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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81화 - 마의 발자국 소리 - 본문
대마 제브렐리스의 죽음과 메드라우트 보루의 함락
전쟁터 보다는 늦게
왕도의 정무실에 전해진 급보는
신왕국의 여왕 필로스의 의식을 한순간 튕겨 나가게 했다
아니, 그녀 뿐만이 아니였다
문장교의 성녀 마티아에 귀족 비오몽도르
정무실에서 집무를 보는 수많은 귀족과 관리들이 의식을 잃었다
"또 각하에 의한 선행부대가 조직되어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거의 도착했을 겁니다"
"알겠다, 전령은 내려가서 좀 쉬도록"
필로스는 외안경을 손으로 집어 들고는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이제서야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몸 속의 피가 돌아가는 것과
자신의 숨 하나 하나가 폐에서 모이는 것이
유난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대마 제브렐리스의 죽음
정말 그 괴물이 죽은 건가?
수많은 영웅용사를 잡아먹고
대지를 짓밟아 국토를 휩쓸었던 그 큰 마가...
하지만, 정무실 안에 환성은 없었다
"하아,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믿기 어렵습니다만"
처음 중얼거린 것은 비오몽도르였고
그것은 그 자리 모두의 심중을 대변하는 말이였다
이곳은 국가 정무 중심지
급보가 깔리면 잘못된 보고나 정보가 날아드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이들을 가려내고 불필요한 것은 쓸어버리는 것도 이들의 몫
하지만 비오몬도르의 말은 회의의 빛을 띠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굳이 말을 뱉은 것 같았다
그는 목소리를 떨고, 눈가를 짓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진실이라면
우리 조국을 휩쓸고 다니며
왕도를 짓밟으려 했던 괴물이 죽은 겁니다
그 마가, 제브릴리스가, 죽었습니다, 폐하!!"
비오몽도르를 포함한 귀족과 관리들
그리고 필로스조차도 참지 못할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갈라이스트 왕국을 조국으로 하는 자 모두가 그랬을지 모른다
다른 나라 사람과 갈라이스트의 인간 사이에서는
제브렐리스를 향한 감정은 격절했다
신화에 나오는 세계에서 깨어나
인지 일체를 초월하여 유린하는 악
대재해를 일으켜, 수많은 마인들이 부활한 요인인 것
갈라이스트 국군 6만을 삼켜 대륙에 마의 시대를 일으킨 대마
대재해에 의해서 친족을 잃은 사람도 있는가 하면
친구를 빼앗긴 사람도 있었고
사랑하는 연인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브렐리스가 부활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다시 대마, 마인이라는 마의 위협에 떨어야 했다
갈라이스트 왕국에 이르러서는 왕도를 잃고
망국이 될 미래마저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끝났다
아직 마인은 있다
마수가 없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장 큰 상징이 멸망한 것이였다
"사...살았다! 영웅이 승리했다!"
귀족과 관리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루기스를 못 믿고 있었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었고
이제는 왕도에서 죽음조차 각오하고 있었다면, 사실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인게
왕도에는 북쪽에서 피난해 온 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그 그 마가 얼마나 거대한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였다
그것을 상대로
어떻게 인간이 이길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겠는가
아직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며, 감정은 계속 분출됐고
안도와 경악과 회의심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영웅을 맞을 준비를
게다가 메드라우트 보루가 함락된 이상
방심을 하진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성과의 싸움을 한 숨 돌렸다 하더라도
같은 인간과의 싸움은 코 앞에 까지 다가온 것이니까요"
비교적 냉정했던 마티아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그녀의 눈이 이 자리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철저히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말은 사실
왕도로 향하던 두 개의 창 중
제브렐리스라는 창이 사라져도, 구왕국군 6만은 건재하다
"네에, 그렇겠지요, 성녀 마티아!
하지만 상대는 인간입니다!
마수가 아니라는 것이죠!
패배한다고 해서 내장을 뜯기는 공포에 떨지 않고
우리는 사람으로서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오몬도르도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전장의 냄새에는 민감할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격앙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였다
대마 제브렐리스가 출현한 이후
일련의 전역들은 더 이상 하찮은 영토 다툼 등이 아니었다
대륙의 패권을 건 마와 사람의 전역이었던 것이다
필로스가 간신히 감정을 가라앉히고 테이블 위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아뇨, 성녀 마티아의 말대로
구왕국군은 멈추지 않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승리하지 않으면, 기다리는 건, 처형대 뿐"
까딱 발꿈치를 들고 일어선 필로스의 목소리에
비오몬도르를 비롯한 귀족과 관리들이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모두 여왕을 받들고 있던 건 아니였지만
볼버트 왕조에서의 승리와 이번 제브렐리스 토벌로 인해
모종의 통일의식이 그들 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우리 것이라는
순박하기 짝이 없는 의식이였다
필로스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손가락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전역이 될 것입니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말이지, 그렇다면 승리하도록 힘써라!"
