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성 연합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648화 - 이것이야말로 나의 길이라고 말하리라 - 본문
눈동자를 뜨고
손끝의 감촉을 몇 번 확인했다
몇 번을 확인해도 오른손의 감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팔 자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마치 오른팔의 영혼만 멸망해 버린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 이유는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옆에 마검과
헤르트 스탠리의 백검이 엄숙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오른팔을 희생해서
둘도 없는 전우를 다시 잃어버린 거였어
몸을 움직이니 오른팔 이외의 감각은 무사했다
곳곳의 자국을 보아하니
아마도 피에르트와 엘디스의 소행일 것이다
카리아는 서투르지는 않았지만, 조금 난폭했군
주위에 그들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조용하게, 나 혼자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녀들이 나를 배려한 것일까?
아주 제멋대로군...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일어서서 한 걸음을 내딛으려다
발걸음이 상당히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르트를 죽여버린 무게가 새삼스럽게 온몸에 감기는 듯 했다
바보같군
지금까지 여러가지 인간을 죽여왔을텐데
새삼스럽게 감상을 안고 있다니
만약에 언젠가 헤르트의 친족이 증오를 품고 나를 죽이러 온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는 귀족 출신이니까 그에 상응하는 친척이 있었을 것이다
...라는 상상을 하는 나였다
기묘하게 무거운 다리를,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었다
머리는 왠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보였다
"아르티아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였어?"
"음... 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너, 루기스 네놈 속에 남겨진 잔재
하찮은 조각 같은 것이다
그리 경계할 만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래? 그럼 볼일은 없는 거네?"
대마 오우후르
이제 그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는 그림자의 모습이 보였다
표정조차 읽을 수 없었지만
웃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아니, 있다"
그는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말을 이어갔다
어딘지 상냥하게조차 보이는 두 눈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기회를 나르는 자
어짜피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고로 루기스, 네 녀석이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 기회는 지금 뿐이니, 어서 결정을 내리기 바란다"
"도망치다니?"
순간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오우후르가 무슨 의도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정말로 의식의 잔재만 남아 있을 뿐이니
의미 없는 말을 막 던지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나의 의도를 배신하듯 녀석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
그래서 이제까지 많은 후회를 안고 살았다
아르티아의 재주를 일깨워버린 것도 그렇지
그녀를 죽여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말이다
그리고 자네를 나의 숙명에 끌어들일 일도...
제대로 말하지, 네 녀석은 본래 영웅이 아니다
그러니 세상의 명운을 짊어질 필요도, 슬픔도 짓밟을 필요는 없다
그저 살고 죽을 자유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강요된 고통 따위를 절제해 버릴 권리가 네게 있는 것이다"
오우후루는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생전에 녀석이 사람을 매혹시킨 매력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녀석은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있었다
거기엔 거짓말은 없고 기만도 없었다
진실이란건 얼마든지 널려 있지만
그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마검과 백검을 허리에 찬 채 입을 열었다
"새삼스럽긴, 그럼 진작에 그러지 그랬어?"
"부정은 하지 않을 것이며, 변명도 하지 않겠다
아무튼 루기스, 도주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뿐이다
너도 모든 것을 다 집어치우거나
이제까지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 않은가?"
이 녀석은 지금 장난치는 건가
아니면 나를 그저 바보 멍청이인줄 아는건가?
그런거 없을리가 없잖아?
지금까지의 싸움이라고 하는 싸움에서
유리했던 것이 얼마나 있었을까?
목숨을 거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헛디디면 끝이 되버리는 싸움 뿐이 아니였을까?
그러다 헛디뎌 잃은 것도 많았다
나의 눈꺼풀 뒤에 수많은 기억이 지나갔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도망가 버렸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편하고,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문답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
"오우후르, 이미 뒤졌으면 좀 닥쳐줄래?"
나는 마검을 왼손 하나로 뽑아 칼끝을 그림자에 들이댔다
"나는 너처럼 아르티아에게 운명을 떠맡기지 않았어
나는 내가 선택해서 여기에 있는 거라고
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야, 루기스라고, 네 기억 속에는 없는 루기스"
뭔가 우스웠다
이런 간단한 문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기야 살다보면 이런가 능성이 있을수도 있고
이런 저런 선택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죽은 미래도 있었을 것이고
알류에에노나 리처드 할아범을
만나지 않았던 길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나은 선택도 있었을 것이고
어리석은 절차를 밟아 버린 일도 있었겠지
과거 오우후르의 손을 들어줬다는 것 자체가
옳았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선택을 한 것은, 누구도 아닌 나의 의지다
비록 그것이 어리석든 잘못이든 누가 나무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의지로 선택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망갈 생각은 없어
나는 그 선택지를 택하지 않겠어, 단지 그것 뿐이야"
나는 칼끝을 들이민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림자에 칼이 꽂힐 것 같았지만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었다
이에 그림자가 꿈틀거리듯 말했다
"그래... 내가 할 일은 이제 없다는 구나...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어!!!"
