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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311화 - 영웅의 마음 - 본문
대재해
최초로 그 명칭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 누구였는지,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다
내가 그것을 직접 겪었을 때는,
모두가 넘치는 증오와 공포심을 가지고 그 이름을 불렀던 것 말고는 말이다
처음에는 단지 마수의 숫자가 늘어난 것뿐 이였다고 한다.
무리를 짓지 않을 마수가 무리가 되어,
본래 서로 합칠 수 없을 종족이 떼가 되어
갈라이스트 왕국 북서부의 스위프 요새에 손톱을 세웠다.
처음은 단지 그것 뿐
대다수의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갈라이스트 왕국 북서부란, 마수의 위협에 노출되는 곳
그렇다면 가끔 그런 일도 있을거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갈라이스트 왕국의 인간도, 타국의 인간들도 그랬다
한동안, 그 정도의 인식 밖에 대부분의 인간들에겐 없었던 모양이다.
인류의 인식이 드디어 뒤바뀐 것은,
철옹성 같던 스위프 요새를 수호하는 영웅 호걸이,
도합 13번의 공방전 끝에, 마인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그야말로. 신화 시대의 마인이 바깥 무대로 나온 처음의 기회,
그것은 대재해의 서막.
물론, 본래 역사란 어긋나 있을 가능성도 크지만,
여하튼, 전설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
크게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그 이후로의 일은 입에 담는 것은 물론,
회상하는 것만 해도 소름끼칠 정도였다.
스위프 요새 함락 후, 마수들은 파죽지세로 대지를 활보하고,
인간의 생존권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마수는 인간의 세상의 틈에서 살아왔을 터지만,
이번엔 인간이 마수의 세상의 틈에 낑겨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신화의 시대로 역행한듯이.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인간은 대지의 패자가 아니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인간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각국의 병사들은 창을 들고 마수의 숨통을 도려냈고
마법은 하늘을 달리며 적의 머리를 처부수며 돌아다녔다.
몇명의 영웅이 전장을 뛰어다니고, 여러명의 용사가 탄생했다.
언제부턴가 그것은 국가와 마족과의 전쟁이 아닌,
인류와 마족과의, 서로의 생존권을 둘러싼 전쟁으로 변모해갔다.
인류는 본래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엘프와 손을 잡고,
백년에 걸친 증오도 날려버리고 이웃 국가와 공동전선을 펼쳤다.
가능한한 사력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패배했다
마수들은 갈라이스트 왕국만이 아니라 각국에서 봉기해,
침식해가는 진흙처럼 대지에 어금니를 드러냈다.
인간이 조금이라도 대지에 씨앗을 뿌리면, 마인이 그 뿌리째 뽑아갔고
그리고 결국에는, 신화의 존재조차 인류의 적이 되었다.
영웅은 마인에 물려 죽고 용사는 전장에 가라앉는 그런 날들이
몇 년째 이어졌다.
어느샌가, 모두가 이것을 전쟁이나 전투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서로 비등한 전력을 가진 자들이
창을 서로 겨누는 것을 말한다.
서로 대항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줘야, 전쟁이, 비로서 성립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더이상 그런 건 없었다.
그저 포식당하는 쪽과, 포식하는 쪽이 있을 뿐이었다.
인류는, 마수에게 포식당할 뿐인 존재로 전락했다.
그래서 그 일련의 마수의 침략을 가리켜, 이렇게 불렀다
'대재해'라고...
*
"...안, 대신 글씨 좀 써줄 수 있을까?
난 글씨를 갈기는 바람에, 도저히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게 아니거든"
뭐, 빈사상태인 이 몸으론 제대로 쓰려고 해도 글자가 삐뚤해지겠지만
창 밖, 사설의 눈보라에 시선을 두면서, 무심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사고 같은 건 전혀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고,
편지를 쓴다 한들 뭐라 전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만이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떠져있었다.
말을 들은 안은 동요한듯이 끄덕이더니,
마티아님에게 말입니까, 하고 의아한 듯이 되물어왔다.
그럼, 따로 누가 있다는 건가.
그러고보니, 분명 지금까지 마티아에게 답장다운 답장을 해본 적은 없었다만.
가끔은 괜찮지 않은가.
말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쥐어 짜내면서, 입술을 우물거린다.
조금 입이 멈추는 일은 있어도, 신기하게도 말 자체는
무척이나 매끄럽게 공기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가자리아에도 한통 부탁해.
