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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07화 - 악당의 재주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8장 악덕 왕국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207화 - 악당의 재주 -

개성공단 2020. 4. 28. 13:34

시각은 이른 아침, 막 햇빛이 뜨기 시작할 무렵

회담을 하는 곳은, 자치 도시 필로스의 눈앞에 펼쳐진 서니오 평야

그곳이 가장 공평한 자리일 것이였다는 소리 때문이였다

 

말굽이 흙을 두드리는 감촉이 몸을 흔들었다

평야의 중심부로 내가 들어섰을 무렵엔

이미 저 멀리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잿빛 어둠에 익숙해질 법한 갑옷을 몸에 걸치고

어딘지 불손함을 느끼게 하는 눈을 띄운 인간이 거기에 있었다

 

호위를 위에 따라오던, 가자리아의 부대에게

손을 설레설레 흔들어서 멈추게 했다

그리자, 상대로 똑같이 호위부대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혼자서 평야의 중심으로 말을 타고 나아갔다

내가 아는 남자치고는 예의 바른 일 이였다

 

"그 동안 살 좀 뺐어, 할아범?"

 

서로간 내는 목소리가 더 이상 호위병에게 닿지 않을 무렵

나는 눈 앞의 상대에게 가벼운 말을 던졌다

적장이자 나의 스승 리처드는 찌그러진 미소를 띠며, 말을 울렸다

 

"녀석, 그런 말도 할 수 있게 되다니, 많이 컸군"

 

웃음소리를 포함한 목소리에, 덕분에라고 양손을 들썩이며 응했다

 

리처드의 할아범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들었지만

어딘지 늙은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술집에서 술을 벌컥벌컥 마실 때마다

훨씬 젊어 보였을 정도였다

마치 이곳이 익숙한 곳인 것처럼...

 

몇 번이고 말을 주고 받았다

딱히 별 내용은 없었고, 옛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면서, 아무 의미도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할아범과의 그리운 추억팔이는

나도 모르게 나의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상대는 지금부터 서로 죽일, 적이 틀림없었지만...

 

평야를 뒤덮은 키 큰 풀들이 바람에 덜컹거리는 듯 울부짖었다

 

"그러고보니, 할아범. 

할아범이 대성교 대대장이라니, 이상한 술이라도 마신거야?"

 

이야기는 이쪽에서 먼저 꺼냈다

나쁜 기분은 아니였지만, 끝없이 시시한 이야기를 반복해버린다면

머지않아 할아범의 함정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설령 다소 성급하더라도, 이쪽에서 내딛는 것이 좋았다

 

할아범은 어딘가 편안한 미소를 띤 채,

그렇다며, 한 박자를 놓으며 말했다

 

"뭐, 분수에 맞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나도 언제까지나 시치미를 떼고 잇을 순 없으니까 말야"

 

할아범의 몇 해를 거듭한 눈동자에

일순간 섬광이 지나간 것 처럼 보였다

하얀 턱수험이 할아범의 손가락에 쓸려 흔들렸다

 

분수에 맞지 않다... 그래, 적어도 내가 아는 할아범은 공식무대에  

일부러 발을 들여 놓을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무대 뒤편에서 사람을 조종하는 그런 사람이였어

위험한 다리를 스스로 건너지 않고, 

누군가를 이용해 먹으며, 이익을 손에 얻는 그런 사람...

 

할아범은 목 쉰 목소리로, 그렇지만 아, 하며 말을 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건, 오히려 너 아니냐, 루기스?

듣자하니 영웅이란 직함을 받았다던대"

 

과연, 그 말을 듣자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빈민가의 수렁길에서 잠자리에 들고 있을 무렵을 생각하면,

영웅이라고 하는 직함은 어울릴 수가 없었다

 

할아범은 나의 표정을 읽었는 지, 크게 목을 출렁거리며 웃었다

그저 쾌활함을 포함하지 않은 솔직한 웃음소리였다

 

"그래, 나는 말야,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목 언저리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

이렇게 영웅이란 장식을 입히고, 식전 따위에 끌려가다니

내가 봐도, 난 바보같기 짝이 없는거 같아"

 

과연 스승이라고 할 만 하군

내가 닮은 건지, 아니면 원래 똑같은 성질이 있는지 몰라도

아무래도 감성만큼은 닮은 데가 있는거 같아

 

"그래, 분수가 맞지 않다...

