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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88화 - 유일한 직함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1장 순례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88화 - 유일한 직함 -

개성공단 2020. 5. 9. 07:28

대신전의 제전

그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른 그림자가

한가로이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동시에 제단 위에 주저않은 그것이 벌떡 일어나는 기색이 느껴졌다

제단이 훨씬 높은 곳에 비치된 탓일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을 옮겨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천천히 사람의 모습이 만들어져 갔다

헤르트 스탠리의 눈동자는 어둠을 가르는 듯한 분위기를 들끓었고

그의 모습이 누구냐는 것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국가를 턱으로 부순 사악한 용

인류의 천적으로 칭해지는 악한 자

배덕자, 배신자, 이 세상 모든 악덕의 주인

 

그 이름은 대성교 사람으로선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고

누구나 그 이름을 기피하고 입에 담기도 꺼려했다

 

불러야 할 때에는 온갖 악의를 담아

가슴속이 타들어가는 증오와 공포를 일으키며

불리는 이름, 그 이름은...

 

루기스 브리간트, 악덕 그 자체

 

그 누구보부터 외면당해, 기피하는 자가

지금 프리슬란트 대신전 안에 떠올라 있었다

 

헤르트는 약간 입술이 떨리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너무 가혹한 여정을 떠나셨나 보군요

그 명성은 수 없이 들어왔기에

이제 저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양손으로 움켜쥔 백날의 대검이 흔들렸다

헤르트는 자신의 온몸이 모종의 떨림을 일으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두려움 같은 감정이 아닌

정반대의 어떤 다른 감정일 것이다

 

갈루아마리아의 일전 이후

서로 칼날을 겨루기는 커녕 조우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는 자신의 몸에 별의별 것을 입었다

 

문장교 속에서의 영웅이라는 명예, 대성교 속에서의 무서운 악명

그것들은 모두 그를 향한 갈채나 다름없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그것을

루기스는 지금 양어깨에 모두 품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눈동자에 비치는 모습도

과거 갈루아마리아에서 모험자라고 할 때와 비교하면

한 없이 거대하고 위압적이다

그것은 몸가짐이 어떻다기보다는 그 행동 때문일까

 

하지만 그 분위기에 눌리는 기분도

압도 당하는 기분도, 헤르트에겐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몸이 뜨거워지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미소를 지어갈 뿐이였다

 

루기스는 헤르트의 미소에 응하면서, 허리 밑의 보검을 기울였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그의 완전한 표정은 읽을 수 없지만

거기에는 일그러지는 듯한 미소가 있는 것 같았다

 

루기스의 이가 크게 울렸다

그러면서 입술을 열며,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까, 라며 소리를 질렀다

 

"너라는 영웅을 잊는다면, 나는 그런 명성이 의미가 없어진단 말야"

 

무엇인가 흉포함 같은 걸 기억하는 루기스의 험악한 눈이

자신을 관통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그 행동과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나는 아직 그의 적으로 있을 수 있던 것 같다

멋진 일이야, 기쁘기 짝이 없군

나 또한 그 덕분에 지금까지가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전장의 약정에 정해진 대로, 할 것은 단 하나

헤르트의 시퍼런 칼날이, 천장을 반사시켰다

 

서로 검을 두고 겨를 뿐

 

루기스가 먼저 몸을 던져, 

보라색의 검을 공간 자체를 단절하듯, 칼집에서 빼내었다

헤르트 또한 응하듯 한 걸음, 제전으로 거리를 좁혔다

 

그저 그만한 일로 질식할 정도로 공간이 압축되었다

 

"저는 영웅이라고 불릴 만한 그릇이 아닙니다

단지 헤르트 스탠리 일뿐, 그리고 당신 앞에 서 있다는 정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허영과 오만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차라리 담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말

그러나 그것이 틀림없는 헤르트 스탠리의 진심 그 자체였다

 

영웅이였다고, 명사였다고, 장군이였다고

과연 그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직함 등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루기스라고 하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직함 같은 것은 단 하나면 된다

 

헤르트는 자신의 애검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취했다

한숨이 목구멍을 절로 미끄러져 갔다

 