아무래도 공주님께선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거친 말들을 적어나가며 양피지에 단어를 채워나갔다.
뭐, 다소 실언이 있었다 해도,
안이 부드럽게 정리해주겠지, 라고
나는 그정도로 그녀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였다.
하지만 참으로 기묘한 느낌이었다.
어째서 이리도, 대재해를 눈 앞에두고도
나는 손끝을 움직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걸까.
저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기에, 대재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던가.
수많은 용사 영웅호걸들이 저것에 대항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악몽이 아니던가.
이제와서 나 하나가 처참하다고도 할 수 있을 악몽과 맞서싸워,
이 손에 무언가를 거머쥘 수 있을리도 만무하다.
그래서 계속 시선을 피해왔었으니 말이다
시야 뒤로 한때 애태웠던 영웅의 모습이 보였다
편지가 일단락 된 찰나에,
한숨을 내쉬며 손끝을 돌렸다
그러고는 선렬히 치솟는 통증을 무시하고
단숨에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신체는 근육을 조각만큼만 움직여도 온몸을 씹을 정도의 통증을 느끼게 한다.
지금 움직여서는 안 된다.
내 생명은 쉬어야 한다고 전력을 다해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고마운 일이다.
아무리 무리를 해도 내 생명만큼은 내 몸을 걱정해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정신성이란 녀석은 어디까지나 어리석음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충고가 전혀 의미를 얻지 못했다.
맞물리지 않는 관절을 강제로 맞물리게 해, 울부짖는 등뼈를 들었다.
뭐, 이치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튼튼해진 이 몸이다.
조금만 더 내 억지를 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침대에서 일어나, 뜨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머리맡에 있는 술을 직접 목에 들이킨다.
따뜻하게 데워진 방이라 그런지, 무척 뜨뜻미지근한 술이었다.
한랭기는 차가워지는 술이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말이다.
"뭐..뭐하는거야!?
아직 상처가 다 물지 않았다고!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고 싶은 셈이야!?"
바보 아니냐고, 필로스 트레이트가 외친다. 귀에 잘 울리는 목소리였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목소
리 때문에 더욱 날카로운 통증이 뼈에서 우러나올 것 같다.
입술을 비틀면서 입을 연다.
"무덤이라...
거긴 좀 따뜻하려나?
내 몸이 여기 가만히 있지 말라고 하는 것 같나봐"
그렇고말고. 평온함에 젖어,
모든 것을 타인에게 맡기고 나날을 살아가는 것은 평범한 자의 특권이다.
어려운 일은 영웅용사의 사냥감이며,
평범한 사람은 앉아서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기도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나쁜게 아닌, 그저 그런 게 세상 이치라는 것 뿐이다.
살아가는 자에겐 저마다 그 역할이란 것이 있다.
하지만 난 영웅, 헤르트 스탠리를 내 손으로 베어 죽였다
그럼 더 이상 무엇 하나 변명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제와서 세상 모르는 얼굴을 하고 무대의 막 아래에 숨는 걸
할 수 있을까 보냐.
이미 결정했다. 내 앞에는 이리 오라는 듯이 성가신 일들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뤼에노의 몸에 기생하는 악령을 어떻게 퇴치해야할까,
대재해를 어떻게 걷어찰지,
작은 일도, 이것저것 세어보면 끝이 없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전부, 하나하나 정성껏 먹어 치워 줘야겠군.
그렇고말고. 아무리 아르티우스가 강대하다고 해도,
대재앙이 위협 그 자체라고 해도,
외면할 이유가 되지는 않으니까 말야
얼굴이 창백해진 겁쟁이는 시궁창에 박아주면 그만이다
괜히 영웅이란 허송세월 같은 것에 깃들게 하지 않기 위해 말이다
허리춤의 보랏빛의 보검.
그리고 무명의 시퍼런 칼날을 가리키며 나는 말했다.
"필로스 트레이트. 마침 잘 됬어. 너도 협력해줬으면 해.
해야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으니 말이야"
나는 뺨을 무너뜨리며 말했다.
사고의 뒷면에선 어둑어둑한 것이 꿈틀거리며 속삭이고 있었다.
오래간만의 감각이었다.
문득 머릿속에, 나의 스승 리처드의 말이 생각났다.
'너에겐 재치가 있다.
나랑 같은 악한 자의 재능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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