승리를 얻었다지만 너나없이 만신창이였다
나도 그렇고, 동료들도 그렇고, 이... 왕도 자체도 말이다


창문으로 왕도의 거리로 가볍게 시선을 옮겼다
어딘가의 저택을 이용하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전망이 좋은 곳을 보면 꽤 값이 비싼 곳을 훔친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왕도는 형편없었다

영화를 자랑하던 큰길은 대부분 검은 색으로 바뀌었고
귀족들이 의기양양하게 마차를 몰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은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고,
그 사람 그 자체도 꽤 적어져 버린 것 같았다


물론 그 원인의 하나는 마성의 통치뿐만이 아니라
어느 할아밤이 쾌활하게 왕도에 불을 지른 것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마성의 소행이라고 되어 있다
승리란 멋진 것이다, 모든 악행을 적에게 덮어씌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도의 모든 것이 초라해져 버린 것도 아니었다
다 타버린 후에조차 새롭게 빛나는 광석이란 말도 있으니 말이다

그 중 하나가, 창문에서 보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상처 입은 대로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예복을 입고 시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공주 전하의 모습



그녀는 생소한 미소를 뺨에 띄우고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일찍이 독으로 불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청렴성을 그녀는 보여주고 있었다

적어도 도시 필로스에서 얘기한 그녀는
저런 인기쟁이는 정말 싫어하고 공정한 정치야말로
전부라고 말하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내용물이 바뀌기라도 한걸까
아무래도 다른 인간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당당하게 갈라이스트병보다 먼저 왕도에 입성했다니
그렇다면 갈라이스트 병사들은 궤멸당한 것인가?

어쨌든 본래 적이었던 문장교가
갈라이스트 왕국의 공주를 자칭하는 인간과
그것을 지지하는 귀족 제후까지 거느리고 있는 것이였다

그렇다면 왕도 시민들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실은 제일 먼저 마성의 병사들을
꺾어 문을 연 것은 갈라이스트병이지만
문장교가 거기에 편승시켜 공주를 옹립해 들어오게 했다는 등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소수일 것이다

시민은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선택하는 존재였다

요컨대, 왕이 버린 왕도를
먼 곳에 내던져 있던 공주 자신이 갈라이스트 군사를
데리고 구원하러 온, 정의와 사랑에 젖은 망상이
더 이해하기 쉽고, 그렇게 해서 구원이 있었다

이왕이면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하고 싶지 않겠는가
마성에 짓이겨지고 고단한 시민의 마음은
팍팍한 현실을 보고 싶지 않는 것이였다

물론 진실을 아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갈라이스트병이 끼어들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왕권을 좌우할 권리가 없다는 것일 뿐
필사적으로 대항하려고는 할 것이다


그래도 대다수가 환호한다면
진실은 쉽게 바꿔지기 마련이다
적어도 마티아나 엘디스는 그렇게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정치라는 것은, 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고 있으니깐
할 수 있는 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시 후 피에르트가 음식을 배달해 주었다
가지런한 검은 머리가, 상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요리는 따뜻한 국물에 토끼 고기와 야채를 함께 구운 것
왕도의 참상을 보면 놀랄 만한 사치일 것이다

침대 앞에서 그걸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손발이 잘 움직이는 것 아닌가, 혼자 식사를 할 수 있다니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예전처럼 온몸이 삐걱거리고 비명을 지르는 일이 없었다
약간의 위화감은 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상처를 입은 정도는 아니였다

이번에는 경상이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드래그맨을 상대로 난투극을 벌인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매우 가벼웠다

그리고 통증 보다 갈증이 강했다
뭔가가 부족한 듯, 무언가를 취해야 할 것 같은 초조감이 있었다
그냥 배고프다는 것과는 또 다른... 이게 대체 뭐지?

식사를 하면 그런 영문 모를 생각도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함께 식기를 손에 듬과 동시에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들어가겠다, 이제야 깨어났나 보군, 루기스"




엉겁결에 그릇을 손에서 미끄러뜨렸다
몹시 언짢아 보이는 고양이 같은 소리가 들렸다
더구나 인기척은 하나가 아니였다



악몽 한 번 더 꿔도 괜찮으니
그냥 다시 한 번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고
루기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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