"저와 당신은 적이 될 수 밖에 없겠죠, 루기스 브리간트"

 

지난밤 루기스의 입에서 흘러내린 말을 건져내듯이 하며 헤르트가 말했다

 

그러자 루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라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눈이 형형한 빛을 발하면서, 그저 황금만을 꿰뚫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시간 문제였다

 

"그렇고 말고, 헤르트 스탠리"

 

헤르트의 말에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루기스 또한 커다란 외투를 벗어던지고, 보검을 몸에 싣는 자세를 취했다

눈빛은 흉한 분위기를 강하게 했고

그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밀끝에서 벗어나는 검은 뭔가가 보였다

 

그래도 역시 어딘가 흥겨움마저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루기스가 입을 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적임이 틀림없지

나는 버려진 아이로 미천한 몸

너는 귀한 자식으로 고상한 몸

내가 너에게 미칠 곳이라곤 손가락 하나 없었어

그렇기에 나는 네 등에 매달릴 수조차 없었지"

 

루기스가 말하는 말은

갈루아마리아 시절부터 변함없지

그는 마치 자신과 구면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었다"

 

하지만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인 것 마냥 생각 되어졌다

 

눈 앞에서 루기스의 기척이 더욱 강해지고, 선명해진 기색이 있었다

양자의 검이 하늘을 가를 것 같을 정도로, 기세를 더 해갔다

 

"그러나 지금, 이제 태양의 시대는 끝을 고하고

밤이 나를 위해 가슴속을 치켜올리는 시대가 올 거야

헤르트 스탠리, 오늘 너는 결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결정사항 같았다

루기스가 말을 마친 순간, 어둠 속에 흰색과 보라색의 검이 맞물렸다

어느 쪽이 먼저도 아니고, 어느 쪽이 나중도 아닌

 

단지, 서로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때를 위해서 지금까지 있었다는 듯이

양자는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이제 다른 누구의 목소리도, 그 두 사람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소꿉친구 루기스와 호위하는 헤르트 스탠리의 대치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알류에노는 황금 눈동자를 반짝이며, 목을 만졌다

손끝이 얼듯이 차가워진 감촉이 분명히 있었다

 

옆에서 보면 그것은 압도적인 검술에

두려움을 느낀 소녀처럼 보였을 것이다

적어도 알류에노를 지키도록 방패를 세운 성당 기사에겐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알류에노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은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였다

 

황금 눈동자가 감정을 태우며, 눈을 깜박였다

 

아, 역시 이것은 도저히 적의라든지, 원한이든지 그런게 아니야

 

확신이 사실로 바뀌고

그렇게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알류에노는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

마음에 안든다는 감정 뿐

 

헤르트 스탠리

그가 루기스에 떠올리고 있는 것들은

호적수나 친구에게 떠올리는 것들이다

친밀감이라고 불리는 그것

그것은 검을 맞물리는 지금조차도 간파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어디까지나 굳건하고 순수하다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 진지한 인간이라는 점에도 있을 수 있었지만

 

하여튼, 헤르트 스탠리 본연의 자세에

소꿉친구인 루기스가 응해버린 일 것은

알류에노의 가슴속을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밑바닥에서 기어 오른 것은

질투라든가 부러움 같은 감정 또한 아니였다

 

단지, 딱 하나

지금 루기스 주위에 있는 그들을

어떻게 해서 떼어낼 수 있겠는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디

황금빛 눈동자는 이제 뭔지도 모르게 될 정도의

초월한 반짝임을 띠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루기스가 잡아야 할 손은 하나

그리고 주위에 있어야 할 손도 하나면 된다

 

헤르트 스탠리 본연의 자세,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손을 내미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것만은 알류에노에게 도저히 허용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 주위에 마성의 기미가 모여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듯, 신전의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알류에노의 목소리가 술식을 수반해서 입에서 내뱉으려는 순간...

 

"당신, 그냥 얌전하게 있을 순 없겠어?"

 

알류에노의 귀에서 어딘가에서 들은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시야의 끝에서, 선명하다고 할 수 있는 검은 눈이 있는 곳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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