필로스의 말에 따라 관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외안경을 번쩍이며 내려다본 지도 속에서
군의 움직임을 상정했다
적은 6만 대군
수천의 별동대가 먼저 도착한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맞설 수 있는 전력은 아니였다
왕도는 부흥을 추진 중이지만
이미 한 차례 마성에 의해 함락된 도시
방비도 완전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왕도의 방비는 원래 주변의 보루와 연계되어야만 효력을 발휘한다
왕도 단독으로 버틸 수 있는 구조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적군을 끌어당기면서 최대한 버티고
루기스의 귀환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쪽의 목적이 왕권 탈취인 이상
과녁은 왕도에서 변하지 않을 것이니까
지금부터는 사람과 사람의 승부
하지만 문득 지도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필로스는 뭔가 으스스한 느낌을 등줄기로 느꼈다
왜 이러는 거지?
마의 시대는 끝났다
더 이상 대마 제브렐리스나 브릴리간트에
견줄 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리 마인이 위협적이라 해도
그들이 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런데도 끝없는 한기와 두려움이 그치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신화의 시대는 끝났을 텐데...
지금 이때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신화 자체가 다가오는, 그런 소리가
들린 기분이 필로스에게 들렸다
"폐하, 늦었지만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좀 믿기 어려울 것이지만요"
옆에서 귀띔해 준 것은 마티아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좋아요, 들려주시겠어요, 마티아?"
마티아는 잠시 눈을 흘기더니 매서운 눈망울을 붉혔다
"대성당 세력에 있는
호국관들의 문서가 여기에 와 잇습니다
도장도 모두 진품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달빛이 쏟아지는 삼림 속
황금빛 머리칼에 같은 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대성교의 수호자 헤르트 스탠리는
정성스러운 장식과 황금이 박힌 검을 내리쳤다
그 검섬의 날카로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했다
그는 지고를 상상케 하는 몸짓으로
마수의 피를 눈에 빨아들게 했다
그것이 몇 번 계속 반복되었고
그를 둘러싼 새 모양의 마수는 작지만 압도적인 다수
그래도 황금의 그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떨어져 갔다
한 번, 두 번... 열 두번...
헤르트는 등을 보이기 시작한
새 모양의 마성을 계속해서 베어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도 쉬지 않고
칼로 피를 토해내게 하는 모습을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또 마수 살해인가? 헤르트"
"가르라스 님"
수호자 가르라스 가르간티아가
헤르트의 모습을 꺼림칙하게 노려보았다
그것은 증오라기보다는 못마땅하다는 눈치였다
반면 헤르트는 가르라스의 태도를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그렇습니다, 다만 또, 라고 말씀하시면 안되겠지요
마수 살해는 우리들의 의무이지 않습니까?"
가르라스는 그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감회는 없고, 과잉 된 표현도 없는 말
전에 프리슬라트의 대신전에서 함께
성당 기사로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가르라스는 짐승 같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마수의 둥지에 스스로 들어가
토벌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핑계겠군
내 부하였다면 당장 후려갈겼을 거야"
"네? 필요하다면 마수의 둥지에 뛰어드는 것은
당연한 선택 아닌가요?"
"필요하다면..."
하지만 이 토벌이 필요한 일이라고는
도저히 가르라스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인근에 도시 촌락은 없고
어디까지나 단지 군이 지나갈 때
주위의 삼림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는 것뿐
마수 피해도 보고되지 않았기에
둥지에 뛰어들 정도의 의의가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헤르트가 벌인 일은 악이 아니었다
정의롭고 오히려 선일 것이다
하지만 달빛 아래서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면서
수많은 마수의 시체속에서 보통의 표정을 떠올리는 헤르트가
가르라스에게는 도저히 정의의 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이런 놈은 아니었다고
가르라스의 예민한 본능이 말했다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신가요 가르라스 씨?"
아픈건 너 아니냐는 말을 가르라스는 겨우 참았다
"제브릴리스가 살해된 것 같아, 문장교 영웅에게 말이야"
"대단하군요, 대마를 토벌할 수 있다니, 어떤 분이신가요?"
순수한 악의도 빈정거림도 없는 말
그는 너무나 하얗다고 가르라스는 생각했다
너무 순진하고 순수해서 그래서 검에
일체의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없었다
가르라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나도 기회가 없어서 말이야, 싸운 적이 없지
너는 서쪽에서 마인을 죽였는데, 그 녀석은 왕도에서 죽인 것 같더군
게다가 동쪽에서 용을 죽이고, 다음은 제브릴리스....
그게 다 사실이라면 그 녀석도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가르라스는 굳이 헤르트를 보고 말했다
너도 인간이 아니지 않느냐고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헤르트에게, 그러한 류의 판단은 통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름이 뭔가요, 그 분은?"
맥이 빠진 듯 가르라스는 한쪽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눈치였다
"너도 알잖아, 루기스
아... 루기스 브리간트라고 불렸던가?"
그 이름을 듣고 헤르트는 황금빛 눈동자를 부릅떴다
약간의 당황마저 보인 것 같았다
"과연, 그와 만난다는 게 기대되군요"
폭설나비가 달빛 아래를 날고 있었다
새로운 마의 시대 발걸음 소리는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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