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8성 연합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14화 - 교의의 괴물 - 본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完)/제14장 마인 편

바라건대 이 손에 행복을 제414화 - 교의의 괴물 -

개성공단 2021. 4. 10. 01:19

=






최전방 왕도 아르셰보다 훨씬 뒤 편
괴뢰도시 필로스로 이어지는 가도
그곳에 폭설이 쌓여, 그 가도에 흰 화장을 더해갔다

상인이 이 곳을 지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거기에 바퀴 자국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냥감이 적어서인지 마수가 짓밟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흰 화장엔 꼿꼿한 군화 발자국뿐이었다

이제 이곳은 후방이 아니다



눈을 밟으며, 이천이 넘는 군병이 나아갔다
그들이 내거는 것은 문장교의 깃발
바람에 나부끼는 그 모습은 빛깔 때문인지
이따금 타오르는 불꽃으로도 보였다

이들을 이끄는 장수는 문장교의 중진 살레이니오
그를 신망하는 자들도 덩달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모양새는 매우 용감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이 칼을 휘두르겠다고 나서는 것은
최대 적인 대성교가 아니였다
그렇다고 악역적인 마성의 종류도 아니었다

적은 본래 신앙을 같이하는 형제자매... 이지만
그들 주인의 주장을 달리하는 것들이였다


성녀 마티아의 현 체제
그리하여 루기스적인 영웅의 대두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 받아들이 자라는 상대를 베어버리자는 것이였다

신앙 때문에 살길을 함께한 이들은 그 신앙 때문에 길을 갈렸다

이제 철수나 작전 중단을 건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누구나 자신이 되돌릴 수 없는 곳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물러날 수 없는 지점까지 발길을 옮겨 버린 것이였다

그래서 말없이 그들은 문장의 깃발을 나부끼며 계속 눈을 더럽혔다






"살레이니오 님, 눈이 그쳤습니다
곧 행군을 재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휴식 중인 천막 안에서 엷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성의 것인 줄은 알지만
중성적인 것이 귀에 선뜻 들어오는 목소리였다.

살레이니오는 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그뿐 아니라 입은 갑옷의 무게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뼈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왕년처럼은 안 될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늙었을까 하고 살레이니오는
표정 없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라면 싸움터에 나가는 짓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기든 지든 말이다


곁을 지키는 남자는
살레이니오에 막 끓인 물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문장교의 중진에게 말을 건네는 것 치고는
유난히 친숙한 듯 했다





"살레이니오 님이 직접 전장에 나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갈루아말리아에 머물 수 없었느냐고
그렇게 덧붙이는 그의 말에
깊은 주름을 찌푸리며 살레이니오는 화답했다





"조용히 하거라, 버나드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으니 말이다"





쉰 목소리를 흘리며 웃듯 살레이니오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역시 나이 드는 건 싫다고 생각했다

살레이니오나 그를 신망하는 원로들이나
과거 문장교를 위해 몸과 솜씨를 발휘했고
때로 피를 흘리며 열심히 교의를 지켜왔다

그 때문에 뒤가 구린 일을 저지른 적도 있었고
지금처럼 갑옷을 입고 목숨을 주고받은 적도 있었다
그리운 과거가 살레이니오의 눈꺼풀 뒤로 한순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먼 옛날
이제 문장교도 그 모습을 변모시키고 있었다

이성에서 감정으로, 타산에서 충동으로
지성을 존중하는 교의가 상실된 것은 아니지만
마치 지금의 문장교는 다른 생물처럼 느껴진 적이
살레이니오에게는 있었다


살레이니오는 생각했다
인간은 언제나 이익과 두려움을 좇는 자, 타산의 노예다
그래서 이렇게 취약하면서도 연명하며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것을 잃으면 인간은 야생 짐승과 다르지 않게 되는 법

그러므로 문장교는 지성을 믿으며, 타산을 좋다고 여겼다
그것이 인간을 번영시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였다
그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왜인가

원흉은 틀림없이, 그 루기스라는 영웅이자 역적
저것이 조류를 바꾸게 한 한 요인이였다

그렇다고 그 남자가 전부인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범위는 뻔하다
요컨대, 사실은 어딘가에 그 씨앗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것을 싹트게 한 계기가 그 남자라는 것뿐


문득 살레이니오는 손바닥을 보았다
한때 딱딱하고 두꺼웠던 손가락이
많이 가늘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엔 이 손바닥에 잡힐 정도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어느 정도의 것이 이 손에 안기고 있다고 하는 것인가





"버나드, 넌 젊은데 왜 나와 가까워지려 하는가?"




젊은 사람들 중에는 역시라고 해야 할지
루기스라는 자를 영웅시하는 인간이 많았다
특히 핏기 많은 젊은 남자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인간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버나드로 불리던 병사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어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살레이니오 님의 주장이야말로, 저의 성질에 맞기 때문이라 할까요
저는 앞의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매우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성과 타산적으로 행동하면, 좋든 나쁘든 앞을 내다볼 수 있죠"




그 말을 듣고, 좋은 대답이라고 살레이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렁뚱땅 얼버무리지도 않고
자신에게 맞는다고 단칼에 결의하는 그 성격은 좋기 때문

어쩌면 살레이니오를 따르는 이들 중
상당수는 버나드와 비슷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익도 있을 테고 타산도 있을 테지
하지만 결국 그 뿌리에 있는 것은
성녀 마티아와 루기스가 이끄는 문장교가 낯설기만 한 것이다
늙으면 늙을수록 변화는 어려워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나와 성녀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살레이니오는 주름 잡힌 뺨을 치켜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믿는 신앙의 형태와
성녀와 루기스가 보여주는 문장교의 형태
그 어느 쪽이 문장교를 번영으로 이끌 것인가
어느 것이 진실인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진실만이 살아남는다고 살레이니오는 믿었다

역사가 다시 자기를 선택한다면
도시 필로스를 함락시키고 마지막에는
루기스의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

하지만 만약 역사가 그를 선택한다면
그에게 그만한 운명이 따라다닌다면
나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오래된 사람, 새로운 사람
어느 한쪽은 반드시 소멸되어야만 할 것이다



조직은 항상 파괴와 재생을 반복한다
때로는 그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어
불필요한 부분을 절제하는 일도 필요한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립만을 잉태한 채
덩치만 커져 꼼짝 못하게 될 뿐
평시라면 그것도 좋지만 지금은 더 이상 느긋할 때가 아니였다

게다가 지혜를 존중하기 때문에
체제에 매달릴 만한 존재는 문장교에 바람직하지 않다
대부분의 생각이 어떻든 살레이니오는 그렇게 판단했다

아마도 이 이천 명의 군사 중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살레이니오 뿐
그리고 약간 곁에서 시중드는 버나드뿐이었다

사람이란 겉모습을 보면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아도
그 근본에 있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하는 경우는 허다한 법이였다



살레이니오라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문장교 교의의 괴물이였고
타산적이라면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였다

문장교라는 조직은 그 덕분에 과거 붕괴 직전에서 살아남아왔다

살레이니오는 천막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죽음의 눈은 그 몸을 조금 가라앉히고 이제 그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행군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허리에 호신구인 단검을 차고
외투를 갑옷 위에서 걸치게 했다
입에서 하얗게 입김을 흘리며
살레이니오는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 먼 시야 끝에 도시 필로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 운을 시험해보자"



그는 볼을 일그러뜨렸어 말했다

Comments