세계에 겉과 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무래도 겉을 걷고 있는 동안은,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거야

타고난 성질이나, 공기, 물, 모든게 다 맞지 않아

물고기도 새도 그렇겠지만, 인간에게도 살아야 할 곳이라는게 있다는 걸까?"

 

나는 그 근처에서 할아범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말고삐를 쥔 손에 약간 땀이 흘렸다

그 자리에서 말발굽이 가볍게 흙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루기스, 너는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네가 사는 곳이라고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드냐?"

 

상당히 빙 돌려서 하는 말이지만

그게 할아범 나름의 배려라는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느새 할아범의 바구니에 휘말려 버린 것일지도...

 

하지만 할아범의 말에 심징이 큰 소리를 낸 것은 사실였다

나는 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닦았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나는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할아범의 얼굴에 새겨진 상처가 크게 일그러지는게 보였다

 

"어리석게 굴지 마라, 루기스"

 

할아범은 짧게 말하고, 말을 끊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너도 나와 마찬가지야

영웅이란 품위나, 광활한 거리를 걷는 건 체질이 아니야

그딴 건 튀어보이는 바보 자식에게 맡기면 돼"

 

리처드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그리운 것을 보는 듯

애수를 머금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묘한 실감마저 담겨 있었다

 

옛날에 술집에서 시시한 잡담을 들은 적이 있었다

리처드 할아범은 빛을 받는 무대에 선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할아범은 그야말로 지위도, 명예도

그 손에 잡힐 듯한 큰 자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재치도, 운도, 실력도, 확실히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분명, 그대로 높은 곳으로 뛰어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범은 그런 것을 모두 내다버린 채,

실망을 안고 뒷골목으로 몸을 던졌다

 

그것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잡담을 할아범에게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때 할아범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묘한 실감과 무게감으로 가득 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 뭐야, 할아범처럼 뒤에서 사람들을 이용해 먹으라는 거야?"

 

나는 할아버지의 말이 잠깐 끊긴 틈을 타서 말했다

뱃속엔 속이 부은듯한 감각이 있었고, 미간엔 절로 주름이 잡혔다

 

"그렇고말고, 그것밖에 선택은 없을 거야"

 

대답은 짧았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할아범이 나를 일부러 불러낸

목적이었음에는 틀림 없었을 것이다

 

눈꺼풀이 몇 번 깜박였다

 

"갈라이스트는 말이다. 바보 같은 나라다

핏줄...가문...영광... 그것만을 염두에 둔 녀석들이 얼마든지 있다구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나라의 각본을 쓰는 것들이 그 바보들이란 말야"

 

할아범의 말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듣기 싫어도, 억지로 귀를 뚫고 들어오는 그런 느낌이였다

 

"그런 각본에 넘어갈 바에는, 

차라리 무대 뒤편에서 실을 당기는 편이 훨씬 낫다"

 

할아범의 표정이 뭔가 생각난 듯 어른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시선을 돌아, 나를 꼿꼿이 관통했다

 

어느새 경박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할아범이

갑자기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며

천천히 무게를 동반한 쉰 목소리를, 서니오 평야에 울렸다

 

"루기스, 나와 함께 일 해볼 생각은 없나

네 풍문을 듣고 몇 가지 정보를 수집 했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일이지만, 네게는 가치가 있다"

 

칭찬이라니 고마운데, 손을 듣고 기뻐할 일이야

물론 이 자리만 아니였다면 말이지...

 

"물론 모험자로서의 재주는 아니야

너의 검기에 칭찬 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고"

 

리처드의 할아범의 말이 다시 내 귀에 닿았다

나는 눈을 휘둥그리게 뜨면서, 얼굴을 굳혔다

그림자의 모양이 약간 바뀌어서, 햇빛의 방향을 전하고 있었다

 

"너는 혀로 사람을 선동하고, 이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

그리고 목적 이외에는 어찌 됐든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군

자기 때문에 남이 죽든 말든, 알 바가 아닌

루기스 너는 말야..."

 

영락없는 악당이다. 나랑 같은 종류군

 

리처드의 할아범의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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