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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86화 - 돌고 도는 자들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1장 순례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86화 - 돌고 도는 자들 -

개성공단 2020. 5. 9. 05:32

옆에서 피에르트가 속 눈썹을 튀기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걸리는 게 마음에 걸렸다

 

"루기스, 카리아가 보이지 않아요

맹수 기사도 마찬가지에요"

 

어딘가 곤혹스러움과 망설임조차 실은 목소리

피에르트 치고는 희한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좋든 나쁘든 남에게 망설인다거나,

그런 나약함을 보이지 않는 성질이였다

 

머리맡에서 우러나오는 고뇌와 약한 마음이란 것도

어느새 스스로 씹어 삼키고 마는, 피에르트는 그런 인간이였...

 

아니, 그건 그냥 지난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야

나 스스로도 정말 어리석군, 언제까지 질질 끌 셈인가

 

예전의 그녀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녀는 피에르트 볼고그라드이긴 하지만

이미 내가 아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피에르트와 과거의 그녀를 대조하는 것은

무례 그 자체 일 것이다

나는 입술 끝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눈 밑에는 엘프의 화끈한 검은 안개가 떠올라서

대신전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 명성을 자랑하던 대성당 기사들이 맥 없이 쓰러지는 모습은

상쾌하기보다는 오히려 섬뜩해보였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리면 되는 것일까

뭔가 잘못 본 것은 없을까

그런 예감이 심장의 구석에 떠올랐다

 

물론 이 광경을 만들어낸, 엘디스에게 있어선

이런 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임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성당 기사조차 이런 꼴이라니

카리아나, 기사단장 가르라스 가르간티아 또한

검은 안개에 열을 빼앗기고, 쓰러져 버렸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오히려 어느새 두 사람이 어딘가 낯선 곳에 빠져버렸다기 보다는

가능성으로는 그 쪽이 훨씬 컸다

 

물론 어디까지나 보편적으로

 

그 두 사람은 보통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카리아 급인 인간은 검은 안개 따위에게

휩쓸려 버렸다고, 당연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둘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만은 확실했고

장소를 옮긴 것인지, 시야에 들어 오지 않을 뿐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둘러대자

피에르트는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리며 응했다

 

눈을 복도의 맨 안쪽을 응시하면서

 

"카리아는 내게 맡기라고 했고, 나는 부탁한다고 말했어

그렇다면, 그 말을 의심할 수는 없어

카리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적어도 내가 아는 카리아란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것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다소간 안부를 걱정하는 바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 놓고 떠든다면

그 녀석은 분명 입술을 삐죽거리며, 언짢은 듯한 기색을 보이겠지

그리고 언제나처럼, 내가 그것을 달랠때까지 결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 이렇게 하는 것이 옳겠지

 

피에르트는 그런 내 말에 잠깐 눈을 뜨고, 입을 다물더니

잠시 후 불쑥, 말을 흘렸다

 

"......그래, 카리아는 당신의 수호자이자 방패니까..."

 

수호자, 방패

특별히 내가 그런 말을 꺼낸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카리아는 그 직함이 무척 마음에 들어 보았다

 

그래서 나도 일부러 부정하려 하지 않았고

게다가 과거에 애태웠던 영웅이 지켜준다고 하니

이 얼마나 믿음직 하겠는가

조금 곁에 두는 것이 두렵긴 하지만 말이다

 

그 후에도, 피에르트는 뭔가 말을 계속 하려 했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순간 벌어진 게 보였지만

말을 필사적으로 선택하려고 한 결과

어떻게 정리되지 않았던 것 같다, 희미한 입김만이 공중을 휘저었다

 

어찌된 일일까

아까부터 상태가 이상해

 

말하라고 재촉할까도 생각했지만

의외로 말이란 것은 한번 막혀 버리면, 

억지로 끌어 올리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였다

특히 이런 전쟁터에서는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들어질 수 있다

 

게다가 말이다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리거나 

정신적으로 비뚤어진 것을 풀어주고 진정시켜 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냉정하며 제정신인 인간이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효과가 오르기는 커녕

더 상대를 몰아붙이고 말 것이다

 

나는 지금 냉정하지도 않고, 제정신도 아니다

 

나는 시야를 복도의 맨 끝에 둔 채, 입술을 억지로 깨물듯이 말했다

 

"게다가 말이야, 피에르트...아니 공범자 님

아무래도 태평하게 이대로 있을 순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입술이 전율하고, 온몸은 조인 듯이 호흡을 잃었다

 

나는 그것을 시야에 넣은 순간

체내에 있는 장기는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된듯 움직임을 멈추었고

핏기는 순식간에 물러가, 육체는 열이라는 것을 빼앗긴 것처럼

내쉬는 숨결마다, 모두 차갑게 만들었다

 

그래도 어찌된 일 인지

몸 어디에도 고통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가슴팍을 찌르는 듯한 것이 있을 뿐

 

눈동자를 부릅떴다

나의 몸 속에서, 착실하게 기능하고 잇는 것은 그 곳 밖에 없었...

아니, 그 부분만 움직이면 충분했다

 

시야의 끝, 복도의 맨 안쪽에

엘디스가 뿌려놓은 검은 안개 술식을

거룩하게 물리치는 황금이 그곳에 있었다

 

즉 그가 애태우며 동경하던 영웅과 성녀로 이르는 소꿉친구, 둘

 

눈이 가늘어지며, 볼이 절로 저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재회의 기쁨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뇌수 밑을 헤메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것만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되든, 실로 훌륭한 만남이다

 

과거의 여행, 땅바닥을 기어다니기만 했던 끔찍한 결별한다고 하니

마치 신이 적합한 장소와 상대가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엘디스에게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놈이라도 이 검은 안개 속을 당당하게 활보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적합한 곳으로 이끌어 주면 되는 것이다

까만 안개를 적절히 조종하면 어떻게든 잘 될 것이다

 

엘디스는 순간 의외의 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크게 끄덕인 후, 손가락 끝을 조금 구부렸다

 

검은 안개가 살짝 움직임을 바꾸었다

 

피에르트 또한 그 순간

복도 끝에 보이는 그 모습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녀의 검고 아름다운 눈이 일그러진 것을 보았다

 

"피에르트, 여기서 기다려 줄래?

아는 사이니까,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는 보검을 기울고,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상태가 안좋은 피에르트를

그 빛나는 용병에게 데려가는 것이

가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피에르트는 그런 나의 배려를 힘껏 차버리듯이, 대꾸했다

 

"농담이겠지?

설마 나 혼자 여기서 한가로이 기다리라는 거야?

정말 너무하잖아"

 

나는 이래도 게으름뱅이 처럼은 살지 않을 것이지만, 이라고

피에르트는 그런 말을 덧붙이면서, 검은 머리를 휘날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살아난 것처럼 생생했다

 

조금전까지 어딘가 불안감에 당황한 듯한 모습은

어디에 가버렸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변한 모습이였다

 

피에르트는 입술이 터질 듯한 기세로, 말을 이어나갔디

 

"그날 밤, 빈민굴에서 내 손을 잡았을 때부터

난 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마음먹었어

공범자 씨, 네가 영원히 내 편으로 있어준다면 말이야"

 

피에르트는 그런 과거의 말까지 인용해서

황홀하기까지 한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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