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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83화 - 명예식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8장 영웅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583화 - 명예식 -

개성공단 2021. 5. 24.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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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때문에 시야가 흔들렸다
정신이 정상이 아니어도 그저 목적을 향해
돌진해 주는 말이 지금은 고마웠다
요 몇일은 같은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신왕국군 2만 명과 부상병을 거느린 왕도로의 귀환은 너무나 순탄했다
눈 위의 행군이면서도 마수의 습격을 받지 않고
가장 두려워하던 구왕국군과의 조우에는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제브렐리스를 살해함으로써
모든 어려운 일은 해결되었다는 듯이
일체의 장애물 없이 신왕국군은 왕도에 도착했다




"......젠장할, 뭔가 안 좋은 기분이 드내"




나는 왕도 아르셰를 시야에 넣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과거처럼 위광스럽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일정한 방비를 갖춘 모습은 모종의 위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뭔지 몰라도, 그것이 더 기분이 안좋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지금은 무사히 돌아온 걸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옆에서 재갈을 늘어놓은 피에르트가
검은 눈동자를 더욱 크게 만들며 말했다
그 모습에는 조금의 안도의 빛이 보이고 있었다

주위의 병사들도 마찬가지
돌아가야 할 곳인 왕도가 눈에 띄게 있다는 것은
비록 군사라는 직업일지라도 가슴이 뛰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특히 비관적인 성격인지도 모른다



"......구 왕국군 놈들은 왜 이곳에 없을까
나는 그것이 제일로 두려워
좋은 일이 있을 땐, 대개 뒤에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지거든"


"그래? 우연히 그렇게 되어버린 것도 있지 않을까?"




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고삐를 쥔 손이 약간 저렸다
피에르트의 말도 분명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장 먼저 메드라우트 보루를 함락시킨
구 왕국군은 입지적 우위를 보였다
비록 6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강행한다면 우리 군보다 먼저 왕도를 포위할 수도 있었을 테고
반대로 평지에서 기다리며 우리를 쳐부수는 방책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승패는 차치하고라도
호락호락 2만의 군사를 왕도에 넣어
수비를 굳히게 하는 것보다 그 쪽이 훨씬 나을 것이 뻔하다

특히 발레리라는 폭력의 화신이
그런 기회를 놓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전술에 있어서 천재였으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상처없이
한 번도 전투를 치르지 않은 채 왕도에 도착하고 말았다

목에 초조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예상대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싫지만
예상이 빗나간다면 상상을 초월한 최악의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였으니까

또한 발레리가 만약 전투를 걸었다면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의 원수가 풀렸을 수도 있는데 말이ㄷ

리처드 할아범은 또다시 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잃었고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유유히 왕도까지 귀환하고 말았다
그 사실이 너무나 견디기 힘든 상처가 되어
질퍽질퍽 정신을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였다



"...루기스"




피에르트가 투덜대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면 그녀의 미려한 입술이 물결치면서
얼굴에 선을 넣어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겠지만..."


"아냐, 얘기하도록 해
그래, 차라리 밝은 화제가 낫겠지, 무슨 일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을 꺼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 혼자만으로는 생각이
좋은 방향으로 굴러갈 것 같지 않았으니 말이다

할아범도, 구왕국군도...
그렇게 적군에 있을 헤르트 스탠리도
저마다 뒤얽혀서 내 목을 조르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피에르트가 날 챙겨준다는 것은 알고 있다
요 며칠 동안의 일을 생각하면
이제는 내가 그녀를 신경써야 할 차례인 것 같다



"밝은 화제야"




피에르트는 입술에 가느다
 손끝을 갖다대며 순간 말을 망설이다가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 카리아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그건 밝은 이슈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나도 모르게 뺨이 실룩거렸다
아니, 별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피에르트트의 말에는 놀라운 예리함과
미소와 정반대의 절실함을 간직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도 카리아 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의지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충분히 의지하고는 있는데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뭘 말이야?"




아주 예쁜 미소를 띄우고
게다가 그것을 조금도 일그러뜨리지 않고
피에르트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였지만
기묘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림이기도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예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갖지 않았을 위용을
피에르트의 말 마디마디에서 느끼는 것 같았다
마치 빈틈을 보이면 이쪽의 목덜미를
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가차없음 말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에 하자, 이제 왕도야, 피에르트 앞을 봐주겠어?"




군인들이 왕도 시민의 영접을 받으며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음색이 아직
나름대로 거리가 먼 나에게도 들려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들 앞에서
기묘한 문답을 주고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으로 납득하기 바랬다




"흐음... 나중에? 알았어"



 
피에르트는 이윽고 한두 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앞을 보고 있었다




"내 앞에서 언약이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야
네가 나에게 한 약속, 난 하나도 있지 않았어
자, 지금 얼마나 약속이 밀려온 걸까?
너도 기억하고는 있겠지?"