오우후르는 웃고 있는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림자는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 그가 그곳에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아보였다
그러나 그 사라져가는 한순간만큼은
그의 얼굴이 보인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
오우후르라는 인간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이였다
오우후르는 웃으면서 말했다
"좋다 루기스
사실 인간이란 인생이라는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거야
그저 그것을 아무도 모를 뿐이지, 나는 그것을 알릴 뿐
너는 이제부터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림자는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멋대로 말하고 그냥 사라지다니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녀석이였다
하지만 뭐, 나하고 녀석하고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서로가 일방적으로 말을 할 뿐
협력도 협조도 있는 것이 아니였으니 말이야
요점은 엇비슷한 사람들이랄까
나는 마검을 움켜쥐고 오른손을 몸에 기댄 채 걸었다
이제 나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단을 뛰어올라 들어선 궁궐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거무튀튀한 핏빛과
마인과 인간의 시체, 그리고 일부가 질질 끌려간 자국이였다
이것은 누가 한 짓일까... 그것은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된 걸까... 알류에노"
나는 그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것도 나의 선택의 끝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지
시체투성이 공간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칼을 빼들고 복도로 칼끝을 들이댔고
마음에서는 감상이 사라지고 경계심이 온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풀렸으니
"브루더!"
허벅지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내면서
복도 벽에 손을 얹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걸어가는
브루더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
빛나는 것은 항상 영원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새로운 미로 계승된다
영원히 존재하는 반짝임은 머지않아 진부해지고 빛을 잃어갈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상실되는 미래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빛나는 것은 훌륭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역시 찬란한 것의 상실은 슬픔을 수반하는 법
"정말이지... 왜 그런걸까? 도저히 모르겠어, 물론 상관없지만"
옥좌에 앉은 채 알류에노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옥좌의 사이에는 수많은 마성과 인간들이
그 몸을 땅에 엎드리고 있었다
아무도 무사한 사람은 없었다
그 영혼의 목덜미에 손이 걸려
나중에는 아기의 손을 비틀듯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기다릴 뿐이였다
모두가 절망과 고민을 안고
깨어나지 못하는 악의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하나
벌써부터 사라지려고 하는 빛이 있었으니
"..........."
보석 아가토스는 이제 몸에서 힘을 잃고 있었다
알류에노에게 당한 상처와 반신을 잃은 탓이였다
보석 같던 눈동자에 더 이상 빛은 없고
온몸에서 혈액과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아가토스였다
그것은 마력에 의해 만들어진
그 모습이 한계를 맞고 있음을 전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알류에노는 개의치 않은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아가토스에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에게 적대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분명 다른 방도가 있었잖아?"
강자에 맞선다는 것이
마성의 행동원리가 아님을 알류에노도 알고 있었다
강자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본능일 것이다
인간인 카리아, 피에르트
그리고 루기스와 강하게 연관된 엘디스는
알류에노가 루기스를 빼앗을 것임을 알기에 적대한 것이였다
하지만 아가토스는 달랐다
그녀는 얼마든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문득 알류에노의 눈동자에
아가토스 가슴팍의 보석이 박힌 보석이 보였고
그녀는 빈 한 손으로 무심코 그 보석에 손가락을 뻗었다
"......!"
무의식일까?
아니면 의식이 있는 것일까
눈동자에서조차 빛을 잃은 아가토스가
한 손으로도 필사적으로 보석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 이유인걸까?
알류에노는 아가토스의 힘없는 손을 냅다 걷어찼다
그것만으로 아가토스의 손가락이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어떻게든 보석을 지키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류에노는 보석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루기스에 대한 집착과 의존과
굴레에 비할 만한 감정이 담긴 것이니
만약 남겨두었다가 아가토스는 다시 루기스에게
손을 내밀려고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알류에노는 그런 일을 허용하지도
허락하지도, 감내하지도 않았다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그녀는 내치려고 하는 것이였다
아가토스의 소리 없는 오열이 새어 나왔다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뒤틀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 알류에노의 손가락이 갑자기 멈췄다
보석에 관심은 있었지만 그것은 호기심이였던 것
그녀가 진정으로 의식을 향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어머 늦었내? 뭐, 상관없어"
알류에노는 옥좌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
매우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림자가 두려워서 피할 만한 기상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루기스가 고아원에 들렸을 때의 표정이였다
그녀는 아가토스의 목을 잡고 있던 손가락에 마력을 담았다
매우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렸고
알류에노는 더 이상 보석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알류에노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와, 루기스"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 > 최종장 신화혈전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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