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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52화 - 찬란한 적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0장 혼란도시 필로스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52화 - 찬란한 적 -

개성공단 2020. 5. 3. 14:04

그 자리에 있던 자 누구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필로스 도시병도, 문장교의 도시병도

모두가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진 것 처럼,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단지 조용한 뜨거운 호흡만을 그 자리에서 흘리고 있었다

 

어쩌면 누구나 움직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날 죽이겠다는 거냐?"

 

으스스, 미지근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진다

마치 장부 자체를 차갑게 만드는 듯한 그 목소리

땅을 기어다니는 무언가가, 발끝에서 떨림으로 바꾸어

등줄기를 오르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 한사람, 로조만이 눈을 깜박이고 잇었다

눈 아래에 서 있는 모두가, 저 악덕한 괴물에게 세뇌되고 있다

아니, 정신 뿐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저 괴물에게 잠식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거야

 

이게 무슨 일 인가,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건가?

자신의 목소리가 저들에게서 지워져 버리다니

 

로조의 심장이 울부짖으며 고했다

그런가, 저건 사악한 것도 아니고, 악덕한 것도 아니다

저건 그냥 적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자신의 적이 아닐 수 없다

 

로조는 눈을 부릅뜨고, 루기스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은 입 밖에 내기도 꺼려지는 추악한 감정

 

그는 그 감정을 분출하며

입에서 열이 날 정도로 말했다

 

"탄생과 죽음은 사람에게 부과된 의무다!

사람이 사람인 이상 불사란 있을 수 없다!

제군들 창을 앞으로!"

 

창을 앞으로, 그것이 필로스 도시병에게 고하려던 일종의 신호였다

 

만약 문장교 병사들이 일체의 자비를 베풀지 않고

악덕한 자에게 복종한다면, 이제 창으로 최후의 자애를 베풀 수 밖에 없다

그 죽음으로써 속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살하라

 

실제로 필로스 도시병의 수는 문장교의 수를 훨씬 웃돌았다

로조가 말한 대로, 창을 그저 앞으로 내밀면 그 자체로

전투의 대부분은 결말이 날 것이다

전혀 피해가 없다고는 말 할 수 없겠지만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수는 용이하게 개의 강대함을 웃돈다

설령 루기스란 자가 아무리 흉악한 존재라고 해도

압도적인 다수에게는 항거할 수 없다

그건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이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람의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면

세계는 더 단순하게 움직일 것임에 틀림없다

 

필로스 도시병들은 로조의 신호를 듣고도

다리는 움츠러들게 하면서, 결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누구나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를 앞에 둔 듯한 표정으로, 온

몸을 얼어붙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신앙의 열을 가졌을 머리는, 슬플 정도로 깨어 있었다

 

필로스 도시병, 그들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순전한 공포

 

확실히, 자신들이 우위인 것은 틀림없다

적을 완전히 에워싸고, 한 걸음 더 디디면

창끝은 적의 살을 완전히 에워싸고 말 것이다

목숨도 쉽게 앗아갈 것이 분명햇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얼룩 같은 것이 남아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 수록 크고 짙어져 갔다

그것은 바로 한 가지의 의심...

 

저 루기스란 자는 정말로 우리로서 죽일 수 없는게 아닐까

 

그는 대성교가 대군을 써서라도 죽이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신이 내린 군사로라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사악한 룡인지 뭔지의 화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을 향해, 창을 꽂는 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한번 가슴속에 싹튼 의심, 공포라는 씨앗은

곧 망상으로 바뀌고, 가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한번 움츠러들어서 도망간 인간의 심장만큼

그들의 정신은 이미 붙잡으려고 해도, 

거뜬히 바람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법이였다

 

누구나 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싸울 수 없는 자가 세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많은 사람이 두려움을 참고 싸울 수 있는 세계란

그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 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누르고

죽일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두려움이다

 

"자치민 제군, 배덕자가 되고 싶은 것이냐?"

 

로조의 상당히 느긋한 어조의 목소리

도시병들은 귓구멍에 달라붙은 듯한 음색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배덕자,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오명

그 여윈 이름을 얻은 끝에 있는 것은

단지 매일을 짓밟히는 나날 뿐이다

도시병의 머릿속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로 기절할 때까지

몽둥이로 맞고 있던, 필로스 트레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필로스 트레이트가 실각한 지금

이제 로조는 도시의 최대 권한을 가지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대성교 사제와도 약정을 교환하고 있다면

배덕자의 오명은 그의 손가락끝이 휘두르는 대로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로조가 지금 말하는 것이다

문장교와 적대하며, 창을 들지 않는 자는

배덕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필로스 도시병 모두가 눈을 명멸 시켰다

이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거야

 

도시병은 초조한 마음으로 각오를 정했다

문장교도를, 저 악덕한 자를 쳐부수자

그것이 내 몸을 지키는 길이야

그리고 손을 강하게 잡고, 창을 쭉 내밀려고, 다리를 반 걸음 내딛는 순간

 

선두에 나섰던 한 사람의 머리가 핏방울과 함께 터졌다

 

딱딱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머리를 도려내고

그 사람의 목숨을 쉽게 앗아갔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뿜어져 나온 따뜻한 피가

하얀 한숨을 흔들고 있었다

 

도시병의 목숨을 앗아간 정체는

투척도끼라고 불리는 무기가

병사의 머리를 찢은 채로, 툭 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땅을 친 것이였다

 

도시병도, 문장교병도, 또 로조조차도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멈추었다

말의 울부짖음과 하나의 목소리만이 공중을 가로질렀다

 

"명중"

 

위협적인 의도인 듯, 거리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강철로 만든 갑옷을 온몸에 걸친 여성

그녀의 손 끝엔 손도끼를 몇개씩이나 가지고 있었다

그 뒤엔 기병과 마차 여러 대를 거느린 것이 보였다

 

필로스 도시병들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 강철을 두른 모습이나, 거느린 사람의 모습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문장교의 병사가 아니라

오히려 정규병이라기 보단 용병의 종류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은 우리 대성교의 편일 것이다

용병이라 하는 자는 항상 돈을 잘 내는 강자의 편이니까

 

그것이 불변의 이치일텐데

왜 그들은 문장교 편에 있는 걸까

그리고 하필이면 왜 이런 때에

 

역시 뭔가 잘못된 곳은 아닌가

 

그러나, 얼마 안되는 희망조차,

가득 찬 의심으로 털어 버리듯이

강철공주 베스타리누 게르아는 입을 열어, 소리를 뱉었다

 

"우리 베르페인 용병 연합

문장교의 휘하로 달려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루기스 님?"

 

그것은 추운 하늘 아래 맑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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