절대 밝은 화제는 아니었다
나는 등줄기에 서늘한 것을 느끼며 고삐를 다시 잡았다





 ◇◆◇◆





귀환 즉시 거행된 것은 개선식과 명예식 두 가지였다
의식용 무대는 비로소 부흥한 교회를
문장교용 성전으로 다시 단장한 것
수일 내에 완성한 것 치고는 훌륭할 것일 것이다

군은 왕도를 행진하며 승전보를 전하고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한때의 영광에 취했다
명예식은 여왕에게 그의 승리를 보고하고
말 그대로 명예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였다

이것은 곧 의식이였으니



대재해는 끝났고 시대는 변했다
무엇보다 갈라이스트 신왕국이야말로
대마 제브렐리스를 토벌한 것이라고
내외에 보여주기 위한 의식

아직 정세는 안정되지 않았다
구왕국군과의 대립은 눈앞에 다가왔다
서로 떠드는 시민들도 지금이
아직 전시인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더욱 기틀을 다지기 위해
승리 후 식전만은 치러야 했다
우리는 승리하였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여왕 필로스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일지 모른다

이렇게 주장을 계속하지 않으면
그녀는 언제 옥좌에서 굴러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였다

성전 안에서 필로스는 옥좌를 본뜬 의자에 앉으며
늘어선 관인과 군인들을 향해 공적이 있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은 아직 명확한 논공행상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 장이 안정되면 상응하는 상을 준다는 계약 같은 것일 것이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불릴 때마다
누구나 드디어 승리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원수 루기스!"




필로스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 울려퍼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등줄기가 서려 뺨이 오므라들었다

필요한 일인 줄 알면서도
역시 나는 의식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뻔한 일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어려웠다

나는 주위의 시선을 뿌리치며
군복 차림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명예식은 본래는 예복으로 참가하는 것이지만
오늘 만큼은 군복인 사람도 많았다

시간이 많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예복이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성전의 최고 자리
나는 옥좌에 앉은 채로 있는 필로스 앞에서 시중을 들었다
여느 때의 어딘가 깊은 목소리가 아니라
왕으로서의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큰일을 해내셨군요
반드시 당신의 공훈에 보답할 것을 왕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전시의 제1공을 그대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시오"




바라는 것, 그것을 내게 물으니
순간적으로 생각이 흔들렸다

영지나 작위는 분수에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도 주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돈이 필요하냐 하면
골목에서 자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삶은 기대 이상이였다
소망을 물으면 언제나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딱 한 가지만 갖고 싶은 게 있었다
다른 어떤 것을 제쳐두고라도 필요한 것...




"그럼 폐하, 한 가지 받고 싶은게 있습니다"


"계속해보시오"




필로스는 자리에 앉은 채
다소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앞머리를 훌쩍 흔들고
나에게만 알 수 있는 정도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일체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리처드 퍼밀리스의 명예를
그는 한번 용사의 칭호를 대성당과 왕국으로부터 받고
자기 스스로 잃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나가, 그가 용사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용사였음을 찬양하고
그를 따르는 모든 장병들을 국가의 영웅으로
사서에 새겼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명예의 전사자가 아니라
승리의 용자로 이름을 새기란 말이오?"


"네, 결코 그의 이름이 깎아내려지는 것을 업도록 해주십시오"




이런걸 할아범이 원치 않으실거란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할아범도 그 장병도
전사자로서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명예는 조금 주겠지만 그래도 성채는 함락되고 말았다
다수에게 소수라고는 하나 그것은 사실

그렇게 되면 생각하게 되는 것이 하나

어쩌면 언젠가는 사실이 왜곡되고
할아범의 이름은 패군의 장수로
이름 모를 무리에게 폄훼될지도 모른다
그를 알지도 못하는 패거리에게 놀림당할지도 모르는 것이였다

그런 일은 설령
이 나라가 무너지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

명예로운 사람이 어디에 있고 용자가 누구였는가
나는 그것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좋아요, 루기스!
당신의 나에 대한 충성을 지켰으니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당장 사서가를 여기에!"




필로스는 순간 말문이 막히긴 했지만
내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나는 그제서야 안도를 입에서 흘렸다

이것으로 할아범이 적어도
부당한 취급을 받는 일은 되지 않겠지
나는 마지막 예만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필로스랑 순간 시선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달려온 사서가를
손으로 제압하고 나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왕의 것이라기보다는
필로스 자신의 말 같았다




"지금은 이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부터 최후의 전역을 위한 준비가 시작될 것이오
어떤 형태로든 모두가 바쁘게 될 것이오
그것만을 유념해 두시길"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나는 한 번 절하고 나서 발길을 돌렸다
교회에 설치된 승리를 알리는 종소리가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종소리는 어딘가 장엄한 울림을 동반하며
이제 다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낯익은 고향의 종소리가 지독하게도 불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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